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콤플렉스라는 개념은 프로이트의 창작물이 아니다. 프로이트와 함께 여성 히스테리를 연구한 요제프 브로이어라는 정신과 의사가 먼저 사용한 개념이다. 이뿐 아니라 콤플렉스라는 개념을 적극 사용한 이는 프로이트의 제자 카를 구스타프 융이다. 오히려 프로이트 자신은 콤플렉스 개념을 남발하는 제자들을 몹시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콤플렉스 개념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오늘날 콤플렉스는 언제나 프로이트의 이름과 함께 언급된다.
인류문명사를 설명할 때 프로이트의 ‘외디푸스 콤플렉스’처럼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획기적 개념은 없는 까닭이다. 인류문명의 가장 최소단위는 가족이다. 이 가족 내의 아버지, 어머니, 아들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그 뭔가 설명하기 어려운 ‘거시기’한 것을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이 개념으로부터 인류문명사는 물론 개인의 성장과정을 일괄해 설명하고 있다. 이토록 흥미진진한 ‘구라’는 없다.
인간 내면에 설명하기 어려운 것, 콤플렉스
프로이트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꼭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같은 게 실재하느냐고 묻는다. 정말 어려운 질문이다. “당신이 왜 김정운이냐”는 질문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개념’과 ‘실재’는 어느 것이 먼저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 상호 구속의 해석학적 관계에서만 성립한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의 문제와 마찬가지다. 실제로 언어철학에서 객관적 현상이 먼저 존재하고, 언어(혹은 개념)는 이 객관적 현상을 표상(representation)할 뿐이라는 실재론적 입장과 언어로부터 독립적인 실재가 존재한다고 확인할 방법이 전혀 없다는 상대주의적 포스트모던 이론이 양 극단에서 대립한다. 특히 소쉬르에서 롤랑 바르트로 이어지는 후기 구조주의 언어철학은 ‘언어 없는 실재는 없다’는 단호한 입장을 취한다. 언어와 대상의 관계는 그 어떠한 내재적 필연관계도 존재하지 않는, 철저하게 사회문화적 약속일 뿐이라는 전제로부터 소쉬르의 기호학(semiology)은 출발한다[영미권에서는 퍼스의 용어인 세미오틱스(semiotics)라는 용어를 더 많이 쓴다].
명절 때 식구끼리 모여 고스톱을 칠 때 직접 현금을 주고받는 모양이 좀 허접스러워 보여 바둑알로 대신하는 경우다. 검은 바둑알은 만원, 흰 바둑알은 천원이라 하고 바둑알을 나눌 경우 바둑알과 천원, 혹은 만원 사이에는 그 어떠한 내재적 필연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고스톱 판에 참여한 이들 간의 약속일 따름이다. 흰 바둑알을 만원, 검은 바둑알을 천원으로 바꿔도 아무 문제가 없다. 급할 때는 이쑤시개가 부족한 검은 바둑알을 대신하기도 한다. 이렇게 ‘의미하는 것(시니피앙)’과 ‘의미되는 것(시니피에)’ 사이의 지극히 인위적인 사회적 약속이 언어의 본질이라는 거다. 표시와 의미의 결합은 사회문화적 약속이라는 기호학적 전제로 심리학의 역사를 재구성해보면 ‘심리학 개념의 편집사’가 눈에 보인다. 이런 메타적 관점으로 살펴보면 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근대 심리학에서 쫓겨나는지도 바로 알 수 있다.
일반인들에게 알고 있는 심리학 개념들을 말해보라면, 대부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개념들을 떠올린다. 예를 들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무의식, 이드(id), 에고(ego), 수퍼에고(super-ego) 등등.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에디톨로지의 교과서 격이다. 가장 뛰어난 개념편집의 방법론을 보여준다는 이야기다. 이뿐 아니라 다양한 ‘편집의 수준(level of editing)’이 어떻게 통합되는지도 아주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편집의 수준’과 ‘편집의 단위(unit of editing)’를 정하는 일은 에디톨로지의 핵심 영역이 된다.
일단 프로이트는 인간 심리를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눈다. 의식은 무의식이 아주 조금 삐져나온 부분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의식이 무의식으로부터 삐져나오는 그 과정이 아주 다이내믹하다. 이드, 에고, 수퍼에고 사이의 서로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의식은 형성된다. 여기서 ‘이드’나 ‘에고’라 하면 아주 폼 나 보이지만 독일어 원어로는 ‘Es’ ‘Ich’ ‘Uber-Ich’다. 이에 상응하는 영어로 제대로 번역하면 ‘It(그것)’ ‘I(나)’ ‘Over-I(위의 나)’가 된다. 콤플렉스만큼이나 단순하고 일상적인 용어들이다.
프로이트는 이런 단순한 일상어를 정신분석학의 핵심 개념으로 만들어냈다. 보통의 자신감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자신 없는 이들은 아마도 라틴어를 가져오거나 보다 심각해 보이는 용어들을 찾아내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용감했다. 아주 단순한 일상용어로 그 복잡한 정신과정을 편집해낸 것이다. 미국 심리학자들은 이런 프로이트의 원 개념을 그대로 영어로 번역하는 것에 그다지 자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드’나 ‘에고’ 같은 폼 나는 단어를 사용해 학문적 권위를 얻고자 한 것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이란 ‘그것’과 ‘나’, 그리고 ‘위의 나’가 충돌하며 편집된 결과라는 거다. 그러나 이 편집의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밀려난 ‘거시기(콤플렉스)’한 것들이 잠재해 있다가 여러 문제를 만들어낸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또다시 기가 막힌 개념들로 정신분석학적 해석의 지평을 넓혀간다. 구강기 고착, 항문기 고착, 남근기 고착 등등. 이 단어들을 보라. 죽이는 상상력이다.
