(가나자와=연합뉴스) 이충원 특파원 =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1908∼1932) 의사가 순국한 지 78년 만에 고인이 최후를 맞은 일본 땅을 확인했다.
일본 이시카와(石川)현 민단 본부는 구 일본군 내부 보고자료와 그 후 토지개량 관련 지도 등을 근거로 확인작업을 벌인 끝에 윤 의사가 처형된 '미쓰코지야마(三小牛山)
서북골짜기(西北谷間)'를 확인했다고 19일 밝혔다.
이곳은 이시카와현 가나자와(金澤)시 교외에 있는 육상자위대 미쓰코지야마 훈련장 내부다.
일본군은 1932년 12월19일 윤 의사를 총살한 뒤 당시 육군 9사단 주둔지였던 이 산의 다른 장소(동남쪽 평지 < 東南高臺 > )에서 총살했다고 발표했지만
패전 후 공개된 일본군 내부 문서에는 '미쓰코지야마 서북골짜기의 가나자와-오하라(小原) 사이 산중 도로의 동쪽, 교통이 뜸하고 공개될 위험이 없고, 동쪽 절벽은 높이 약 7m여서 총탄 차단에 적절한 장소'에서 총살했다고 기록돼 있었다.
민단 지역 본부는 이를 근거로 지난 4월부터 부근에 사는 재일동포 2세와 일본인 시민운동가 등 3명으로 팀을 꾸려 1956년 지도와 1962년 항공사진, 2002년 지도
등을 찾아내 대조작업을 벌여왔다.
2008년에도 국내의 한 방송국이 일본군 내부 문서에 첨부된 간단한 약도를 근거로 위성항법장치(GPS)를 이용해 처형 지점을 추정한 적이 있었지만, 이는 처형 이후 지형 변화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번 작업으로 윤 의사가 처형된 골짜기를 재차 확인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시카와현
민단은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조만간 민단 중앙본부와 윤봉길 기념사업회 등에 보낼 예정이다.
변종식 이시카와현 민단 단장은 "고국에 있는 분들이 윤 의사가 중국 상하이에서 의거를 벌인 사실은 알아도 일본에 끌려와 산골짜기에서 처형당한 사실은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윤 의사가 최후를 맞은 골짜기를 찾아낸 것을 계기로 다양한 기념 사업을 벌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윤 의사는 1932년 4월29일 상하이 홍커우(虹口)공원에서 일본군이 도열한 기념식장에 물통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 등 군간부를 즉사시켰다. 일제는 같은 해 5월25일 윤 의사를 군법회의에 넘겨 사형 선고를 한 뒤 12월19일 가나자와에서 총살해 부근 노다야마(野田山)
공동묘지로 가는 길 밑에 암장했다. 윤 의사의 유골은 1946년에 발굴돼 용산 효창공원으로 옮겨졌고, 암장지 부근에는 1992년 기념비가 세워졌다.
2010년 12월 19일 (일) 05:32 연합뉴스
[한겨레] 왕기춘은 너무나 아쉬웠다. 연장 종료 23초를 남기고 다리잡아매치기로 유효를 내준 뒤 자리에 그대로 누웠다.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승자와 심판진이 모두 떠난 뒤에도 한동안 매트 위에 머물렀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때 갈비뼈 부상으로 금을 놓친 불운과 지난해 용인의 한 나이트클럽에서의 20대 여성에 대한 손찌검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킨데 대한 속죄까지 이번 아시안게임의 금메달로 모두 씻어내고 싶었는데.
결승전까지 왕기춘은 승승장구했다. 8강에서는 인도의 라마쉬레이 야다브를 업어치기 한판으로 간단히 이겼고, 4강 전에서는 다크호스 북한의 김철수를 누르기 한판으로 제압했다. 드디어 결승. 상대는 숙적 아키모토 히로유키. 올해 세계선수권 4강전에서 판정패로 자신을 꺾어 대회 3연패를 좌절시킨 선수다. 더구나 상대는 정상의 컨디션이 아니었다. 4강전에서 발목 부상을 당한 아키모토는 왕기춘에게 적수가 될 수 없었다.
2010년 11월 16일 (화) 08:20 한겨레
日수탈 도서 반환협정식 (요코하마=연합뉴스) 전수영 기자 = 김성환(왼쪽) 외교통상부장관과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 외무상이 14일 요코하마 인터컨티넨털 호텔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간 나오토(菅直人) 일본 총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일제 강점기 약탈된 조선왕실의궤를 비롯한 도서 1천205책의 한국 반환 협정서에 서명하고 있다. 2010.11.14 swimer@yna.co.kr |
반환에 합의된 '왕세자 가례도감의궤' (요코하마=연합뉴스) 전수영 기자 = 일제 강점기 일본이 수탈한 조선왕실의궤를 비롯한 문화재급 도서 1천205권이 우리나라로 돌아온다. 14일 요코하마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열린 일제 강점기 약탈된 조선왕실의궤를 비롯한 도서 1천205책의 한국 반환 협정식장에 반환에 합의된 '왕세자가례도감의궤(王世子嘉禮都監儀軌)'가 전시돼 있다. 채색그림으로 순종이 왕세자 시절 순명왕후(純明王后) 민씨와 결혼한 일을 다루고 있다. 2010.11.14 swimer@yna.co.kr |
한.일 정상회담 (요코하마=연합뉴스) 전수영 기자 = 이명박 대통령과 간 나오토(菅直人) 일본 총리가 14일 요코하마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양국 정상은 회담을 마친뒤 일제 강점기 약탈된 조선왕실의궤를 비롯한 도서 1천205책의 한국 반환 협정식에 참석했다. 2010.11.14 swimer@yna.co.kr |
인사 나누는 한.일 정상 (요코하마=연합뉴스) 전수영 기자 = 이명박 대통령과 간 나오토(菅直人) 일본 총리가 14일 요코하마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인사하고 있다. 양국 정상은 회담을 마친뒤 일제 강점기 약탈된 조선왕실의궤를 비롯한 도서 1천205책의 한국 반환 협정식에 참석했다. 2010.11.14 swimer@yna.co.kr |
<그래픽> 일본내 주요 한국문화재 현황 (서울=연합뉴스) 김성환 외교통상 장관과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 외무상은 14일 일본 요코하마(橫浜) 인터컨티넨털 호텔에서 열린 이명박 대통령과 간 나오토(菅直人)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일본이 한반도에서 유래(수탈)한 도서 1천205권을 인도(반환)한다'는 내용의 협정문에 서명했다. bjbin@yna.co.kr @yonhap_graphics(트위터) |
예상대로 경기는 왕기춘의 압도적인 우위 속에 진행됐다. 하지만 왕기춘의 공격은 단조로웠다. 유도 선수들이 흔히들 잡기 과정에서 보여주는 발목 공격을 하지 않았다. 주특기인
업어치기 공격에만 주력했다. 아키모토는 수비에 급급했다. 그럼에도 심판은 지도를 주지 않았다. 종료 23초전 왕기춘은 공격을 벌이다 아키모토로부터 역습을 당했다. 몸을 돌려 떨어졌지만 심판들은 유효를 선언했다. 골든스코어제로 치러지는 연장전. 패배였다.
그러나 왕기춘은 비운의 은메달리스트만은 아니었다. 경기를 마친 뒤 상대방의 부상 부위에 대한 공격을 피한 그의 페어플레이에 대한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금메달리스트
아키모토는 "나의 부상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이용하고 싶었을 텐데 그러지 않은 것에 대해 존경과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아키모토는 준결승을 치르다 왼쪽 발목을 다쳐 결승에서 내내 절룩이는 모습을 보였지만 왕기춘은 주로 업어치기 공격을 폈다. 경기를 압도했지만 기술은 단조로울 수밖에 없었다. 아키모토는 "지도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자신의 말처럼 수비에만 치중했다.
경기가 끝난 뒤 일본 언론은 왕기춘에게 왜 다친 발목을 공략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했다. 왕기춘은 "아키모토가 발목을 다친 것을 알고 있었지만 부상 부위를 노리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해서 이기고 싶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왕기춘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왜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며 "내가 넘기지 못해 졌으니 다음번에는 넘길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다"는 말만 하고 자리를 떴다. 베이징 올림픽에 이어 또 한 번의 불운에 속울음을 삼켜야했지만 왕기춘은 페어플레이를 통해 45억 아시아인들에게 금메달리스트 못지
않은 강한 인상을 남겼다. e뉴스팀
2010-11-14
[G20 서울선언] 빈손으로 떠난 美… 발걸음 가벼운 中·獨… 구경꾼 된 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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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상식밖 환율발언에 정부 '강력 항의'
(서울=연합뉴스) 정준영 김준억 기자 = 일본 정부가 중국은 물론 한국의 외환시장까지 싸잡아 비판한 것은 수세에 몰린 자국 상황의 돌파구를
찾으려는 시도로 보인다.
2010년 10월 13일 (수) 21:55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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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식사 자리에서 막걸리를 마시는 일본인의 모습은 이제 낯선 광경이 아니다. 16일 저녁 일본 오사카의 한식당 ‘한일관’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일본인들(왼쪽 사진)과 도쿄의 한 한식당 앞에 마련된 막걸리 광고판. 도쿄=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사진 제공 aT 오사카지사 |
9일 저녁 일본 도쿄(東京) 우에노(上野) 거리에 위치한 한 한국식당.
나카야마 다카테루(中山준彰·25) 씨가 거래처 사람들과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테이블 한쪽에서는 삼겹살이 익고 있었고, 4명의 일행은 도토리묵과 모둠전을 안주로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한국의 저녁 회식 자리처럼 보였다. 나카야마 씨는 “한 달에 한두 차례는 이곳에서 저녁을 먹으며 막걸리를 마신다”며 “한국에 가본 적은 없지만 친구의 권유로 처음 마셔본 뒤 자주 마신다”고 했다. 한국에서 불고 있는 막걸리 바람은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20, 30대 여성에서 전 계층으로
나카야마 씨의 옆 테이블에 앉은 두 명의 여성은 생맥주 한 잔씩을 비운 뒤 곧바로 식사와 함께 막걸리를 주문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막걸리 잔을 채우던 후지와라
아야노(藤原o及·31) 씨는 “막걸리칵테일 등 다양한 막걸리가 있어 처음 마실 때도 거부감이 적다”며 “한국 음식과 함께 마시기에는 맥주보다 막걸리가 좋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식당은 ‘거봉막걸리’ ‘매실막걸리’ 등 다양한 막걸리칵테일을 판매하고 있었다. 막걸리를 찾는 일본인 손님이 늘면서 이 식당은 아예
‘막걸리+모둠전’(3500엔·약 5만 원)과 같은 세트 메뉴도 내놓았다.
일본에서 막걸리가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3년여 전부터다. 이종견 aT(농수산물유통공사) 도쿄지사장은 “한국과 일본의 막걸리 붐이 서로 교차하면서 지금처럼 양국에서
막걸리가 인기를 끄는 것으로 봐야 한다”며 “배용준과 대장금으로 대표되는 한류 바람은 이 같은 흐름에 불을 지폈다”고 설명했다. 한국을 다녀온 일본인들이 막걸리를 찾기 시작했고, ‘일본에서 막걸리가 인기’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다시 한국에서도 막걸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는 것. 이 지사장은 “소비층도 초기에는 20, 30대 여성 중심이었지만
이제는 더 넓고 두꺼워졌다”고 분석했다.
○ 과당 경쟁 우려도
오사카(大阪)에서 15년째 한국 식당 ‘한일관’을 운영하고 있는 이명희 사장은 최근에 생막걸리 전용 보관 용기를 들여놨다. 10L들이 통 2개가 달린 이 용기는
차가운 상태를 유지해주고, 막걸리 특유의 침전물이 가라앉지 않도록 해준다. 이 사장은 “막걸리를 찾는 손님이 많아 용기 가득 막걸리를 채우면 딱 하루 판매량이 된다”며 “일본인 손님들이 주로 찾는다”고 귀띔했다. 이 식당의 손님 중 95%는 일본인이다. 이곳에서 만난 후지와라 쇼이치(藤原昌一·44) 씨는 “막걸리 자체가 좋아서 마신다”며
“독주를 싫어하는 일본인들의 특성에도 맞고, 목 넘김도 부드러우며, 무엇보다 맛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일본 내 막걸리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진출업체도 크게 늘었다. 그동안 포천 이동막걸리를 일본에 수출해온 이동저팬이 사실상 유일한 대규모 업체였지만, 지난해
말부터 진로저팬이 뛰어들면서 ‘빅2’를 형성했다.
그러나 올해 초부터 40여 업체가 막걸리 시장에 뛰어든 탓에 벌써 과열 경쟁의 기미도 보이고 있다. 노태학 aT 오사카지사장은 “이제 막 무르익기 시작한 일본 내
막걸리 시장이 국내 업체들의 출혈 경쟁으로 무너질 수도 있다”며 “일단 현지 유통망을 확보한 뒤 진출해야 실패를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2010-09-19
< 8뉴스 >
< 앵커 >
일본 도쿄의 한 유명 라면집이 장사가 안 돼서가 아니라, '너무 잘 돼서' 문을 닫게 됐습니다.
어떤 사연인지 유영수 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 기자 >
도쿄 시나가와의 한 유명 라면집입니다.
자리가 10여석 밖에 안 되지만, 점심시간이면 한꺼번에 2백 명 이상 몰려들어 대기하는 사람들이 100미터 가까이 늘어서 있습니다.
