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할머니 아픔 있어선 안 될 일인데… 영화로 모두 알릴래요”

“위안부 할머니 아픔 있어선 안 될 일인데… 영화로 모두 알릴래요”



 지난달 29일 경기도 포천시 대진대 체육관. 지하의 어둡고 서늘한 영화 세트장에선 10여 명의 배우들이 뒤엉켜 지옥의 한 장면을 연기하고 있었다. 일본 군복을 입은 사내들은 앳된 소녀들을 거칠게 낚아챘고, 위안소를 재연한 목재 건물의 좁은 복도엔 끔찍한 비명 소리가 가득했다. 공중에 뜬 카메라만 조용히 움직이며 사나운 폭력과 고통을 기록했다. 탈출을 시도하는 위안부 소녀들을 무차별적으로 제압하는 일본군. 영화 ‘귀향’의 가장 결정적인 장면이다.

‘귀향’은 10대 시절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광복 70주년을 맞는 올 8월 15일 할머니들을 모신 시사회를 목표로 촬영이 한창이다. 일본인들이 “위안부 강제 연행의 증거가 없다”며 소송을 제기하고,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왜곡된 과거사 인식이 재차 확인되면서 영화는 더욱 주목받고 있다. 지난 3월엔 미국 뉴욕타임스(NYT)도 영화를 집중 조명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이런 관심은 영화를 향한 기대를 반영한다. ‘쉰들러 리스트’ ‘피아니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등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들이 역사의 진실을 알리는 데 한몫한 것처럼 ‘귀향’이 위안부 문제를 드러내 양심을 일깨워 주리라는 기대다. ‘귀향’의 조정래 감독도 “이 영화가 위안부 문제의 문화적 증거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영화의 주인공 ‘정민’은 1943년 경남 거창에서 중국 무단(牧丹)강 위안소로 끌려간 14세 소녀다. 이제 50명밖에 남지 않은 할머니들의 과거 모습이기도 하다. 70년 세월을 거슬러 정민을 연기하는 이는 재일동포 4세 강하나(15·사진)양이다. 앞선 장면을 촬영하기 직전 하나를 만났다. 하나는 한국말로 또박또박 “각오를 하고 찍는다”고 했다.

“할머니들 억울한 마음 알아줬으면”

제주도 출신인 하나의 증조할머니·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살 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가족이 오사카에 자리를 잡고 산 지 한 세기가 다 돼 가지만 하나는 한국말로 의사소통을 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 그는 오사카에 있는 조선중급학교 3학년 학생이다. “일본 학교에서는 자기 나라 말을 못 배우잖아요. 역사도 일본 입장에서 틀리게 가르치고…”라고 말하는 하나가 영화에 출연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조선학교에선 일제강점기에 대해 가르친다. 하지만 위안부는 고학년이 돼서야 배우는 내용이다. 하나가 위안부의 존재도 모를 때 우연히 특별한 기회가 생겼다. 2013년 일본 순회 증언에 나선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길원옥 할머니가 그의 학교를 찾은 것이다. “다리가 불편한데도 5층에 있는 강당까지 걸어 올라가시는 할머니들을 봤어요. 할머니들의 얘기는 처음엔 3학년 언니·오빠만 들었어요. 나중에 선생님이 저희들에게 위안부에 대해 설명해주셨는데 더 알고 싶었어요.”