의식이란 ‘그것, 나, 위의 나’가 편집된 결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개념을 응용해 내가 요즘 지내고 있는 일본의 문화를 해석해보자. 일본인은 청결에 대해 엄청난 강박이 있다. 모든 게 너무 깨끗하다. 음식도 어쩌면 이렇게 정갈할까 싶고, 거리에는 휴지 한 장 찾아보기 어렵다. 왜 일본인은 이토록 청결한 문화를 만들어냈을까? 어떻게든 설명해야 할 것 아닌가.
프로이트 개념을 빌려 해석해보면 아주 흥미로워진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항문기 불안’이다. 모든 문제는 일본의 독특한 가옥구조에서 시작된다. 일본의 가옥은 여름을 견디기 위한 구조다. 유난히 길고 습한 여름을 견디기 위해 통풍이 잘되는 문과 창문, 곰팡이가 슬지 않는 벽, 그리고 시원한 다다미 등으로 집이 지어진다. 이때 다다미는 아이들 양육에 아주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일본인에게 다다미에 습기가 차는 것처럼 불안한 일은 없다. 벌레가 생길 뿐 아니라 다다미가 썩게 된다. 썩은 다다미는 거의 퇴비 수준이다. 따라서 똥, 오줌을 못 가리는 아이는 다다미에 치명적이다. 어느 한 구석에 오줌이라도 지리게 되면 아주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주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배변 훈련을 시켜야 한다. 그러나 지나친 배변 훈련은 아기에게 어떤 식으로든 정신적 상처를 남기게 돼 있다. 프로이트의 개념을 빌리자면 ‘항문기 고착’이라는 퇴행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일본 문화 전반에 나타나는 청결에 대한 이 집요한 강박은 결국 항문기 고착의 성격적 특징이라는 정신분석학적 설명이 가능해진다.
한국의 경우 이런 항문기 고착으로 인한 현상은 별로 볼 수 없다. 장판 문화이기 때문이다. 똥, 오줌을 아무리 싸도 그냥 걸레로 한번 휙 닦아내면 된다. 도무지 심각할 이유가 없다. 대신 한국인은 ‘구강기 고착’의 성격인 듯하다. 입이 거칠다는 이야기다. 목소리도 크고, 욕도 잘한다. 그리고 매우 공격적이다. 욕의 종류를 정리해보면 아마도 세계 최고일 듯하다(그럼 한국인에게는 왜 ‘구강기 고착’의 퇴행현상이 나타날까. 혹시 한국 여성들의 유별난 가슴 성형과도 무슨 관계가 있지 않을까. 이러저러한 가설을 세워보지만 아직까지 그리 흡족한 설명은 없다).
항문기 고착의 일본인과 구강기 고착의 한국인. 내 나름으로는 아주 만족스러운 가설이다. 프로이트의 다양한 정신분석학적 개념들이 없었더라면 도무지 상상도 못할 해석이다. 여기서 누군가 내게 이런 방식의 해석이 객관적으로 맞는가, 틀리는가를 따져 묻는다면 정말 할 말이 없다. 이런 종류의 논의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고 드는 것은 참으로 바보 같은 짓이다. 그런데 바로 이 바보 같은 짓으로부터 근대 심리학은 출발한다. 바로 자연과학을 학문의 모델로 하는 ‘객관성’에 대한 강박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객관성의 과학신화에 전혀 부합하지 못한다. 아주 훌륭한 해석학적 도구지만 그 어느 누구도 이를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일본 문화가 항문기 고착이라는 내 가설을 객관적으로 증명하라면 난 그저 눈만 껌뻑거릴 수밖에 없다. 지극히 자의적인 기호학적 개념체계를 전제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연유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심리학에서 쫓겨나게 된다.
프로이트뿐이 아니다. 과학적 심리학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실험심리학의 창시자 빌헬름 분트 또한 공식적인 심리학사에서 쫓겨난다. 그저 그의 이름만 기억될 뿐이다. 실험심리학은 분트가 추구한 ‘종족심리학(Voelkerpsychologie)’의 극히 일부였을 뿐이다. 분트 또한 프로이트가 그랬던 것처럼 인류 역사의 보편적 전개과정을 인간심리를 통해 설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오늘날 대학에서 가르치는 심리학사에서 분트의 ‘종족심리학’은 그저 이름만 언급될 뿐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었는지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없다.
분트 스스로도 자신의 실험심리학이 철학으로 독립된 학문 분과가 되는 것에는 격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분트는 너무 많은 미국 제자를 배출했다. 독일철학에 적응하지 못한 수많은 미국 유학생은 분트에게서 철학박사 대신 심리학박사 학위를 받아갔다. 미국으로 돌아간 그들은 이곳저곳에 심리학과를 설립한다. 심리학박사 학위를 받은 이들이 철학과를 만들 까닭은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당시 미국은 심리학 같은 학문이 너무도 절실했다.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다양한 이민자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후 심리학은 미국에서 활짝 꽃핀다. 오늘날까지 쭉.
김정운 문화심리학 박사.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와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노는 만큼 성공한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등의 저서와 방송 활동, 특강을 통해 재미와 창조의 철학을 펼치고 있다. cwkim@mj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