[손님 : 도쿄에서 가장 맛있는 집이니까요.]
몇 시간을 기다려야 겨우 라면 한 그릇을 먹을 수 있습니다.
[손님 : 6시간 기다렸어요. 기다린 보람이 있을 만큼 맛있었어요.]
그런데 이 가게가 최근 문을 닫았습니다.
이유는 다름 아닌 기다리는 손님들의 긴 줄 때문입니다.
줄 서기가 좁은 골목길 차 통행에 방해가 되고, 여러 가지로 불편하다는 이웃 주민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웃주민 : 항상 차가 다니는 길인데, 줄이 방해가 됩니다.]
가게 문 여는 시간을 앞당기고 배달도 하는 등 자구책을 내놨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경찰 : 신고전화가 10분에 한번씩 와요. 주민들이 번갈아 전화해서 불평을 합니다.]
결국, 장사를 접고 다른 곳을 물색하게 됐습니다.
[라면집 종업원 : 좁은 곳에서 해서, 이웃에 폐를 끼치기만 해서요.]
이 라면집의 폐점은 맛이 있으면 오래 기다려도 좋다는 일본의 독특한 줄 서기 문화와, 이웃에게 절대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일본인 특유의 사회적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2010년 09월 18일 (토) 21:12 SBS
2010년 방위백서 발표
일본 방위성이 2010년판 방위백서에서도 "독도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표현을 그대로 유지했다. 한국 정부는 이에 논평을 내어 항의의 뜻을
밝혔다.
일본 방위성은 10일 내각회의 의결을 거쳐 발표한 방위백서 제1부 '우리나라(일본)를 둘러싼 안전보장환경' 편에서 "일본 고유의 영토인 북방영토 및 다케시마의 영토
문제가 여전히 미해결인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방위성은 자민당 집권기인 2005년 방위백서에서 처음으로 독도를 '일본의 고유영토'라고 표현했으며, 6년째 큰 변화없이 같은 표현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올해
방위백서에 이런 표현이 담긴 것은 정권이 자민당에서 민주당으로 바뀌었어도, 영토문제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의 태도에 변함이 없음을 보여준 것으로 해석된다.
앞서 문부과학성은 지난해 12월 고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서 독도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담은) 중학교 학습에 입각한 교육'을
하라고 밝혀, 고교생들에게 독도 영유권 교육을 하도록 지시했다. 또 지난 3월엔 초등학교 교과서 검정결과를 내놓으면서 5종의 사회 교과서에 표시된 지도에 독도를 자국 영토로 표현하도록 했다.
외교통상부는 이날 '당국자 논평'을 내어 "한·일 양국관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서 깊은 유감을 표하며, 이를 즉각 철회할 것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외교부는
이어 "정부는 독도가 역사적·지리적·국제법적으로 명백한 우리 고유의 영토임을 재차 분명히 하며, 우리의 독도 영유권을 훼손하려는 어떠한 부당한 기도에도 단호히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는 이날 오후 외교부 일본과장이 주한일본대사관의 정무참사를 외교부로 불러 항의했고, 국방부도 주한일본대사관 무관을 초치해 항의했다. 정부의 이런 대응은 예년과
같은 수준이다.
한편 일본 방위성은 이번 백서에 '한국 초계함(천안함) 침몰사건을 둘러싼 우리나라(일본)의 노력'이란 제목의 별도 해설을 실어 "한국 초계함에 대한 북한의 공격은
지역·국제의 평화와 안정을 해치는 허용할 수 없는 행위라고 보고, 국제사회에 적극 호소했다"고 기술했다.
방위성 관계자는 지난달 30일로 예정됐던 방위백서 발표를 늦춘 이유에 대해서도 "천안함 침몰사건을 둘러싼 일본의 적극적인 노력을 담을 필요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2010년 09월 10일 (금) 21:40 한겨레
가난한 일본인이라는 자조 섞인 말이 빈말이 아니었다.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을 거치며 싱가포르 홍콩 대만 등에도 1인당 소득(구매력 기준 1인당 GDP 기준)이 추월당한 것으로 나타나 삶의 질 측면에서는 더 이상 아시아 최고 선진국이라고 말하기 어렵게 됐다. 한국 역시 일본과 소득 격차가 4127달러에 불과할 정도로 바짝 근접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올해 말 일본의 구매력평가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3만3478달러, 한국은 2만9351달러를 기록해 통계가 산출되기 시작한 1980년대 초 이래 가장 근접한
수준까지 좁혀질 것으로 전망됐다.
구매력평가(PPP) 기준 GDP란 국내총생산을 인구로 나눈 1인당 명목 GDP와는 달리 물가와 환율이 동등하다고 가정한 채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실질적인 국민의
생활 수준을 반영하는 통계지표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6일 IMF의 이 같은 통계를 인용해 "한ㆍ일 양국의 성장률 추세로 볼 때 2018년 한국이 구매력평가 기준 1인당 GDP에서
일본을 사상 처음으로 추월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도했다.
이에 앞서 일본은 1990년대 중반 싱가포르에 1인당 GDP가 추월당한 데 이어 2000년대 들어서는 홍콩과 대만에도 잇달아 추월을 허용하며 아시아 국민의 생활
수준에도 지각변동이 초래된 것으로 파악됐다. 올해 구매력평가 기준 GDP도 싱가포르(5만2840달러), 홍콩(4만4840달러), 대만(3만3831달러) 등이 모두 일본을 상회한 것으로 추산됐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IMF의 GDP 통계를 인용해 "최근 10년간 아시아 국가들이 약진하고 있는 데 비해 유독 일본만 정체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한ㆍ일 양국도 2000년 초 구매력평가 기준 GDP 격차는 1만달러를 상회했지만 불과 10년 사이에 격차가 절반 이하로 대폭 줄어든 것으로 조사됐다.
한편 중국은 구매력평가 기준 GDP가 올해 현재 7240달러로 세계 96위, 명목 기준 1인당 GDP는 3999달러로 97위다. 중국은 전체 GDP에서 올해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로 부상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국민 개개인의 삶의 질은 아직 선진국 수준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지표다.
다만 중국은 2000년 구매력 기준 1인당 GDP가 2300달러에서 10년 만에 무려 3배 이상 늘어나며 가장 빠르게 성장 중인 국가로 확인됐다. GDP 통계는
명목가치와 구매력평가 기준 등 두 가지 방식으로 산출되는데 이 가운데 구매력평가 기준은 한 나라의 총생산을 실질적으로 구매할 수 있는 가치로 환산한 수치를 뜻한다.
■ < 용어설명 >
구매력평가(PPP) 기준 GDP = 각국의 물가상승률 차이, 환율 영향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구매력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을 산출한 통계. 명목 기준 GDP가 각국의
경제력 규모를 반영하는 데 비해 구매력평가 기준 GDP는 국민 개개인의 삶의 질을 반영하는 지표로 자주 활용된다.
2010년 09월 06일 (월) 17:05 매일경제
日 공립 초중학교 18% 고래고기 급식
일본 공립 초.중학교의 18%가 고래고기 요리를 급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5일 교도통신에 따르면 전국 공립 초.중학교를 대상으로 자체 조사한 결과 18%인 5천355개 학교가 작년에 한 차례 이상 고래고기를 학생들에게
급식했다.
일본에서 학생들에 대한 고래고기 급식은 1987년 남극해에서의 상업 포경(고래잡이)이 금지된 이후 격감했으나 지난 2005년께부터 증가하고
있다.
학교에서 급식하는 고래고기는 일본 고래연구소가 조사포경 명목으로 남극해에서 잡은 밍크고래 등으로, 시중가격은 ㎏당 2천60엔이지만 학교에는 3분의 1 가격에 공급하고
있다.
와카야마(和歌山)현과 나가사키(長崎)현 등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일본의 고유 음식문화를 학생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고래고기를 급식하고 있다고
밝혔다.
일본은 조사포경으로 잡은 고래의 3∼4%인 연간 약 150t을 학교에 급식하고 있다.
이에 대해 환경보호단체는 "조사포경으로 잡은 고래고기 재고가 1년분 정도 쌓여 있을 정도로 수요가 없는데도 고래잡이를 계속하고 있다"면서 "일반 판매가 되지 않자
학교의 급식수요가 있는 것처럼 처리하고 있어 국제문제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도쿄연합뉴스) 김종현 특파원 kimjh@yna.co.kr 2010-09-05 14:43
(도쿄=연합뉴스) 이충원 특파원 = 일본이 10일 '독도는 일본땅'이라는 주장을 담은 2010년판 방위백서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마이니치신문이 3일 보도했다.
이 백서에는 '우리나라(일본) 고유의 영토인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식 명칭)'라는 기술을 바꾸지 않은 채 그대로 포함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 방위백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고유의 영토인 북방영토와 다케시마의 영토 문제가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문장을 집어넣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은 앞서 7월30일 방위백서를 발표하려다 8월10일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의 한국강제병합 사죄 담화 발표와 강제병합 100년인 8월29일을 앞두고 한국과 외교 마찰을 우려해 발표를 미뤘다.
당시 공식적으로는 천안함 사건 등 일본의 안전보장에 관한 최신 사안을 포함하기 위해 발간을 미뤘다고 설명했다.
센고쿠 요시토(仙谷由人) 관방장관은 7월 말 기자회견에서 독도영유권에 대한 질문을 받고 "우리 국가의 입장은 일관돼 있다. 아무런 입장 변화가 없다"며 방위백서
발표를 미뤄도 표현은 바꾸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사실상 예고했다.
일본은 1904년 2월에는 한일의정서, 같은 해 8월에는 한일협정서 체결을 강요해 대한제국의 손발을 묶은 뒤 1905년 1월 내각회의에서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부르고, 시마네(島根)현 오키도 소관으로 한다'고 결정했다. 이후 이를 근거로 독도영유권 주장을 해왔고, 2005년부터는 방위백서에 이 같은 주장을 포함했다.
2010년 09월 03일 (금) 07:52 연합뉴스
[서울신문] 일이 벌어진 것은 1995년 어느 여름날. 일본 주오대(中央大) 강당에서 열린 을사늑약 90주년 학술대회장이었다. 연단에 자리한 수십명의 한·일 양국
학자들과 강당을 가득 메운 수백명의 일본인들은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일본 통감부 직원 마에마 교사쿠가 남긴 글에서 따와 합자한 '척(坧)'자가 제시됐다. 조금 뒤 순종 황제가 일본과의 외교문서에 서명한 '척(坧)'자를 겹쳐 보였다. 딱 맞아떨어졌다.
대한제국 문서에 있는 순종 황제의 날인 서명이 실은 일본인 통감부 직원의 날조였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강당은 '아~' 하는 낮고도 무거운 탄식으로
가득 찼다. 학술대회 뒷자리를 떠나는 학자와 청중은 물론 신문·방송 기자들까지 훌륭한 연구성과라며 악수를 청해 왔다. 건네받은 명함만 수백장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어느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이 얘기를 찾아 볼 수 없었다.
경술국치 100년(29일)을 맞아 27일 서울 의주로 동북아역사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당시 기억을 이렇게 더듬었다. 이때의 주장은 차츰차츰 불어나 15년 만인 2010년
한·일병합 조약은 원천무효라는 '한·일 지식인 공동선언'을 끌어내기에 이르렀다.
→어떻게 마에마 교사쿠의 필체라고 확신했습니까.
-말하자면 '표적 수사'였어요(웃음). 근거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마에마가 쓰시마 출신으로 한국어에 능통했다는 겁니다. 또 하나는 그가 일본의 한국사 연구
1세대라는 점이었습니다. 마침 제가 학부 시절에 마에마가 남긴 서얼 제도나 훈민정음 연구논문을 많이 봤어요. 때문에 순종 황제의 위조된 친필 서명을 봤을 때 마에마 글씨 같다는 감이 확 오더라고요. 그래서 넌지시 마에마 유품을 볼 수 있는 곳이 어디냐고 일본인들에게 수소문해 보니 규슈대학에 있다는 거예요. 바로 날아가서 척(坧)자를 합자해
만들어본 뒤 비교했지요. 그 뒤 수사결과를 발표한 겁니다.
→일본 반응에 변화가 있었나요.
-주오대 때 반응이 워낙 열광적이었는데 다음날 언론보도가 하나도 없어서 이게 뭔가 했습니다. 나중에 들어 보니 우익 테러 같은 걸 두려워하고 있더군요. 그런데 요즘에
많이 바뀌었습니다. 지난해 10월 시민단체 초청으로 교토에 가서 설명했더니 모두들 "어떻게 이렇게 억지 조약을 맺을 수 있나. 부끄럽다."고 하더군요
→그런 변화의 기미가 언제 감지됐나요.
-2000년대 들어 8년 동안 을사늑약 원천무효 주장을 펼쳤습니다. 관련해서 국제학술대회를 열고 그 결과를 2008년 '한국병합과 현대'라는 책으로 일본에 내놨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지난해 나왔고요. 일본어판이 나오면서부터 일본 학자들 사이에 "이제 우리도 양심적으로 뭔가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목소리들이 나왔다고들 합니다. 학문적 사실만큼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본 학계의 높은 수준을 볼 수 있었습니다.