이즈음 일본어가 가능한 배우를 찾기 위해 일본을 찾은 ‘귀향’의 조정래 감독과 연이 닿았다. 재일동포 극단 ‘달오름’을 운영하는 하나 엄마, 김민수 대표가 조 감독을 만난 것이다. 주인공 캐스팅에 애를 먹던 조 감독에게 김 대표가 딸을 소개했다. 아역 배우가 모자랄 때 엄마의 연극에 출연하곤 했던 하나에겐 연기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영화가 찾던 ‘정민’의 이미지에 딱 맞았다. 하지만 조 감독과 김 대표는 찬찬히 대본을 읽어보고 결정하라며 하나에게 시간을 줬다. 10대가 연기하기엔 힘든 장면이 있는데다 무엇보다 일본에서 우익의 활동이 거세지는 상황이 우려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신교육투쟁(재일 조선인이 48년 오사카와 효고현에서 벌인 민족교육투쟁)’ 등 재일 한국인을 주제로 다뤄 온 엄마의 연극에서 역사 공부를 해 왔던 하나는 금세 마음을 정했다. “다른 영화라면 안 했을지도 모르는데, 특히 위안부 문제가 우리 민족의 얘기고 역사 인식을 잘 알리는 내용이어서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위안소 세트장에서 진행되는 촬영은 미성년자인 하나에겐 버거운 일이다. 조 감독이 배우를 배려해 시나리오를 수정했지만 생지옥을 연기하기란 힘든 일이다. 하나 역시 시나리오만 보고도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소녀들이 위안소에 다 끌려가고, 사람을 불태우고 총을 쏘고… 상상도 못했던 일이에요. 세트장만 봐도 어둡고 슬픈데, 실제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요.” 그래서 하나는 “각오를 했다”고 했다. 인물에 너무 빠져버리면 생활이 힘들어질까 봐서다.

촬영장 밖에서도 쉽지 않은 일 투성이다. 사실 하나의 출연 자체가 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본의 극우 세력이 기승을 부리면서 오사카 시내에선 “조선인은 죽여야 한다” “바퀴벌레 같은 조선인 당장 나가라”는 혐한(嫌韓) 시위가 벌어지는 일은 다반사다. 이들은 조선학교를 찾아가 시위를 벌이기도 하는데 출동한 경찰마저 방관하기 일쑤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의 영화 출연이 일본에 알려졌다. 인터넷엔 입에 담을 수 없는 위협과 협박의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치마·저고리 교복을 입어 눈에 잘 띄는 하나가 행여나 공격받는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인터뷰에 함께한 김 대표는 두렵다고 했다.

‘귀향’엔 다수의 재일동포가 일본인 역으로 출연한다. 김 대표도 위안소 관리인 ‘노리코’ 역을 맡았고, 일본인 장교·군인 역에 요코하마 출신 정무성·유신씨 등 5명이 출연한다. 모두 어지간해선 할 수 없는 일을 자처한 이들이다.


김 대표는 위협을 무릅쓴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생활 속에 늘 차별이 있기 때문에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갖지 않으면 일본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우리는 재일 조선인이다’라는 얘기를 안 하는 날이 없어요.”

10여 년 전 기획, 자금 없어 촬영 늦어져

영화 제목 ‘귀향(鬼鄕)’의 귀자는 ‘귀신 귀’자다. 영어 제목도 ‘Spirits Homecoming’이다. 끝내 돌아오지 못한 할머니들을 영혼이나마 고향에 모신다는 의미다. 하지만 할머니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일은 쉽지 않다. 조정래 감독이 ‘나눔의 집’ 강일출 할머니의 그림 ‘태워지는 처녀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영화화를 결심한 게 10여 년 전이다. 시나리오를 썼지만 제작비 문제로 답보 상태였던 영화는 시민과 재일동포들이 모아준 후원금으로 지난해 간신히 첫 촬영을 시작했다. 이후 네티즌이 모금하는 크라우드 펀딩 등을 통해 약 5억원을 마련했지만 전체 제작비 25억원에는 턱없이 모자란다. 다행히 연극배우 손숙씨가 출연료 없이 위안부 피해 할머니 역을 맡았고, 재일동포 배우들도 출연료 없이(추후 수익이 나면 배부) 연기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 촬영·조명 등 스태프들 상당수도 마찬가지다. 악조건이지만 지난 4월 실내 촬영을 마친 ‘귀향’은 다음달 말까지 경남 거창과 경기도 연천에서의 야외 촬영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다른 내용이었다면 학교를 빠져가면서 출연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하나는 이런 얘기를 남겼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있었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많은데 영화를 보고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할머니들의 억울하고 슬픈 마음을 알게 해주고, 아픔을 함께 느끼게 해주는 영화가 되면 좋겠어요.”

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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