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期一会(이치고이치에) 구마모토의 소중한 인연들 / 박효신(영진전문대 일본어통역과)

 

一期一会(이치고이치에) 구마모토의 소중한 인연들 / 박효신(영진전문대 일본어통역과)

 

2012년 5월 8일, 여름의 문턱에 접어들 무렵인 4개월 전, 바다내음 물씬 풍기는 하카타 항에 처음 발을 내딛었습니다. 두 번째 일본 방문이었지만 왜 그렇게도 떨렸는지요.

인턴십 프로그램 면접을 보고, 기쁜 합격 소식을 전해들을 때까지만 해도, 제 전공인 국제관광계열과 관련 있는 호텔이나 료칸에서 일을 하게 되리라 생각했는데, 생전 처음 들어보는 구마모토라는 도시 이름은 물론, 공공기관에서 3개월 간 인턴 활동을 하게 된다니.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라는 불안한 마음과 늘어나는 걱정들로, 구마모토에 도착하고 나서도 쉽사리 긴장이 풀리지를 않았습니다.

초여름인데도 불구하고 후덥지근했던 구마모토의 5월. 적응하기 힘들던 그 더위 속에서 1개월간의 일본어 연수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습니다. 20명가량 함께 온 인턴십 참가자 외 연수 프로그램 참가 학생들은 구마모토 현립대학, 학원대학, 쇼케이대학의세 대학으로 나뉘어 수업을 받았습니다. 

일본어 문법이나 관용어를 배우는 기본적인 일본어 수업 외에도 서예나 차도체험, 구마모토성, 스이젠지 공원과 같은 관광명소를 견학하는 등 다양한 체험을 통해 이문화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는 구마모토 현립대학에서 한 달간의 연수 과정을 밟았는데, 현립대 일문과 학생들이 직접 준비한 수업을 통해 한국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살아있는 현장일본어를 익혔습니다.

 

일본인 학생들도 타국에서 온 외국인인 저희들을 거리낌 없이 대해주며 작은 것 하나하나 세심하게 챙겨준 덕분에 문화의 차를 넘어 금세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눈 깜짝할 새 시간은 지나가고, 6월 초, 구마모토시 국제교류회관에서 연수 프로그램의 성과발표회가 열렸습니다.

 

제가 속한 현립대학에서는 구마모토 방언으로 ‘사루카니갓센(원숭이와 게의 싸움)’이라는 일본 전통 동화를 현장에서 더빙하는 발표를 준비했는데, 거의 한 달 간 연습을 반복하며 소소한 실수 하나 없도록 완벽을 기했기 때문에 손이 떨릴 정도로 긴장을 했었습니다. 우려와는 달리 평소보다 훨씬 더 나은 결과에 만족하며 일본어 연수를 마무리 짓고, 앞으로 3개월 동안 이어질 본격적인 인턴십 활동을 무사히 해낼 수 있도록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저는 구마모토시 국제교류회관이라는 공공기관에서 인턴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첫 출근도 하기 전에 미리 중요한 일이 하나 들어왔습니다. 6월 중순, 현 내의 중학교에 직접 방문하여 학생들에게 한국을 소개하는 수업을 제가 직접 하게 될 예정인데 사전에 수업 내용을 준비해 둬야했기 때문입니다. 일을 시작하게 되고 나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들이 계속 되었습니다.

 

회관에 출근해서는 제가 주로 업무를 보는 2층의 관리나 DVD 및 도서 대출, 매주 수요일과 일요일에 열리는 외국인을 위한 생활일본어의 준비, 문서 입력, 일본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등 다양한 일들을 하고, 집에 돌아가서는 곧 다가올 수업 자료를 만드느라 잠도 줄여야 했습니다. 일본 사람들 앞에 서서, 일본어로 우리나라의 문화에 대해 설명한다는 건 생각보다 무척 어렵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밤을 새가며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들고, 대본을 적어 몇 번이나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부디 일본 학생들에게 소중한 우리의 문화를 제대로 전달해줄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첫 수업 당일 오전 중에도 교류회관 직원 분께 자문을 구해 수정하고 더해가며 한국에 꼭 오고 싶어지는 발표를 하고자 다짐했습니다. 떨리는 손을 말아 쥐며 정신없이 수업을 마치고 나니 왜인지 아쉬운 점만 자꾸 생각이 나 끝났다는 안도감보다는 다음 수업을 위한 고칠 점들로 머리가 가득 찼습니다.

 

우리나라 학생들에 비하면 소극적이고 말수가 적은 일본 중학생들이었지만 최근 불고 있는 한류의 바람 덕분이었는지, 내내 조용히 앞만 응시하던 아이들이 발표가 끝나자 이것저것 물어오거나 말을 걸어오기도 했습니다. 이후로도 주에 한번 꼴로 몇 번의 수업이 더 있었는데, 누군가에게 자국 문화를 소개하고 알리고자 하는 취지에서 시작한 일이, 어째서인지 제 자신에게 더 큰 공부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평소엔 당연하게 생각하고 써왔던 한글이나 우리나라의 전통놀이, 한복, 명소 등에 대해 자료를 만들기 위해서 조사하고 내용을 외우긴 했지만, 지금껏 몰랐던 사실이 많았던 것에도 적잖이 놀랐고, 좀 더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을 알게 되고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생겨났습니다.

 

중학교 수업과 회관 업무들로 바쁜 나날들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달력은 7월 중순을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큐슈 여행을 떠나고 싶었지만 이미 꽉 차있는 업무 스케쥴로 엄두도 못 내고, 한국에 대한 향수병이 조금씩 찾아올 즈음, 많은 일본 사람들이 저에게 먼저 다가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해주었습니다.