→변화 원인이 어디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탈아론(脫亞論)에 대한 반성이지요. 일본은 뭔가 특별한 존재니까 아시아를 벗어났고, 미개한 한국과 중국은 우리가 이끌어 줘야 한다는 게 탈아론입니다. 그런데 최근
한국과 중국이 눈부시게 성장하면서 일본만 특별히 우월하다는 얘기를 하기 어렵게 된 것이지요. 결국 예전 탈아론은 침략주의에 불과하지 않았느냐는 반성이 나오게 된 겁니다. 이 같은 반성은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서 특히 광범위하게 공감대를 얻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논쟁을 하다 보면 지식인들이 더 답답해서 뭔가 큰 정치적 계기가 없으면 일본의
변화가 힘든 게 아닌가 싶기도 했는데 지금은 양심적 지식인들이 더 앞장서 주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연구가 고종 황제를 지나치게 미화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고종이 결국은 전제군주 아니었냐는 것이지요.
-그건 지금이 민주주의 시대다 보니 군주정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가령 민중사학적 시각에서는 고종의 근대화
계획보다는 동학혁명이 더 중요합니다. 동학혁명이 있었는데 고종 황제가 탄압했다, 그러니 전제군주는 나쁜 것 아니냐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주장은 머릿속으로 생각한 틀을 가지고 있을 뿐 구체적 사료를 세심히
보지 않았기에 나오는 겁니다. 당시 동학의 주장을 보면 고종을 비난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고종 역시 일본이 동학혁명을 핑계 삼아 개혁을 하라고 강요하자 농민군과 충분히 협상할 수 있으니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고 반박합니다. 이런 구체적인 사료를 들여다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나도 한때 고종이 무능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료를
보면서 인식이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일제가 자신의 강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채색했던 논리가 너무 상식처럼 퍼져 있다는 말이지요.
→탈민족론은 어떻게 보십니까. 그들 입장에서는 선생님의 연구가 결국 '강도' 일본과 '피해자' 조선이라는 이분법을 더 강화하는 것처럼 보일 텐데요. 얼마 전 내놓은
선생님 논문도 일본 정한론(征韓論)의 기원을 조슈(長州) 지역 파벌, 그러니까 결국 임진왜란 주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내용인데요.
-메이지유신을 추진한 조슈 세력은 한마디로 천황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해서는 천황에게 조공을 바치는 국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조선이라는 논리입니다. 정한론이지요. 사실 일본이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들인 엄청난 노력과 어쨌든 그걸 성공적으로 이뤄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그러나 정한론과 친근할 수밖에 없는 메이지유신의 근본적인 한계도 지적해 줘야 합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굳이 남들을 침략할 필요까지 있느냐는 소일본주의가 나옴에도 이걸 무시해 버립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피해자라서 더 정확하게 지적해 줄 수 있는
겁니다.
→고종 시대사 연구가 얼마나 더 진행될 수 있을까요.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1995년 '무라야마 담화' 이후 (한국 강제병합에 관한) 사료 공개 작업을 추진 중인데 국립공문서보관소의 목록상태가 아주
나빠요. (일본에) 장기체류하면서 눌러앉아 뒤져보지 않으면 뭐가 들었는지 잘 모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좀 더 정리가 되면 차근차근 둘러볼 여유가 더 많을 거예요. 요즘 들어 자료가 많이 올라오고 있으니 고종 시대사는 앞으로 분명 크게 바뀔 겁니다.
→고종이 독살됐다고 보는 소신에도 변화가 없으신 거지요.
-물론입니다. 얼마 전 (독살설 근거) 자료를 공개하지 않았습니까. 1905년의 을사늑약 유효성을 인정하라는 일본의 요구를 고종이 거부하자 독살한
겁니다.
→간도 협약에 대해서도 기대와 우려가 교차합니다(일본이 간도를 청나라에 넘긴 간도협약은 1909년 체결됐다. 이 협약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대한제국 외교권을 일본에 넘긴 을사늑약 때문이다.
따라서 을사늑약이 원천무효라면 간도협약도 원천무효가 된다. 때문에 한쪽에서는 이번 기회에 간도까지 되찾자고 하는 반면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느냐는 우려도 나온다).
-논리적으로는 무효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 책임을 묻는 것도 힘겨운 싸움인데 중국과 또 싸울 수 있을까요. 힘을 분산하지 않았으면 해요. 조선과 중국은
간도협약 이전부터 영토 문제를 두고 갈등을 빚었습니다. 그래서 맺은 게 1899년 한·청조약인데 이때 간도 문제를 빼버립니다. 고종은 중국과의 조공관계에서 벗어나는 것, 그래서 중국과 협상을 통해 대등하게 조약을 체결하는 것 자체를 독립국에 대한 하나의 징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간도 문제를 비워 두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그런 원칙이
원용될 수 있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다른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일본 일각에서는 한국도 베트남전에 대해 털어낼 것은 털어내라고 요구합니다.
-그쪽 연구자가 아니라 뭐라 말하기 어렵습니다만, 자세히 들여다보고 문제가 있다면 그렇게 해야지요. 다만, 일제의 한국 병합과 같은 수준의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체였느냐, 어느 정도 피해를 끼쳤느냐는 문제도 있고요. 그런데 그런 주장은 일본 쪽에서 자신의 책임을 부정하기 위해 내놓는 성격이 짙습니다. 그런 부분은 조심해야겠지요.
2010년 08월 29일 (일) 16:56 서울신문
<한국일보>
日 아키타현, 드라마 '아이리스'에 감사장
<<한국일보 특집>>
"식민지배는 분단 부른 현재적 사건… 韓日, 역지사지 태도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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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노 나오키 교수 ▦1950년 교토 출생 ▦1981년 교토대 박사(현대사) ▦2001년~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 교수(조선근현대사, 동아시아관계사) ▦2009년~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장 ▦2010년 '한국병합 100년에 즈음한 한일 지식인 공동선언' 서명 ▦저서 <천황제와 조선>(1989) <'아리랑의 노래'각서> <생활 속의 식민지주의>(2004ㆍ이상 공저) <창씨개명>(2008) 번역서 <한국민족운동사론>(강만길 저ㆍ1985) 정재정 이사장 ▦1951년 충남 당진 출생 ▦1974년 서울대 역사교육학과 졸업 ▦1982년 도쿄대 석사(한국사학) ▦1992년 서울대 국사학과 박사 ▦1994년~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2003~2005년 제1기 한일역사공동위원회 위원 ▦2006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2009년~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저서 <일제침략과 한국철도>(1999) <역사 교과서 속의 한국과 일본>(2000) <교토에서 본 한일통사>(2007) 번역서 <식민통치의 허상과 실상>(2002) <한국병합사연구>(2008) 등 |
(도쿄=연합뉴스) 김종현 특파원 =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일본 외상이 조선총독부가 반출한 도서 외의 문화재 반환 요구에는 응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아사히신문이 25일
보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오카다 외상은 24일 민주당 정책조사회의 외교부문 회의에 출석해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가 한일병합 100년 담화에서 밝힌 조선왕실의궤 등의 '인도'와 관련 "이 것으로 매듭을 짓고
싶다"고 말했다.
이 신문은 "오카다 외상의 발언은 한국에 돌려줄 문화재를 조선총독부를 통해 입수한 문화재에 한정하고 그 외의 문화재
반환요구에는 응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표명한 것이다"고 해석했다.
신문은 이어 "일본 정부가 구체적인 인도 대상 문화재를 밝히지 않고 있으나 한국 측은 조선왕실의궤 외에 제실도서, 경연
등의 인도도 기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신문은 또 "한국 측은 조선총독부 시대 이전의 문화재에 대해서도 반환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지만 오카다 외상은 '다른
문화재에 대해서는 이미 결착이 끝났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서울=연합뉴스) 안용수 기자 = 이명박 대통령은 23일 무토 마사토시(武藤正敏) 주한 일본대사 등 8명의 신임 대사로부터 신임장을 제정받고 환담했다.
이 대통령은 무토 대사에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가 어려운 시기에 한일 관계와 관련한 담화를 발표해 주신 것을 평가한다"면서 "동북아시아에서 한국과 일본은 힘을 합쳐야 하며, 양국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고 홍상표 청와대 홍보수석이 전했다.
이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부닥치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현 민주당 정권이 전향적으로 하고 있는데 대해 기대가 크다"면서 "뛰어넘을 것은 뛰어넘어야 양국관계가 발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 대통령은 "FTA(자유무역협정)도 양국이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는 문제"라면서 "특히 경제는 글로벌 차원으로 협력해서 함께 발전해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무토 대사는 "한일간 협력의 여지가 크고 경제적으로 볼 때도 FTA 등 앞으로 공동으로 협력해 나갈 분야가 적지 않다"면서 "한일 관계는 앞으로도 떼려야 뗄 수 없는
협력 관계로 갈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
이날 신임장 제정식에는 당초 온두라스 대사로 내정됐던 강영신씨의 사위인 미첼 이디아께스 바라닷 대사도 참석했다.
2010년 08월 23일 (월) 18:35 연합뉴스
"日정부, '합병 유효' 공식언급 자제키로"
(도쿄=연합뉴스) 김종현 특파원 = 일본의 일부 언론은 22일로 한일 강제병합 체결 100년을 맞았으나 한국에서의 반일 감정은 과거처럼 높지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도쿄신문은 이 날짜 서울발 기사에서 "한국 언론은 연초부터 병합 100년을 기념하는 특집기사와 프로그램을 내보냈으나 경제가 호조를 보이는데다 11월 서울에서 G20 정상회의를 여는
등 자신감이 커지면서 과거와 같은 반일 감정의 고조는 보이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이 신문은 "간
나오토 총리가 병합100년 담화에서 식민지지배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함께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한데 대해이명박 대통령이 '일본의 진일보한 노력으로 평가한다'며 환영했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신문은 이어 "한국의 학자와 시민단체는 총리담화에서 한일합병조약의 무효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의 보상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고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면서 "다음달 독도를 일본땅으로
기술한 방위백서가 나올 경우 일한 관계가 악화될 우려가 있다"고 내다봤다.
우익지인 산케이신문도 "한일병합 100년을 맞아 한국에서는 병합조약의 무효와 사죄.보상을 요구하는 주장이 무성하지만 총리의 사죄담화 이후 (반일)여론이 진정되고 있다"면서
"최근의 양호한 일한관계를 반영하고 있음인지 반일 분위기가 고조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고 전했다.
신문은 "한국측은 병합조약이 강제된 만큼 무효라고 주장하는 반면 일본은 병합조약이 유효하기 때문에 식민지지배도 합법적이고 정당하다는 입장이어서 상호 견해차가 크지만 간 총리의
담화를 전면 부정하는 목소리는 적다"면서 향후 한일관계에 대해 전향적으로 전망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편 교도통신은 일본 정부가 한일 강제병합과 관련 '당시의 국제법에 비춰 유효했다'는 기존의 정부 공식 견해를 언급하지 않고 '봉인'하기로 입장을 정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한일병합이 강제였으므로 무효'라고 반발하는 한국측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통신은 전했다.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일본 외상은 지난 20일 기자회견에서 한일병합의 합법성 여부에 대한 정부 견해를 묻는 질문에 "1965년 체결된 한일기본조약에 '이미 무효'라는 표현이 있다"는 점을 언급한 뒤 "여기에 뭔가를 덧붙일 것이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면서 직접적인 답변을
피했다.
일본 정부는 한일기본조약 2조의 '1910년 8월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는 부분의 '이미 무효'를
'원래는 유효하게 체결됐지만 한국의 독립으로 무효가 됐다'고 풀이하는 반면 한국은 '체결 당시부터 원천 무효'라고 해석하고 있다.
2010년 08월 22일 (일) 10:54 연합뉴스
독도.군대위안부.문화재반환.유골봉환 등
"식민지지배 인식차서 비롯..日정부 태도 관건"
(서울=연합뉴스) 유현민 기자 = 한일강제병합 100년의 뼈아픈 의미를 상기하고 바람직한 미래를 지향하자는 결의는 현해탄을 사이에 둔 한.일 양국에서 쏟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피할
수 없는 공허함이 느껴진다.
한반도를 강제로 병탄했던 과거에 대해 진정한 반성을 하지 않고 있는 일본, 그런 이웃나라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한국 사이에는 인식의 괴리가 자리잡고 있는 게 냉엄한
현실이다.
이를 좁히기 위해 2002년 이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2차례에 걸쳐 활동하는 등 양국이 다양한 노력을 전개했지만 손에 잡히는 성과를 도출하지 못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이는 특히 일본 제국주의 강점기에 대한 양국 정부의 '상반된 시각'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50주년인 1995년 8월15일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당시 일본 총리가 발표한 '무라야마 담화'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입장을 파악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 특이 아시아 여러 나라의 여러분에게 큰 손해와 고통을 줬다'거나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다'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한 무라야먀 담화는 당시 일본 정부가 과거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대해 표명한 가장 진일보한 내용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 담화에서 드러난 일본 정부의 한국 강제병합에 대한 인식은 '식민지 지배가 초래한 결과에 대해서는 사과하고 반성하지만, 병합 자체에 대해서는
불법성과 강제성을 분명하게 인정하지 않고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간 나오토(菅直人) 일본 총리가 지난 10일 식민지 지배의 강제성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담화를 발표하기는 했지만 이는 식민지 지배 자체의 강제성을 인정했을 뿐
병합과정의 강제성을 인정한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병합 과정과 자체의 불법성과 강제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의 한국 병합은 아직 합법적인 조치로 남게되는 셈이다.
이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 등에 대한 해석 차이로 연결되고, 다시 독도영유권과 문화재 반환, 군대위안부, 원폭피해자, 사할린 한인, 강제동원 피해자, 유골
봉환 등의 현안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1910년 8월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는 한일기본조약 2조가 대표적
예다.
한국은 '이미 무효'라는 부분을 '체결 당시부터 원천 무효'라고 해석하는 반면, 일본은 '원래는 유효하게 체결됐지만 한국의 독립으로 무효가 됐다'고
풀이한다. 이 해석의 차이가 독도 영유권 문제로까지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군대위안부, 사할린 한인, 원폭피해자,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 등의 배경에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대한 해석 차이가 자리잡고
있다.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차관 3억달러'를 한국에 제공하기로 하면서 '(협정) 체약국 및 국민의 청구권에 관하여는 어떤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는 문구를 근거로 일본 정부는 개인 청구권까지 소멸했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반인도적 범죄 피해자인 군대위안부와 한일협정 체결 이후에 문제가 불거진 사할린 한인과 원폭피해자의 경우 개인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강제동원 피해자 역시 연금탈퇴수당과 미지급 임금(공탁금), 후생연금 등의 보상 문제를 놓고 다시 현안으로 부상하는 분위기다.
다만, 사할린 한인과 원폭피해자 문제는 그동안 한.일 양국 정부가 추진한 영주귀국사업과 모국방문사업, 일본의 40억엔 지원 등 양국 정부의 노력으로 해결의
가닥을 잡았다는 게 정부 당국자들의 설명이다.
양국 정부가 1970년대 초부터 시행 중인 유골봉환 사업도 일본 측의 관리 소홀 등의 잡음을 야기하면서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간 총리도 올해 담화에서 "재(在)사할린 한국인 지원, 한반도 출신자의 유골 반환 지원이라는 인도적 협력을 성실히 실시하겠다"며 이 부문에 대한 협력 의지를
드러냈다.
그러나 일본 각지의 사찰 등에 보관돼 있는 민간인 강제동원자 유골까지 포함하면 언제 유골 반환 사업이 언제나 마무리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간 총리가 올해 담화에서 명시적으로 반환 의사를 밝힌 조선왕실의궤를 비롯한 한반도 유래 도서 등 문화재 반환 문제도 이제야 해결의 첫 걸음마를 뗀 수준이라는
게 외교가의 대체적인 평가다.
여기에 재일한국인에게 지방참정권을 부여하는 문제와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 등 한.일 양국이 풀어야 할 현안은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게 정부 당국자들과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문제는 이런 현안 대부분이 한번에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부 당국자는 17일 "한.일 양국간 현안의 대부분은 천천히 시간을 두고 해결해 나아갈 과제들"이라며 "양국 정부는 새로운 한일관계의 100년을 위해 이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 나간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결국 양국이 직면하고 있는 과제를 말끔하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제 강점기에 대한 일본 정부의 인식이 바로잡혀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일본 정부가 스스로 한국 병합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가 원천 무효임을 받아들일 때 궁극적으로 양국 간 남은 과제들이 풀릴 수 있다는
얘기다.
외교 소식통은 "과거사 문제를 비롯한 양국간 현안 대부분은 일본 정부가 한국 병합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며 "궁극적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일본 정부가 얼마나 전향적이고 실천적인 태도를 보이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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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7
새로운 '우호협력 100년' 향한 출발선
총리담화 후 日사회 실천 주목.."제2 국교정상화 실현해야"
(서울=연합뉴스) 노효동 기자 = 오는 22일로 다가온 `한일강제병합 100년'은 지나온 한 세기의 역사를 매듭짓고 새로운 100년의 주춧돌을 놓는 역사적 이정표로서의 상징성이
있다.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과 일제강점기의 수탈, 2차 세계대전 종전에 이은 해방, 1965년 국교정상화 이후 협력과 갈등으로 점철돼온 역사의 굴곡을 딛고 한일
양국이 진정한 화해와 우호.협력의 새로운 페이지를 열어가는 출발선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는 단순히 시의(時宜)적 상징성만을 뜻하지 않는다. 거대한 변화의 물줄기를 타고 있는 국제질서 속에서 한.일관계는 점차 양자적 대립구도에서 벗어나 다자적
협력구도로의 질적인 전환을 요구받고 있는 시점이다.
역사의 큰 굽이를 돌아선 한.일 양국이 이제 '과거' 대신 '미래'를 키워드로 근본적인 관계 재정립을 모색하는 중대한 전환점에 올라선
셈이다.
돌이켜보면 한.일관계의 지난 100년은 두개의 대조적인 '그림'으로 다가서고 있다. 강제병합의 짙은 그늘이 지배하고 있는 반목의 역사와 국교정상화를 계기로
움트기 시작한 협력의 역사가 그것이다.
1910년 8월22일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이완용의 강제합병조약 조인으로 시작된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화는 우리 민족과 국가발전사에 씻을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가져다준 비극의 시기였다. 그래서 `경술국치(庚戌國恥)'라는 용어가 '강제병합'과 함께 따라붙는다.
이 시기 일제가 안겨준 민족적 상처는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한국의 독립 이후로도 계속 이어지며 한.일관계의 '암흑기'를 형성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1965년 국교 정상화 때까지 양국정부 차원의 교류는 거의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1965년 6월22일 도쿄에서 양국이 조인한 국교정상화 조약은 한.일관계에 의미있는 전기를 가져왔다. 당시 경제개발을 위한 외화가 절실했던
상황에서 일본으로부터 받은 3억 달러의 '경제협력자금'(청구권 자금)이 나라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 종자돈이 된 점을 부정하기 힘들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당시 양국간 협정을 통해 개인피해 청구권이 법적으로 소멸되는 효과를 낳아 경제적 실리에 급급한 나머지 역사부채 청산의 기회를 희생시켰다는 비판도
엄존한다.
특히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보상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배상을 큰 숙제로 남기면서 한.일 과거사 갈등의 씨앗이 됐다. 결국 국교정상화는 '미완의 정상화'에
그친 셈이다.
이런 탓에 국교정상화 이후의 한.일관계는 큰 틀에서 협력의 길로 나아가면서도 갈등요인들이 끊임없이 내연(內燃)하는 비정상적인 관계가 됐다. '가깝고도 먼
이웃'이라는 모순된 조어가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양국의 '경제관계'는 비약적 성장을 거듭했다. 1965년 연간 1만여명에 불과하던 사람들의 왕래가 작년 기준으로 연간 464만명이 넘어섰다. 양국간
교역액은 연간 2억 달러에서 작년 712억 달러로 늘어났다. 이는 중국, 미국에 이어 세번째 규모다.
이는 사회.문화 교류에도 활기를 불어넣었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과 한류로 양국간 쌍방향 문화교류가 활발해진 가운데 2002년 월드컵 공동 개최는 양국
국민들의 상호 인식과 호감도를 획기적으로 높이는 모멘텀이 됐다.
그러나 미완의 과거사 문제는 한.일관계의 성숙을 근본적으로 제약하는 '질곡'으로 작용해왔다. 독도문제와 맞물려 잘못된 과거를 미화하고 우리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 일본 일부 정치인들의 망언이 때만 되면 망령처럼 살아나 국민들의 반일감정을 자극했다.
물론 일본이 과거사 문제를 전향적으로 풀어보려는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다.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 총리가 종전 50주년을 맞아 식민지배와 침략을
시인한 '무라야마 담화'가 대표적이다. 그 연장선에서 19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합의한 '신 한.일 파트너십 선언'이 나왔다.
하지만 이는 '진정성'이 담보되지 않은 '선언'에 그쳤다. 일본측의 과거사 도발은 그 후로도 계속됐고 한.일관계는 지금껏 냉탕과 온탕을 오가고 있는게
현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간 나오토(菅直人) 정부 총리가 10일 강제병합 100년 담화를 통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재차 표명한 것은 상당한
의의를 갖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과거사 문제를 '매듭'짓고 새로운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열어나가겠다는 전향적 역사인식과 자세를 진지하게 드러낸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사할린 동포지원, 징용피해자 유골 반환, 조선왕실의궤 반환 등 '말'뿐이 아니라 '행동'으로 반성의 뜻을 표하려는 태도는 일본의 과거사 입장이
'진일보'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게 외교가의 시각이다.
그러나 일본이 진정으로 한.일관계를 미래지향적 모델로 만들어나가려면 일회적 행사로 그칠게 아니라 지속적이고 성실하게 과거사 후속작업을 매듭짓는게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과거사 갈등의 불씨로 남은 징용피해자 보상과 위안부 배상문제에 대해 보다 과감한 문제해결의 자세를 보이고 독도문제에 대해서도 터무니없는 '도발'을 자제하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양국관계를 '가깝고도 가까운 이웃'으로 만드는 과제는 일본만의 몫이 아니다. 우리도 일본을 감정적으로 몰아세우기 보다는 이성적으로 '어른스럽게' 대응하면서
과거사 바로세우기의 '대의'와 우호협력 확대의 '실리'를 확보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미래'를 향한 양국의 공동노력이 순조롭게 이어진다면 이번 강제병합 100년이 과거사의 어두운 터널에서 벗어나 진정한 동반과 협력의 선순환 구조가 형성되는
'제2 국교정상화'를 이루는 획기적 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양국이 지금 '과거'에 매달려 서로 에너지와 역량을 소모하기에는 함께 부딪히며 풀어가야할 '미래'의 도전이 너무 크다는게 외교가의 공통된 시각이다. 소모적인
양자적 대립관계에서 탈피해 한반도와 동북아, 글로벌 이슈에 공동대응하는 다자적 대등관계가 양국이 꿈꾸는 미래 공동비전의 핵심이다.
2010-08-17
한일강제병합 부당 (서울=연합뉴스) 백승렬 기자 = 강제병합100년 공동행동 한국실행위원회 대표들이 12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강제병합 100년 한일시민대회 기자회견을 통해 강제병합의 부당성을 강조하고 있다. 2010.8.12 srbaek@yna.co.kr |
중국이 경제규모를 나타내는 핵심지표인 국내총생산(GDP)에서 처음으로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에 올랐다. 일본은 42년 만에 3위로 밀려났다.
16일 외신에 따르면, 물가변동을 반영하지 않은 명목 GDP에서 중국은 올해 2분기(4~6월)에 1조3,369억 달러를 기록, 일본(1조2,883억 달러)을 제쳤다. 일본은 1968년 국민총생산(GNP)에서 독일을 제치고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부상했으나, 이번에 중국에 자리를 내주었다. 일본 내각부도 이날 2분기에 중국에 추월 당한 사실을 인정했다. 다만, 쓰무라 게이스케(津村啓介) 내각부 정무관은 "명목 GDP만으로 비교하는 것은 오해 소지가 있다"며 중국이 발표를 꺼리는 물가변동을 반영한 실질 GDP로 따질 경우, 결과가 다를 수 있음을 시사했다. 상반기(1∼6월) 전체로는 일본의 GDP가 2조5,871억 달러로 중국(2억5,325억 달러)을 조금 앞섰다. 지난달 30일 중국 인민은행의 상반기 일본 추월 예상은 빗나갔지만, 중국경제의 일본 따돌리기는 앞으로 계속될 전망이다. 더구나 중국은 10%가 넘는 성장세를 지속하고 있어 연간 기준으로도 올해 처음 일본을 앞설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일본은 2분기 실질 GDP성장률이 연율기준으로 시장 전망치(1.5~3.4%)에 훨씬 못 미치는 0.4%를 기록하는 등 경제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중국이 2030년 초반에는 미국마저 제치고 세계 1위 경제대국에 오를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불과 5년 전 중국의 연간 GDP가 일본의 절반 수준인 2조3,000억달러에 불과했던 점에 비춰보면 그 시가가 당겨질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지난해 미국의 GDP는 중국의 3배에 달하는 14조달러대를 기록했다.
2010-08-17
日 호소카와 前총리 "한일병합 강제된 것"
"천황 조속한 한국 방문 바람직" "재일 한국인에 지방참정권 부여해야" (도쿄=연합뉴스) 김종현 특파원 = 일본의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72) 전 총리가 한일병합은 일본의 무력에 의해 강제된 것이라며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가 담화에서 병합의 강제성을 인정하지않은데 대해 아쉬움을 나타냈다. 호소카와 전 총리는 14일 보도된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간 총리의 한일병합 100주년 담화에 대해 "큰 획을 그은 담화"라고 평가하면서도 "좀 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어땠을까 생각한다"면서 "(한일병합은) 힘을 배경으로 강제된 조약이었다"고 말했다. 일본 국왕의 방한 문제와 관련해서는 "천황이 미국과 유럽, 중국, 동남아시아 등을 방문했으면서도 한국만 방문하지않은 것은 순서가 잘못됐다"고 지적하고 "경비에 대한 걱정 등이 있겠지만 조속히 방한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호소카와 전 총리는 또 재일동포의 지방참정권 부여 문제에 대해 "피선거권까지 주는 것은 위화감이 있겠지만 납세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 선거권을을 주지않는 것은 문제가 있다"면서 "특히 (2차세계대전 이전에) 일본에 온 한국인 자손에게는 선거권을 줘야한다"고 강조했다. 호소카와 전 총리는 취임 기자회견 당시 2차 세계대전을 '침략전쟁'이라고 발언했다가 파문을 빚은 것과 관련 "상식적으로 중국과 한국, 동남아시아에 큰 고통과 희생을 유발한만큼 가슴에 손을 얹고 보면 침략이 아니었다고 할 수 없다"고 회고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를 봐도 편협한 내셔널리즘이 오히려 국가를 위기에 빠뜨렸다"면서 "진정한 내셔널리즘은 상대의 입장에서 사리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양국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이는 역사 해석이 어려운 부분이어서 서로 가능한한 감정을 억제하는 태도, 어른스러운 대응이 바람직하다"면서 "현재로서는 이 문제를 유보하는 것 외에 현실적 해결방법은 별로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호소카와 전 총리는 1993년 11월 경주를 방문,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의해 한국인이 모국어 교육 기회를 박탈당하고 이름을 일본식으로 개명당했으며 종군위안부, 징용 등 여러 형태로 괴로움과 슬픔을 당한데 대해 가해자로서 마음으로부터 반성하며 깊은 사죄를 드린다"고 밝혀 1995년 무라야마(村山) 담화의 토대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호소카와 전 총리는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에 의해 조선 침략전쟁에 참여했던 구마모토(熊本)의 영주인 호소카와가(家)의 18대 당주다. 그는 정계에서 은퇴한뒤 도예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특히 조선 찻사발(다완:茶碗)에 심취해 2년에 한차례씩 경남 산청을 방문해 직접 찻사발을 굽고 있다.