 

교류회관은 평소에도 다양한 나라의 외국인들이나 구마모토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하는 시설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러 사람들과의 교류가 이루어졌습니다. 한국 아이돌을 좋아하는 친구들,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친구들, 한국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친구들, '한국'이란 매개체로 이어진 인연은 문화의 차이도 극복했습니다. 

덕분에 큐슈 여행은 못 가더라도, 일본 친구들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며 밤새 이야기하거나, 구마모토의 여름 축제를 찾아가 구경하고 맛있는 걸 사먹고, 노래방에 가서 K-POP을 부르며 신나게 놀며 어느 때보다 즐거운 여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제가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저를 좋아해주고 함께 해준 친구들에게, 언젠가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명소에 데리고 가서 맛있는 한국 음식들을 먹게 해주며 제가 받은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문화와, 다른 언어, 다른 성격들로 혹여나 부딪히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없었던 저였지만, 일본 사람들은 그런 문제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거리낌 없이 다가와 주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나라이지만 한없이 멀게만 느껴지던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로 관심사를 공유하고, 이야기하며 눈을 마주치다 보니 어느새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있었습니다. 헤어질 날이 아쉽게만 느껴질 정도로 구마모토의 사람들은, 제게 소중한 기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구마모토 생활에 완벽히 적응한 8월 초, 구마모토 최대의 여름 축제인 '히노쿠니 마쯔리(불의 나라 축제)'가 개최되었습니다. 일본의 축제에 참가하는 건 처음이었던 지라 두근대는 마음으로 축제 준비에 임했습니다. 히노쿠니 마쯔리의 가장 큰 묘미는 시청 앞부터 시내 번화가까지 차량과 전차를 모두 통제한 채 그 도로를 시민들이 전통 춤을 추며 행렬하는 광경인데 저 또한 운 좋게 그 행렬에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7월 중순부터 구마모토의 전통 춤인 오테모양을 꾸준히 연습하고, 현립대학의 일본인 친구에게 유카타를 빌려가며 만만의 준비를 했습니다. 일본에서 가장 덥고 습하기로 유명한 구마모토의 여름이었지만 축제 당일 몇 시간씩 이어지는 춤의 행렬에도 사람들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웃고 떠들며 앞으로 전진해나갔습니다. 대만인, 중국인, 영국인, 인도네시아인 등등 세계 각국 사람들이 일본 전통 의상인 유카타를 입고 똑같은 동작으로 춤을 추던 이색적인 모습은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축제의 뜨거운 열기가 가시기도 전에, 8월 10일부터 12일까지 3일간, 제7회 국제 볼런티어 워크 캠프가 구마모토의 웅대한 자연, 아소에서 열렸습니다. 이 워크 캠프는 구마모토 내의 고등학생들과 많은 유학생들이 함께 일곱 개의 주제로 나뉘어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고 토론하며 성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벌써 7회 째를 맞이하고 있는 큰 행사입니다.

 

고등학생들이 실행위원이 되어 기획부터 준비까지 모든 걸 해내는 모습을 보며 스스로 반성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온 대학생 참가자의 통역 담당으로서 3일간 일반 참가자들과 똑같은 일정에 동행하며 다른 친구들과 함께 토론할 수 있는 기회도 가졌습니다. '볼런티어(봉사)'라는 주제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들의 경험담을 듣고, 우리가 무얼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며 보낸 3일 뒤, 제 안에는 어느덧 생각의 가지가 무수히 뻗어나가 녹음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아직 어리니까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안일하고 이기적으로 내 일들만 생각했던 지금까지의 인생이 360도 바뀔 수 있을 정도로, 이번 워크 캠프는 제게 큰 터닝 포인트가 되어 주었습니다.

 

캠프를 무사히 마치고, 계속되는 번역 업무와, 시청에서 의뢰받은 통역 일, 회관에서 개최되는 많은 이벤트를 준비하고 참가하다 보니 시간은 어느새 8월의 끝자락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오기 전까지만 해도 길게만 느껴지던 4개월이었는데 정말 눈 깜짝할 새 시간이 지나가 있었습니다.

 

달력의 날짜를 보며 놀람과 동시에 일순 여태껏 내가 한 게 뭐가 있을까, 하지 못한 건 또 뭐가 있을까 생각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분명 구마모토에 오기 전 계획했던 많은 일들이 그대로 실천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경험들로 매일 매일이 기대되고 즐거웠기에 후회하는 일 같은 건 없습니다.

 

다만, 함께했던 소중한 사람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슬프고 믿기지 않을 뿐입니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큐슈의 덥고 작은 도시 구마모토에서, 저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페이지를 장식한 것 같습니다. 앞으로 또 어떤 나라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 지 예측할 수 없는 현재이지만, 구마모토에서의 4개월만큼은 제게 있어 무엇보다 아름답게 빛날 추억이 될 것입니다.

 

이번 인턴십 활동을 계기로 크게 성장한 현 시점에서 좀 더 분발하여 스스로 만족할만한 위치에 섰을 때, 다시 한 번 구마모토를 찾아 이곳에서의 경험이 나를 자라게 한 자양분이 되어줬노라 말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할 것입니다. 一期一会(이치고이치에). 한 번의 소중한 만남이 앞으로 시작될 날들의 스타트라인이 되어주었습니다. 잊지 못할 꺼에요, 구마모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