2010-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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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는 제65주년 광복절을 기념해 338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에게 훈·포장을 수여한다고 밝혔다. 이 중엔 안중근 장군의 4촌 동생인 안홍근 선생도 포함돼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게 됐다. 이로써 안 장군의 가문은 안홍근을 포함해
안명근·안춘생·최익형·안경근·안정근·안봉생·오항선·조순옥·안원생·안공근·안낙생·조성녀·안태순 등 모두 15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최고의 애국명가임을 재삼 확인시켰다.
2010-08-13
日帝 남획 독도 바다사자 멸종 선언 `눈앞' |
바다사자(자료사진) |
구로다 “‘독도는 우리땅’ 가사 모순” |
2010-08-03
일본에선 사료용 쌀이 한국에선 1등 고추장 원료?
[CBS산업부 윤지나 기자]
농림수산식품부가 최근 쌀 수급안정 대책의 일환으로 수확한 지 3년이 넘은 묵은쌀을 가축 사료로
처분하는 방안을 내놓았는데, 이 제품에 들어가는 쌀은 무려 5년 전 생산된 것이다. 농협중앙회 관계자는 "대북 지원의 길이 막힌 데 반해 풍작이 이어지면서 3년 전 쌀은
물론, 2005년산 쌀까지 창고에 쌓여있다"고 말했다.
2010년 07월 28일 (수)
06:03 노컷뉴스
[도쿄리포트]日 집안에 틀어박힌 은둔형외톨이 70만명 추정, 내각부 조사
도쿄=김범수특파원bskim@hk.co.kr
집안에 틀어 박힌 채 사회활동은 물론 타인과 접촉도 거의 하지 않는 은둔형외톨이(히키코모리)가 일본 전국에서 7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히키코모리는 이지메(집단 따돌림)처럼 일본 특유의 사회현상으로 처음 알려진 뒤 세계
각국에서 유사 사례가 확인되고 있다.
일본 내각부는 2월 실시한 ‘히키코모리 실태 조사’ 결과, 히키코모리가 일본 전국에서 약 70만 명, 향후 히키코모리가 될 가능성이 있는 친화군은 155만명으로 추정된다고 23일 밝혔다. 그 동안 시민단체나 언론의 조사는 있었지만 정부가 히키코모리 실태를 파악하기는 처음이다. 내각부는 히키모코리를 ‘정신ㆍ신체 질환이나 임신, 가사, 육아 등의 이유 이외에 6개월 이상 거의 집밖으로 나가지 않고 근처 편의점에 가거나 취미활동을 위해 외출할 뿐이라고 답한 사람’으로 정의해 15~39세 3,287명을 조사했다. 조사에서 히키코모리는 1.7%로 파악됐다. 이 수치를 일본 전체 인구로 환산할 경우 약 69만6,000명에 해당한다. 남성이 66.1%로 3분의 2를 차지했다. 연령별로는 35~39세(23.7%)가 가장 많았고 이어 30~34세(22%) 20~24세(20.3%)순이었다. 히키코모리에 대해선 흔히 등교 거부 청소년을 연상하지만 실제로는 사회생활 경험이 있는 성인이 다수다. 히키코모리가 된 이유는 ‘직장에 정을 붙일 수 없었다’ ‘몸이 아파서’가 각각 23.7%로 가장 많았다. 이어 ‘취업이 잘 되지 않았다’(20.3%) ‘등교 거부’(11.9%)순으로 직장내 불화나 취업난이 히키코모리 양산의 중요 요인으로 파악됐다.
히키코모리들은 초ㆍ중학 시절 ‘학교에서 참는 일이 많았다’(55.9%) ‘혼자서 노는 편이 재미있었다’(27.1%) ‘가족과 상담이 도움 되지 않았다’ ‘부모가 과보호였다’(각각 18.6%) 고 답했는데 이 수치는 일반인의 2배를 넘는
것이다. 청소년기 인간관계가 적잖은 영향을 끼친 것이다.
조사의 기획분석을 맡은 다카쓰카 유스케(高塚雄介) 메이세이(明星)대학 교수는 “히키코모리 친화군에는 젊은이들이 많다”며 “이들이 사회에 나가면서 친구를 읽거나 새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히키코모리는 점점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고 요미우리(讀賣)신문이 전했다.
2010-07-05
이완용, 한일병합 이후 400억 축재
병합 15년후 재산 3배로…대부분 친일 대가
2010-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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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하는 근로정신대 할머니 (광주=연합뉴스) 장덕종 기자 = 근로정신대 출신 양금덕(82) 할머니가 15일 오전 미쓰비시자동차 광주전시장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미쓰비시중공업의 협상 동의를 환영하고 있다. 미쓰비시 측은 "근로정신대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에 나서겠다"는 공문을 14일 전달했다. 2010.7.15 cbebop@yna.co.kr |
시민모임 대표 김희용 목사는 "미쓰비시 측의 결정이 잠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심이 담겨 있는 것 같다"며 일단은 미쓰비시의 진정성을 믿고 협상에 임하겠다는 입장이다.
2014-07-15
전문대 해외인턴 '빛 좋은 개살구'
2010-07-07 21:57
정치 판단으로 징용자 개인보상 필요성 시사
(도쿄=연합뉴스) 이충원 특파원 = 일본 내각 2인자이자 공식 대변인인 관방장관이 일제시대 강제징용자 등에 대한 일본 정부 차원의
보상에 의욕을 보였다.
이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징용자 등의 개인청구권까지 소멸했다는 기존 입장과 차이가 있는 것으로 향후 보상 논의가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7일 교도통신과 지지통신에 따르면 센고쿠 요시토(仙谷由人) 관방장관은 이날 도쿄 일본외국특파원협회(FCCJ) 주최 기자회견에서
한국과의 전후(戰後) 처리 문제에 대한 질문을 받고 "하나씩, 또는 전체적으로도,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고 할까, 일본의 입장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언급, 그간 일본 정부의 대응이 불충분했다는 인식을
보였다.
특히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정부 청구권과 함께 소멸했는지 논란이 인 개인청구권에 대해 "(개인청구권도 함께 소멸했다는 해석이)
법률적으로 정당성이 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좋은가, 모두 해결된 건가라는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센고쿠 관방장관은 개인청구권에 대해 "어느 정도 일한 기본조약으로 해결됐다"는 인식을 보이면서도 "'법적으로 끝났다'고 했다가
관계가 나빠진다면 정치적으로 개선 가능한 방침을 만들어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안건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는 정치적인 판단으로 개인 보상을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시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한반도 출신 강제징용자의 유골 반환 문제와 한국에서 유출된 문화재의 반환 문제, 재한(在韓) 피폭자 문제 등을 언급하며
"하나씩 하나씩 역사적 사실을 직시하면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을 해결하겠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일본인이 국제 사회에서 존경받는 방법이다"라고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2010년 07월 08일 (목) 00:15 연합뉴스
[뉴스엔 글 김지윤 기자/사진 배정한 기자]
'겨울연가' 배용준과 최지우가 극중 함께 호흡을 맞췄던 故 박용하(33)의 빈소를
찾았다.
6월 30일 오전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서울 성모병원 영안실 5접객실에는 고(故) 박용하의 임시 빈소가 차려졌다. 생전 고인의
따뜻했던 성품을 증명하듯 이날 빈소에는 많은 동료 연예인들이 조문 행렬을 이었다.
특히 이날 조문객 중 고인과 함께 지난 2002년 KBS 2TV 드라마 '겨울연가'에서 삼각관계를 이뤘던 배용준과 최지우의 조문에
취재진들의 관심이 주목됐다.
오후 7시께 먼저 빈소를 찾은 최지우는 오열하며 조문행렬에 동참에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이후 오후 11시 8분께 배용준이
다소 무거운 표정으로 병원문을 들어섰다. 그는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를 묵묵히 받으며 별다른 말없이 빈소로 향했다.
한편 박용하는 6월 30일 오전 5시 30분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자택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다.
일본언론 등이 병원에서 생방송으로 현장을 연결하는 등 박용하의 자살 소식을 대서특필한 가운데 상주인 매형 김재형씨는 오후 2시께 강남 성모병원 공식 브리핑을 통해 유서는
없었다고 말했다. 경찰 역시 유서를 발견하지 못했으며 휴대폰 통화목록은 모두 삭제돼 있었다.
다만, 박용하는 앞서 자신의 트위터에 "사람들이 가끔씩 나도 잘 모르는 나에 대해 쉽게 이야기를 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부모를
위해 천천히 가겠다"는 글을 남긴 바 있다.
고(故) 박용하의 갑작스러운 자살 소식에 따라 연예계 스타들은 눈물을 흘리며 황급히 빈소를 찾아 애도하고
있다.
송승헌과 소지섭, 김민정, 박희순, 유진, 김기수, 강타, 씨엔블루(정용화 이정신 이종현 강민혁), 유노윤호,
강원래-김송 부부, 김진표, 김민종, 이형철, SS501 김형준, 유키스 김기범, 정일우, 이태임, 김현주, 김원준, 박효신, 최지우, 이병헌, 장신영, 신승훈, 고주원, 서유정, 김하늘,
최은주, 이주현, 김범, 김규리, 린, 거미, 이연희 등이 발걸음을 했다. 특히 소지섭은 빈소에 들어서자마자 오열 통곡했다.
고인의 장례는 불교식 3일장으로 엄수된다. 1일 입관식과 빈소 이동을 한 뒤 2일 발인, 경기도 성남 영생원에서 화장장을 치른다.
장지는 미정.
2010년 06월 30일 (수) 23:35 뉴스엔
막걸리 만들때마다 일본에 로열티 낸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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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준 다큐 감독이 말하는 … 재일동포에게
눈물이란
정대세가 울었다. 지난 16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북한-브라질 경기 전 양국 국가(國歌)가
연주될 때다. 그 눈물은 어찌나 난해했던지 해석이 분분했다.
차범근 SBS 해설위원은 "얼마나 월드컵 무대를 밟고
싶었으면"이라고 했고, 정대세 본인은 "큰 경기에 나선 게 기뻐서"라고 말했다. "재일동포의 고단한 삶이 묻어난 눈물"이라고 풀이한 이도 있다. 그의 눈물이 궁금했다.
조선학교
김명준(40·사진)씨를 만난 건 22일이었다. 그는 다큐멘터리 '우리학교'의 감독이다.
2003년 10월부터 2005년 4월까지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조선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숙식하며 촬영한 이
영화로 2006년 부산국제영화제 운파상(다큐멘터리 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재일동포가 아니면서 재일동포 영화를 가장 잘 만든 사람이다.
-정대세는 왜 울었을까요?
김 감독의 대답은 1시간30분 동안 이어졌다. 되풀어보면, 출발점은 조선학교다.
일본에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자본으로 설립된 초·중·고교 통합
과정의 학교가 70여개, 대학교가 1개 있다. 이런 학교를 조선학교라 부른다.
정대세는 초·중·고·대학교 모두 조선학교를 다녔다. 재일동포 중에도 드문 경우다. 형과 누나도
그랬으니 집안 전체가 조선학교 출신인 셈이다. 학비도 비싼 곳에 부모는 악착같이 삼남매를 보냈다.
-정대세 부모님이 조총련계인 모양이네요. 그래서 북한 국가대표 축구팀 선수가 된
거겠죠?
"글쎄요. 조선학교가 조총련계 지원을 많이 받았고, 북한 쪽에 가까운 교육을 하는 건 맞아요.
이 문제로 조선학교들도 요즘 고민이 많아요. 그러나 북한을 지지하는 동포만 조선학교에 다닌다는 건 100% 오해예요. 재일동포들에게 조선학교는 그냥 '우리 학교'예요. 우리말과 민족정신을 가르쳐주는 유일한 학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정대세의 형 이세(28)씨는 이와 관련해 "아버지는 한국 국적이고 어머니는
조선적(朝鮮籍)이다. 아버지는 (남과 북 중에) 지지하는 쪽이 없고 어머니는 따지자면 조총련 쪽"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에서 운영하는 학교도 있는데 굳이 조선학교에 보낸 건 부모의
정치적 성향이 반영된 것 아닐까요?
"민단에서 운영하는 학교는 일본 전역에 4개뿐이에요. 보내고 싶어도 보낼 수가 없어요. 아까
말한 것처럼, 아이에게 한국말을 가르치고 싶다면 선택 가능한 학교는 조선학교뿐이에요."
민단의 한국학교는 교포들 마음에서도 멀다고 했다. "도쿄 한국학교는 한국에서 온 주재원 자녀가
다니는 학교로 변했어요. 일본사회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교육은 제공하지 않고 한국대학 입시교육을 해요. 동포들이 아이 보내기 힘들죠."
민단이 운영하는 오사카(大阪)의 백두학원이나 금강학원은 일본어 수업시간이 한국어 시간보다
많다. 일본 교과과정에 부합하는 교육을 해서 일본 정부로부터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냥 가까워서 조선학교에 가는 거라면 정대세를 이해하느라 굳이 조선학교를 들여다볼 필요가
없을 텐데.
"흠… 조선학교를 다니면 아이들이 달라져요. 조선학교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복잡한 설명이 이어졌지만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렇다. 1945년 광복 직후
재일조선인연맹(조련)이 민족교육을 위한 학교를 세웠다. 탄압을 받았지만 학교 형태로 발전시켜나갔다. 이 학교를 지켜내기 위해 재일동포 1세대가 쏟아 부은 노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북한도 도움을 주긴 했지만
재일동포들이 스스로 돈을 모아 일군 학교였다. 그 전통을 이어받은 게 조선학교라는 것이다.
"자연히 학생들이 사명감을 갖게 되죠. 일본 애들에게 꿀리지 말아야겠다는 그런 거. 주변
환경이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들어요."
그의 영화에서 일본 아이들과의 축구시합에서 지고 그토록 서럽게 우는 재일동포 아이들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됐다.
"일본 학생들은 자기계발을 위해 축구를 하지만 조선학교 아이들은 단지 거기에만 머무를 수가
없어요. 일본 애들을 한번 이기면 동포 사회가 난리가 나요. '일본 학생들을 상대로 열악한 상황의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잘하는구나' 하는 거죠. 그래서 마음가짐이 비장해요. 정말 꼭 이겨야겠다는 마음이
강하죠."
정대세의 눈물,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재일동포를 만나보면 일본학교 다닌 분, 한국학교 다닌 분, 조선학교 다닌 분이 정말 달라요.
사고방식 차이가 엄청나죠. 조선학교를 조금이라도 다닌 분들은 당당해요. '일본 사회 나가서 잘 행동해야 돼. 자긍심을 가져야 해.' 이런 의식이 강하죠.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죠. 딱
정대세예요."
조선학교도 최근엔 많이 달라졌다. 80년대 이후 남한에서 이민 온 사람들도 아이를 맡기는
경우가 꽤 있다.
"이민자들은 처음엔 조선학교라고 하니 무서워하죠. 하지만 동포 사회에서 살다보면 조선학교에
자주 가게 돼요. 학예회도 있고, 운동회도 있고 하니까. 가보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평범한 학교죠. '여기에 아이를 보내면 우리말도 배우고 일본말도 배우겠구나' 싶어서 보내는 거예요. 일본으로 귀화했는데도
조선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집도 있고 한국 국적을 가진 아이들도 많아요."
조선적
그래도 질문이 남는다. 정대세는 한국 국적인데 북한의 축구 국가대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재일동포들의 복잡한 국적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정대세는 재일동포 3세다. 일제시대 일본으로 건너온 할아버지 고향은 경북 의성이고, 아버지는
한국 국적, 어머니는 조선적이다. 정대세는 아버지를 따라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일제시대 조선인의 국적은 모두 일본이었다. 광복과 함께 모두 조선적이 부여됐다. 북한도 남한도
생기지 않았던 시기였고, '조선'이란 용어에는 '조선반도 출신자'라는 뜻밖에 없었다.
48년 남북에 두 개의 나라가 생겼다. 65년 한일조약이 체결되면서 '한국'은 정식 국적으로
인정됐다. 일본은 지금까지도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일본에서 북한 국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재일동포 중 한국 국적을 택하지 않은 사람은 조선적으로 남게 됐다.
현재 조선적은 여전히 조선반도 출신자란 의미밖에 가지지 않는다. '조선'은 국적이 아니라
기호에 불과하다. 조선적 재일동포는 법적으론 무국적자다.
일본 정부가 한국 국적만 인정하기 때문에 재일동포가 조선에서 한국으로 국적을 변경하는 건
언제든지 가능하지만 한국에서 조선으로 변경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조선적은 줄어들기만 할 뿐 결코 늘어나지는 않는다. 북한 대표로 뛰고 싶었던 정대세가 국적을 바꿀 수 없었던
이유다.
"북한 국적을 취득하는 방법이 있지만 그러면 일본에서 살 수가 없게 되죠. 한번 출국하면
재입국이 거부될 테니." 정대세는 2년 전 국내 일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당시의 절망감을 털어놨다.
"조선적으로 바꾸는 게 일본 법률상 불가능했다. 절망감에 밥도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고, 내 꿈을 자신의 꿈처럼 열망했던 어머니도 아버지와 말다툼을 했다. 내 꿈 때문에 가족까지 깨질 지경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북한이 정대세에게 여권을 발급해줬고 국제축구연맹(FIFA)도 남북한 특수성을 고려해 정대세가 북한
대표로 뛰는 걸 인정했다.
"일본에서 한국 국적은 플러스알파가 되는 측면이 있어요. 회사에서도 좋아해요. 하지만 조선적은
달라요.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이 여전하죠."
그런 시류를 거슬러 조선적 회복을 시도했던 정대세가 생각하는 조국은 어디일까. 김 감독은
이렇게 설명했다.
"조선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조국은 복합적이에요. 학교 교육이 북한을 지향하고 있다는 건
나이를 먹을수록 알게 돼요. 근데 집에 가면 엄마는 한류 드라마를 보고 열광해요. 자기도 한국음악을 즐겨 듣게 되죠. 문화적으론 한국과 가깝고 머리로는 북한이 조국 같은 그런 상황인거죠."
2010년 06월 24일 (목) 17:46 국민일보
[한겨레] 아버지 '한국' 국적 이어 받아 북한 대표선수
왜 시대 흐름을 거슬러 '조선' 선택한
것일까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서 북한 축구대표팀의 스트라이커로 활약하는 정대세는
재일동포입니다. 아버지의 '한국' 국적을 이어받았지만 북한의 대표선수로 뛰고 있습니다. 그는 왜 '한국'이 아니라 '조선'을 선택한 것일까요? 그는 왜 많은 재일동포들이 '한국' 국적을 선택하고, 심지어는
'조선'에서 '한국'으로 국적을 바꾸기도 하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른 것일까요? 정대세가 2008년 7월 < 한겨레 > 매거진 'ESC' 에 보내온 글을 소개합니다. 당시 정대세는 5개월에 걸친
월드컵 3차 예선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온 상태였습니다. 글은 6월22일 서울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치른 한국과의 시합에서 득점 없이 비긴 소회로 시작합니다.
아버지의 '한국'국적을 이어받은 나는 왜 조선 대표팀을 택했나
(2008/07/02)
안녕하세요. 장마로 기분이 찌뿌드드한 정대세입니다. 오늘도 일본에선 일찍부터 비가
옵니다. 여러분,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저는 약 4주일간의 해외 원정에서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랜만에 안기니 내 침대가
쾌적하군요. 몸 컨디션을 회복한 뒤 6월24일부터 가와사키 프론탈레 팀에 합류해 다시 연습에
매진하게 됩니다.
고3때 수학여행 간 평양에서 선언하다
이제 5개월에 걸친 3차 예선이 마침내 끝났습니다. 6월22일 한국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치른 한국과의 시합은 아쉽게도 득점 없이 비기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관중석에서 통일기를 휘날리며 응원해 주신 분들도 있어 정말 감동했습니다. 경기장에 나와 주신 분, 텔레비전으로 시합을 봐
주신 분들, 감사드립니다. 몹시 고대하던, 한국에서 한 시합이어서 반드시 골을 넣겠다는 각오로 임했습니다만 실망스런 시합을 보여드리게 돼 죄송합니다.
지난달 14일의 대요르단전을 앞두고, 6월7일 요르단이 한국과 비겼다는 소식을 듣고는
요르단과 시합도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2 대 0으로 쌈빡하게 이겨(이날도 저는 골을 넣지 못했습니다만…) 최종예선에 진출하게 됐습니다.
어쨌든 무사히 최종예선에 나갈 수 있게 돼 한시름 놨습니다. 그리고 한국과 함께
최종예선에 나가게 된 것도 정말 기쁜 일입니다. 수비에 치중한 팀 전술 때문에 생각처럼 공격을 할 순 없었지만 3차예선에서 유일하게 무실점을 기록하는 성과를 남길 수 있었습니다. 최종예선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어려운 시합이 되리라는 건 누구나 예상합니다. 제 희망을 말한다면, 꼭 한국, 일본과 같은 그룹에서 싸우고 싶습니다(6월27일 열린 아시아 최종예선 조 추첨에서 남과 북은 같은 조인 B조에
배정되었다-편집자)
서론이 좀 길어졌습니다만, 이번 테마는 '정대세가 조선대표를 택한 이유'입니다. 도대체
나는 언제부터 조선대표가 되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한 걸까. 초심으로 돌아가 기억을 더듬어가며 써 보겠습니다.
언젠가 전화로 어머니와 얘기를 하는데 무심코 "서랍을 정리하다가 대세의
소학교(초등학교) 때 작문이 나왔어. '나는 장래 반드시 국가대표가 될테야!!'라고 돼 있었어"라고 했습니다. 일본에서도 J리그 다큐멘터리 등에서 곧잘 듣는, 흔해빠진 얘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소학생 때부터 그런 꿈을 간직해온 모양입니다.
고교 3학년 때 여름, 수학여행으로 조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평양에서 보낸
마지막 날 밤 축구부 친구들과 뭔가 얘기를 하던 나는 그만 들뜬 기분에 "나는 꼭 조국대표가 돼서 여기(평양)로 돌아오겠습니다!!" 하고 힘차게 선언한 일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아버지의 '한국' 국적을 그대로 이어받은 나는 멋도 모르고 모두들 앞에서 내 꿈을 선언한 것입니다.
조선대학에 진학한 나는 망설임 없이 축구부에 들어갔습니다. 2학년 때 2004년
아시안컵 예선 조선대표로 참가해보지 않겠느냐는 얘기가 날아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을 막은 것은 저의 '국적'이었습니다. "나는 공부에선 다른 학생보다 뒤지지만 이제까지 총련계 민족교육을 받아서 애국심과
민족혼, 긍지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습니다. 내 국적 표기가 '한국'이라는 데 모순을 느끼며 살아왔는데, '조선' 국적을 다시 취득해서 국가대표가 되고 싶습니다." 아무 거리낌 없이 당시 축구부 부장에게
말했습니다.
'조선'에서 '한국'으로 바꾸는 시대를
거슬러…
지금 재일조선인 사회에서는 국적을 '조선'에서 '한국'으로 바꾸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여행갈 때 비자 신청하기도 쉽고, 조선-일본 관계가 날로 악화되는 때에 일본에서 살아가기가 아무래도 용이합니다. 이런 시기에 국적을 '한국'에서 '조선'으로 바꾼다는 것은 황당한 얘기로
들렸을 겁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재난이 일어났을 때 모두가 피난 가는 방향과는 거꾸로 재난 발생지를 향해 스스로 나아가는 것과 같은 짓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고 오직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저 자신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조선'적을 취득하려 했으나 결과는 노(NO). 우리 가족은
어머니만이 '조선'적, 아버지와 누나와 형님은 '한국'적인데다, 일본과 국교가 있는 '한국'적에서 국교가 없어 일본이 '나라'(國)로 인정하지도 않는 '조선'적으로 바꾸는 것은 일본 법률상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눈앞에 다가온 꿈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렸습니다. 절망감으로 밥도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고
눈물만 뺨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고, 내 꿈을 자신의 꿈처럼 열망했던 어머니도 아버지와 말다툼을 해 내 꿈 때문에 가족까지 깨질 지경이었습니다. 그만큼 조선대표가
되고자 했던 내 꿈은 강렬했고 가족 또한 열렬히 응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겠죠.
2005년 2월9일 그런 나를 제쳐놓고 일본 사이타마 스타디움에서 독일 월드컵 최종예선
일본-조선전이 열렸습니다. 같은 재일동포로서 조선대표로 소집된 안영학, 이한재 선수가 일본 매스컴에서 앞다퉈 모셔 가는 귀한 몸이 된 걸 선망의 눈초리로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재일동포들이
스타디움으로 달려갔습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우리에겐 일본에서 국가대표로 뛰는 시합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일본대표를 상대로 호각지세를 이루며 싸우는 조선대표 선수들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감동했겠습니까. 그리고 '국적' 문제만 없었다면 나도 이 무대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론 정말 부럽기 짝이 없고 또한 어금니를 꽉 깨물게 하는 분기가 치받쳐 올라왔습니다. 저는 꿈을
포기했습니다.
대학 졸업 뒤 프로로 J리그 가와사키 프론탈레에 입단했습니다. 꿈을 이룰 수 없었던
분기도 잊고 프로로 활동하는 데 몰두할 뿐 제대로 시합에도 나가지 않던 나에게 낭보가 전해졌습니다. 재일본조선인축구협회를 비롯한 주변의 여러분들이 힘을 써서, 일본에서의 '국적' 표기를 바꾸지 않고도, 내
꿈과 민족에 대한 생각을 평가해준 '우리나라'가 패스포트(여권)를 발행해주기로 했다는 겁니다. 바꿔
말하면, 진정한 '조선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겁니다. 그때 일시 포기했던 꿈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기쁨보다 놀라움이 먼저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살아온 23년간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습니다.
일제 식민지시대 때 일본에 건너온 할아버지가 생활 기반을 잡고 일본 정부의 부당한 차별
속에서 조선사람으로 살았고, 그 2세인 아버지 어머니가 그 뜻을 이어받아 우리를 '우리 학교'에 보내주었습니다. 소학교에서 대학까지의 16년간에 걸친 민족교육은 내게 조선사람 마음을 길러 주었습니다. 수업
커리큘럼이나 귀한 친구들을 사귀는 일은 일본 학교에 다녔더라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우리 학교는 일본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우리나라 말, 역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민족의 혼과 긍지,
내가 일본에 있더라도 조선사람으로 살아갈 신념을 심어 주었습니다.
"7년만에 또 하나의 꿈이 이뤄졌어!"
이런 나의 성장과 그 속에서 배양된 애국심, 민족심이 흔들리지 않았기에 조선대표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누가 이끌어 준 것도 아니고, 바로 이것이 '정대세가 조선대표를 택한 이유'일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우리 학교를 선택해 준 것에 감사합니다. 저를 조선인으로 키워 준 우리
학교에 감사합니다.
대표가 되고 나서 첫 시합은 지난해 7월 마카오에서 열린 동아시아선수권. 일본에서 익힌
나의 우리말 실력이 대표선수들에게 통할까, 문제없이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과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내 보이겠다는 기대를 안고 꿈의 무대로 가는 첫발을 대디뎠습니다. 그러나 상상도 하지 못한 환경의 차이,
서포트 부족 등으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마디의 불평불만도 없이 항상 전력을 기울여 플레이하는 대표선수들과 함께 지내다
보면 잊어버렸던 혼이 다시 되살아난 느낌이 듭니다. 그것은 내가 그냥 간단히 제이(J) 리그에 들어가고, 간단히 국가대표가 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일본 학교의 절반 크기에도 못 미치는 우리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시작해 주변의 서포트에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한눈팔지 않고 계속 달려온 잡초혼 덩어리가 정대세다, 하고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2008년 2월 충칭의
동아시아선수권, 월드컵 아시아예선을 조선대표와 함께 싸워왔습니다. 지금은
국가대표라는 자각도 다지면서 2010년의 남아프리카 대회를 향한 일념뿐입니다. 이 많은 생각으로 가득 채워진 플레이에 대해 일본에서는 '인간 불도저'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고교 3학년 여름, 친구들에게 선언했던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다시 한번 외치고
싶습니다. "바로 지금! 7년이나 걸렸지만 또 하나의 꿈이 이뤄졌어!!"
정대세 조선 축구대표팀 선수 · J리그 가와사키 프론탈레 소속
2010년 06월 16일 (수)
14:30 한겨레
[OSEN=이명주 기자] '영원한 라이벌' 일본을 바라보는 한국의 눈빛이 달라졌다?
카메룬과 첫 경기를 앞두고 있는 일본에 한국 축구 팬들이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어 화제다.
14일 오전 한 포털사이트에는 '일본 대 카메룬, 어떻게 생각하나'라는 제목의 게시글이
등장했다. 이날 밤 11시 블롬폰테인의 프리스테이트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2010 남아공 월드컵 일본-카메룬전 결과를
예측해 보자는 게 해당 글의 논지였다.
이제까지 월드컵에서 일본 대표팀은 한국의 미움을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역사 교과서
왜곡, 독도 발언 등 스포츠 외적인 부분에서 대립각을 세우다 보니 응원은 고사하고 비난만 가득했다.
그러나 이번 남아공 월드컵은 조금 다른 모습이다. '먼 이웃나라'였던 일본을 '아시아
대표'로 보기 시작하면서 일본 팀에 힘을 보태주는 양상이다. 일본과 카메룬의 경기에서 일본을 응원하겠다는 한 네티즌은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일본이 잘해줬으면 좋겠다"고 지지했고, 또 다른 네티즌은 "일본
대표팀의 실력이 너무 떨어진 것 같아 안타깝다. 힘내길 바란다"고 전했다.
한국과 일본 언론 역시 서로를 향해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중이다. 아사히, 요미우리
신문 등 일본 언론에서는 지난 12일 있었던 한국과 그리스 경기 결과를 대서특필하며 ;사상 최강의 2010년판 코리아' 라고 환호했다.
한국 언론 또한 일본 대표팀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하면서 일본과 카메룬 경기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있다.
일본이 바라는 대로 '아시아의 돌풍'을 이어갈 수 있을까. 일본과 한국 축구팬의 관심이
14일 밤 11시에 쏠려 있는 이유다.
2010년 06월 14일 (월)
16:39 OSEN
'주식회사 일본'을 이끌 제94대 일본 총리대신의 강력한 후보인 간 나오토 부총리 겸
재무상(63)은 자수성가형 정치인이다.
세습 의원 출신으로 '유약하다'는 평가가 많은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와 달리 전형적인
야당 투사 출신으로 정치적 소신이 뚜렷하고 시장 개입이나 경기 부양 등 경제정책을 강력하게 밀어붙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1946년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나 71년 도쿄공업대학 응용물리학과를 졸업했고, 일본의
거물급 정치인(중의원 10선) 가운데 특이하게 시민운동 경력을 바탕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사회시민연합, 신당 사키가케, 옛 민주당 등을 주도하며 '타도 자민당'의 선봉장 역할을 해왔고, 96년 초 호소카와
연립내각에 참여해 후생상을 지낸 경력을 제외하면 정치 경력의 대부분을 야당에서 보냈다.
자신의 정치후원단체를 '초지회(草志會)'라고 이름 붙인 것도 "기득권층이 아니라 시민이
중심이 되는 정치를 구현하겠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96년 자민당 이탈 세력과 공조해 민주당을 창당한 이래 초대 대표와 3대 대표를
역임하는 등 '민주당의 적통'으로 평가받는다.
주일 한국대사관 측은 " '한일의원연맹'의 일본 측 고문을 맡을 정도로 한국에 대한
이해도와 관심이 높다"고 말했다.
76년 중의원 총선(무소속), 77년 참의원 총선(사회시민연합), 79년 중의원
총선(사회민주연합) 등 3번의 선거에서 낙선의 고배를 마신 뒤 80년 제36회 중의원 총선에서 첫 당선됐다.
아사히신문은 "세습 출신들이 손쉽게 당선되는 일본의 정치 풍토에서 잡초와 같은 인생
역정을 걸어왔다"고 평가했다.
간 부총리 자신도 "총리의 아들이나 손자가 아니면 총리가 될 수 없는 게 일본 정치의
문제"라고 강조해 왔다.
차기 총리로 선출되면 세습정치를 차단하기 위해 어떤 제도적 장치를 만들지도 주목된다.
2000년 4월 총리에 오른 모리 요시로 총리 이래 꼭 10년, 6대(총리 선출 기준) 만에 비(非)세습 출신의 총리대신이 탄생하게 된다.
하토야마 내각에서 부총리 겸 재무상으로 근무할 당시 엔화 약세를 용인하거나 경기부양책을
주도하는 등 소신이 뚜렷한 정책 성향을 보였다.
2010년 06월 03일 (목)
17:19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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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황태자 마중 나가는 순종 황제 마차. ⓒ연합뉴스 |
올해는 한·일 병합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1910년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합된 이후 36년간 치욕스러운 식민
통치를 받아야 했다. 1945년 광복이 되었지만 식민 지배가 남긴 상처는 여전히 한·일 양국에 깊은 앙금으로 남아 있다. 지난 5월11일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와 와다 하루키 도쿄 대학 명예교수 등 한·일
양국의 지식인 2백14명은 '한·일 병합 조약은 무효이다'라는 내용의 공동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정작 우리들 가운데도 '왜 조약이 무효인가'에 대해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 시사저널
> 은 지난호에 이어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의 기고를 통해 일제의 한국 강제 병합 조약이 왜 무효인지를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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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일한협약'(보호조약)의 한·일 양국어본 비교(왼쪽). 한국어본의 끈이 일본어본과 같은 청색이다. 일본어본은 '의정서'처럼 '재한국일본공사관' 용지를 사용했지만, 한국어본은
'한국 외부' 표시가 없는 적색 괘지이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소장 |
① 보호조약 강제의 현장, 일본이 남긴 강제
증거
'제2차 일한협약'(을사륵약)은 가장 중요한 주권인 외교권을 빼앗는 것이었기 때문에
한국측의 저항은 어느 때보다 컸고, 일본측의 강압도 가장 난폭했다. 일본은 총리대신을 네 번 지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특파대사로 보내 현장을 지휘하게
했다.
2005년 11월15일 이토가 고종 황제를 알현하고, 이 자리에서 세 시간이 넘도록
쟁론이 벌어졌다. 일본의 요청을 들은 고종 황제는, 그렇다면 한국은 아프리카의 토인국이나 오스트리아에 병합된 헝가리 신세가 되지 않느냐고 반문하면서 절대로 이에 응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토는
외부대신에게 협상에 임하라고 지시해주기를 협박조로 거듭 말했지만, 황제는 이런 중대사는 정부에서도 절차가 있고 중추원과 일반 신민의 의견까지 들어야 하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거부했다. 이토는 전제국가에서
황제의 뜻 외에 다른 무슨 절차가 필요하냐고 폭언하면서 협상 지시를 거듭 촉구하고 물러났다.
대한제국의 '의정부회의 규정'(최종 규정, 1904년 3월4일자)에 따르면, 조약은
외부대신이 상대국의 제안을 접수해 의정부 회의에 회부해 의정(또는 참정)이 토론을 주재해 다수 의견으로 회의록을 작성해 황제에게 재가를 구하는 한편, 중추원에도 동의를 구하도록 되어 있었다. 11월16일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겐죠(林權助)는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협상안을 제출했다. 고종 황제와 대신들은 곧 회동해 이 안건은 회의에 아예 회부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11월17일 아침부터 일본 공사는 한국 대신들을
일본공사관으로 초치해 제안을 수락할 것을 회유·압박했다. 대신들이 응하지 않자 하야시 공사는 황제와 직접 의논할 것을 제안하면서 황제의 거처인 중명전(重明殿)으로 이동했다. 황제와 대신들은 간담회 형식으로
다시 만나 계속 거부할 것을 다짐했다. 오후 6시께 하야시 공사는 이토 특사가 있는 곳에 사람을 보내 대사가 직접 나설 것을 요청했다. 이토는 종일 한국주차군 사령부(현 웨스틴조선호텔 건너편에 있던
대한제국의 영빈관 대관정을 무단 점거해 사용)에서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쯔(長谷川好道)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이토는 이 전갈을 받고 하세가와와 함께 헌병들을 거느리고 중명전으로 갔다. 좁은 입구와 마당은
일본군 헌병들로 가득 차다시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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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병합 조약'의 한국측 전권위임장. 국새가 날인되어 있고 그 위에 순종 황제의 이름자 서명이 보인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소장 |
이토는 황제에게 알현을 요청했지만, 황제는 대사와는 더 할 얘기가 없다고 거절했다.
이토는 퇴궐하려는 한국 대신들을 불러 세워놓고 한 사람씩 심문조로 찬반 의견을 물었다. 이토는 반대 의견에 대해서도 엉뚱한 토를 달아 찬성으로 간주해 찬성자를 다수로 만들었다. 이완용이 조약의 시한을
'한국이 부강해질 때까지'라고 명시하고, '한국 황실의 안녕을 보장한다'라는 구절을 넣자고 제안했다. 이것은 전날 이토와 짠 각본이었다. 이토는 반대자는 참정(한규설)과 탁지대신(민영기) 두 사람뿐이라고
선언하면서 이완용의 제안을 반영해 조약문을 새로 쓰게 했다. 이즈음 통역관 마에마 교오사쿠로 해금 헌병들을 데리고 한국 외부에 가서 외부대신의 직인을 가져오게 했다. 새로 쓴 조약에 날인을 마쳤을 때는
11월18일 새벽 1시 30분께였다. 외교권 이양이라면 '조일 수호 조규'처럼 한국 황제의 비준서가 반드시 첨부되어야 하는데도 이 조약에는 외부대신 직인만 찍혀 있을
뿐이다.
일본측은 억지를 부리던 중에 결정적인 강제의 물증을 스스로 남기고 있는 것을 몰랐다.
한국측의 손으로 작성되고 철해져야 할 한국어본의 조약문이 일본공사관측에 의해 처리된 증거가 남겨졌다. 1년여 전의 '의정서'만 해도 조약문은 각기 외교 업무를 주관하는 양측의 기관이 주관해 처리되었다. 즉,
한국은 '韓國外部', 일본은 '在韓國日本公使館'이라는 글자가 인쇄된 용지를 사용하고, 각기 서로 다른 끈으로 그 문건들을 철해 교환했다. < 사진 1 > 한국측은 황색, 일본측은 청색의 끈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때는 일본어본은 '의정서' 때와 같은 용지와 끈을 사용했지만, 한국어본은
기관명이 인쇄되지 않은 적색 괘지에 일본측이 사용한 청색 끈으로 철해져 있다. < 사진 2 > 이것은 일본공사관측이 한국어본까지 직접 챙겼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귀국 후 천황에게 올리는 보고서의 내용까지 조작했다. 추밀원
비서실장(都築馨六)이 작성한 보고서의 초고(일본 국회 헌정 자료실 소장)에는 이토 특사가 한국 황제를 알현했을 때의 분위기를 '한국 황제는 이번 조약에 찬성하지 않아'라고 적었다. 그런데 '찬성하지 않아'의
구절 위에 흑색 선을 긋고 '찬성하지 않을 수 없어'라고 고치고 한국 황제가 처음부터 협조적으로 임한 것으로 내용을 바꾸었다. 이런 조작 후에 '황제 협상 지시'를 정론처럼 삼아 한국 정부의 < 官報
> 에 이 조약을 '한일 협상 조약'으로 게재하게 하는 한편, 한·일 양측의 공식 기록들을 모두 이 각도에서 작성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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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이탈리아의 사진 잡지(1907년 8월4일자)의 표지 사진. '신황제' 대역의 젊은 환관이 '구황제' 대역 환관으로부터 양위를 받고 막 용상에 올라앉아 있다. 앞쪽에 일본 장교
복장의 인물이 보인다. (오른쪽) 순종 황제 이름자 서명 위조 상태. 하나여야 할 필체가 여섯 가지 정도 된다. 통감부 직원들이 각기 소관별로 위조 처리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소장 |
② 고종 황제 퇴위 강제, 뒤이은 순종 황제 친필 서명
위조
고종 황제는 '제2차 일한협약'이 강제되자 곧바로 독일, 러시아, 미국, 프랑스 등
수교국의 국가 원수들을 상대로 조약 무효화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1906년 1월 말에 외교권 실행 기구로 통감부를 서울에 설치하고 이토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이토는 고종 황제가 1907년
6월에 비밀리에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3인을 파견하자, 이를 구실로 퇴위를 강제했다. 황제는 이를 거부했지만, 일본 정부는 7월20일에 환관 두 명을 신·구 황제의 대역으로 동원해 양위식을
거행했다. < 사진 3 >
이토는 7월24일에 총리대신 이완용을 불러 '한일협약'을 체결했다. 통감이 대한제국의
내정까지 직접 관여하는 체제를 만들기 위한 조약이었다. 이 조약은 퇴위 강제와 함께 추진된 것이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절차를 밟는 것이 될 수 없었다. 한국 황제가 퇴위를 거부하고 황태자가 움직이지 않은
상태에서 전권 위임과 같은 절차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이 조약은 말미에 두 사람이 '각기 본국 정부에서 상당한 위임을 받아 본 협약에 기명 조인한다'라고 밝히고 있지만, 신·구 황제 어느 쪽도 위임을
허락해준 적이 없었다. 한마디로 이 조약은 통감이 나서 대한제국의 통치 체제를 통감부의 것으로 바꾸는 것에 대한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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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병합 조약' 전권위원들의 기명 날인 상태.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소장 |
황제와 황태자는 이토의 강압에 오래 맞섰다. 8월2일에 통감부가 융희(隆熙)라는 새
연호를 공표했지만, 황태자는 나서지 않았다. 일본은 황태자의 이복동생인 10세의 영친왕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그를 인질로 삼는 계략으로 황제를 압박했다. 일본의 황태자가 먼저 서울을 방문하는 것으로 계략이
가시화되자 고종 황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황제는 11월15일 종묘를 방문한 다음 경운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황태자(순종)가 있는 창덕궁을 들렸다. 3일 뒤 황태자가 종묘를 찾고 선대왕들의 신위 앞에서
황제의 위에 오르겠다는 서고(誓告)를 올렸다.
이때 통감부는 다시 기묘한 계략을 부렸다. 황제의 서고문에 이름자를 친필로 기입하는
난을 만들었다. 새 황제가 '李拓'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여기에 써넣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이날부터 황제의 결재 방식을 황제가 이름자를 직접 쓰는 친서(親署) 제도로 바꾸었다. 이 방식은 일본에서 명치유신
이래 해 오던 것이었다. 서고가 끝나자마자 통감부의 직원들은 서고문을 넘겨받아 이날부터 1910년 1월18일까지 2개월간 61건의 문서에 황제의 이름자 서명을 흉내 내어 안건들을 처리했다. < 사진 4
>
이 문건들은 대한제국의 정부 조직과 재판소, 감옥 제도 등을 통감부 감독 체제로 바꾸는
것들이었다. 공문서 위조 행위가 내정권 탈취에서도 대규모로 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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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병합 조약'의 한국 황제 '칙유'(조선총독부 홍보용). 국새가 아닌 것이 찍히고 황제의 이름자 서명이 없다. |
③ 병합 조약에 순종 황제는 서명하지
않았다
고종 황제가 강제 퇴위당한 후 무력 투쟁을 벌이는 의병들의 기세는 국내외에서 날로
높아갔다. 1909년 6월에 이토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통감 자리에서 물러났다. 같은 해 10월에 일본의 만주 진출에 한몫하고자 하얼빈으로 갔다가 거기서 블라디보스토크에 본거를 둔 대한의군의 참모중장
안중근이 이끄는 특파대에 의해 처단되었다. 일본 군부는 이토가 통감에서 물러나기 직전에 한국 병합에 대해 이토도 찬성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일본 군부는 하얼빈 사건 후 배후 조직에 대한 철저한 탐문 조사를
마치고 1910년 3월에 안중근을 극형에 처한 뒤, 6월에 '한국병합준비윈회'를 발족시켰다. 병합에 필요한 모든 절차를 검토하고 문건들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안중근 사건에 대한 조사를 주관한 육군대신
데라우찌 마사다케(寺內正毅)가 7월 하순 통감으로 부임해 병합 집행에 나섰다.
일본은 병합 조약만은 정식 조약의 요건을 다 갖추려고 했다. 준비위윈회는 한국측의
이름으로 낼 문건들도 모두 준비했다. 데라우찌는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사전에 협조를 당부한 뒤, 8월22일에 위임장부터 내놓고 이것을 순종 황제에게 가져가서 서명과 날인을 받아오라고 했다. 황제는 이완용 외에
친일 분자 윤덕영, 민병석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시간 이상 버텼다. 그것은 침묵 시위였다. 창덕궁 낙선재에 갇힌 몸이 된 그에게는 이미 저항할 아무런 수단이 없었다. '大韓國璽'라고 새겨진 국새를 찍고
그 위에 자신의 이름자를 직접 썼다. < 사진 5 > 이완용은 이를 받아들고 남산 아래 통감 관저로 달려갔다. 데라우찌가 내놓은 조약 본문에 기명 날인했다. < 사진 6 > 그런데
데라우찌는 다시 각서 하나를 내놓았다. 병합의 사실을 알리는 양국 황제의 조칙을 언제든지 발표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조약은 체결과 동시에 한 나라가 없어지는 것이라 비준 절차를 밟을 시간이
없으므로 병합을 알리는 조칙의 공포로 대신하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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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된 신한민보(新韓民報) 1926년 7월18일자에 실린 순종 황제의 유조. '병합 인준은 일본이 제멋대로 한 것이요 내가 한 바가 아니다'라고 밝히고 "여러분들이여
노력해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명명한 가운데 여러분을 도우리라"라고 끝맺었다. |
양국 황제들의 조칙은 8월29일에 반포되었다. 그런데 한국 황제의 조칙은 '칙유'로
이름이 바뀌고, 위임장과는 달리 국새가 아니라 '勅命之寶'라고 새겨진 어새가 찍혔다. 그 위에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황제의 이름자 서명도 없다. < 사진 7 > 이 어새는 황제의 행정 결재용으로서
통감부가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킬 때 빼앗아간 것이었다. 따라서 이 날인은 순종 황제의 의사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순종 황제는 1926년 4월26일에 운명하기 직전에 곁을 지키고 있던 조정구(趙鼎九)에게
유언을 구술로 남겼다. 자신은 나라를 내주는 조약의 조칙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이 구술 유언 조칙은 멀리 샌프란시스코 교민들이 발행하던 신한민보에 실렸다. < 사진 8 > 이 진술은
'칙유'의 상태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한국 병합 조약'만은 정식 조약의 구비 조건을 다 갖추려 했던 일본측의 계획과는 달리 비준서를 대신할 한국 황제의 조칙은 발부되지 않은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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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병합 조약'의 한·일 양국어본 재질 비교. 앞표지, 첫 페이지 그리고 뒤표지(왼쪽부터).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소장 |
일본측은 병합 조약에서도 결정적인 강제의 흔적을 남겼다. < 사진 9 >
에서 보듯이 이 조약은 한·일 양국어본이 똑같은 용지에 똑같은 필체로 작성되고 똑같은 끈으로 묶여져 있다. 조약이 한쪽 의사로 강제되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세계 조약사상 이런 예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2010년 06월 03일 (목) 17:26 시사저널
日, 멀어진 경제 회복·물건너간 정치 개혁
하토아먀 총리
퇴진
2010년 06월 02일 (수)
17:47 서울경제
독도 공시지가 6.28%↑..10억원 넘었다
국토부 "관광객 늘고 경제적 가치
높아져"
2010년 05월 30일 (일)
11:02 연합뉴스
하토야마 총리 "日, 진심으로 한국 지지할 것"
【제주=뉴시스】박정규 기자 = 하토야마 유키오(鳩山
由紀夫) 일본 총리는 29일 천안함 사태와 관련해 "일본은 진심으로 한국을 지지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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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고생 40% 3.1절 의미 잘 모른다"
독립기념관 태극기 물결
(천안=연합뉴스) 양영석 기자 = 제 91주년 3.1절을 엿새 앞둔 23일 천안 독립기념관 태극기광장에 설치된 태극기 815개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2010.2.23
youngs@yna.co.kr |
(서울=연합뉴스) 박용주 기자 = 24일(현지시간)에 미국
워싱턴에서 진행된 도요타 청문회장에선 세계화된 21세기 일본과 미국의 문화가 맞닥뜨렸다.
외견상 미국 하원의원들이 도요타의 리콜 사태를 질타하고
도요타 아키오 사장이 사과하는 모양새였지만 서로 다른 두 나라 미국과 일본의 문화 대치였다는 평가가 많았다.
일본의 기업 경영자는 통상 부하 직원의 의견을 두루
포용하고 가급적 대결 국면을 회피하는 부드러운 치어리더 성격이 강하다.
미국의 의원들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위해선 고성과 삿대질은
기본인 사람들이다. 특히나 선거가 있는 해에는 더 그렇다.
미 하원에서 진행된 도요타 청문회는 이 같은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태평양을 건너온 도요타 아키오 사장은 연방 고개를 숙이며
겸손한 자세를 취하려 애썼고 미 하원의원들은 성난 도부수(刀斧手)처럼 아키오 사장에 목소리를 높였다.
AP통신은 도요타 청문회장이 세계화로 국가 간 통합의
정도는 더욱 정밀해졌지만 여전히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특히 도요타 청문회장은 기업과 정치 문화의 엇박자와
21세기 세계화의 다층적인 모습을 축약해 보여주는 장이었다고 진단했다.
미국의 솔직함과 일본의 미묘함은 청문회 내내 대조를
이뤘다.
아키오 사장은 도요타 자동차 이름이 곧 자신의 이름임을 상기시켰다. 그는 "도요타가 손상을 입는
것은 내가 손상을 입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자기 자신을 홍보하기에 바쁜 미국의 최고경영자(CEO)들이
자신을 파손된 상품으로 비유하는 예는 매우 드물다.
자신의 능력보다 팀플레이를 강조하고 안정과 조화에 무게
중심을 두는 문화도 미국의 기업이나 의회와는 거리가 멀다.
미 의원들은 아키오 사장에게 "끔찍하다"거나 "당신 때문에
당혹스럽다"는 등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했다.
미국의 CNN방송도 이날 청문회가 단순히 도요타 자동차의
대량 리콜사태에 대한 진상 규명 차원을 넘어 미국과 일본 사이에 벌어진 `문화의 충돌'이라고 비유했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 경우, 합일점을
찾는 더딘 의사결정 구조를 갖고 있는 반면, 미국은 브레이크 결함 문제 등에 대한 신속한 답변을 원했기 때문에 이번 리콜사태가 본질보다 더욱 부풀려지게 됐다고 분석했다.
미국과 일본의 언론 문화 차이도 있었다. 일본의 언론이
상대적으로 기업친화적이어서 도요타가 적대적인 미국 언론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키오 사장이 청문회에서 눈을 잘 마주치지 않은 것에 대한
해석도 달랐다. 일본에선 사과할 때 종종 시선을 피하는 반면 미국 사람들은 이 같은 행동을 약점을 보이거나 무엇인가 숨기는 행동으로 해석했다.
한편 케니치 오메 경영 컨설턴트는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IHT) 기고문에서 도요타의 리콜 대란이 컴퓨터와 인간적인 요인에서 비롯됐다고
분석했다.
그는 부품이 전자화되면서 점차 복잡해져 일괄적인 통제가
어렵게 됐고 이들 기술을 총괄할 수 있는 책임자가 존재하기 어렵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했다.
2010년 02월 25일 (목) 10:56 연합뉴스
한국어, 일본인 학습 희망 외국어 3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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