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극우 언론인 구로다, 이번엔 '비빔밥 비하'

2009년 12월 28일 (월) 10:45  마이데일리

일본 극우 언론인 구로다, 이번엔 '비빔밥 비하'

[마이데일리 = 한상숙 기자] 일본 산케이 신문 서울지국장 구로다 가쓰히로가 이번엔 한국의 비빔밥을 비하하고 나섰다. 

구로다는 산케이 신문 26일자 9면에 실린 기명 칼럼 시리즈 '서울에서 여보세요'를 통해 "겉으로는 예쁜 모양을 한 비빔밥이지만 실제 먹을 땐 엉망진창의 모습으로 변한다"며 '양두구육'(羊頭狗肉,밖에는 양 머리를 걸어 놓고 안에서는 개고기를 판다는 의미)이라는 표현을 썼다. 

'비빔밥은 괴롭다?'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구로다는 "비빔밥은 일본의 '치라시즈시(ちらしずし, 일본식 회덮밥)' 처럼 처음에는 야채나 계란 등 여러가지 재료가 밥 위에 아름답게 장식된 채 나오지만 이것을 먹을 때는 숟가락을 손에 단단히 쥐고 재료와 밥, 고추장 등을 맹렬하게 섞는다"면서 광고 사진의 이미지와 다르다고 설명했다. 

20년 이상 한국에서 체류 중인 구로다는 "문제는 '비빈다'라는 의미다. 단순하게 '섞는 것'이라기 보다 '뒤섞는다'는 의미가 더 강하다. 이것은 한국인 식습관의 하나로 한국인들은 뭐든지 섞어서 먹는 버릇이 있다. 그 때문에 카레라이스나 자장면, 팥빙수, 규동(일본식 쇠고기 덮밥), 치라시즈시까지 전부 뒤섞어, 반죽시켜 먹어 버린다"라며 한국의 전통음식을 비난했다. 

극우 보수를 대변하는 일본 신문 산케이의 한국 지국장으로 오래 활동해온 구로다는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극우적인 발언과 한국 비하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켜왔다. 

[사진 = MBC '무한도전' 팀이 지난 21일 뉴욕타임즈에 게재한 비빔밥 광고]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press@mydaily.co.kr 


일본인, 태평양전쟁피해 생존자 발을 씻겨주다

일본인, 태평양전쟁피해 생존자 발을 씻겨주다

(서울=연합뉴스) 김병만 기자 = 7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한일 과거사 평화적청산 민간화해 세족식'에서 재한 일본여성들이 태평양전쟁 피해희생자 유족대표들과 생존자들의 발을 씻겨 주고 있다. 2009.12.7

kimb01@yna.co.kr

애 낳으면 150만원 주는 나라

 
2009년 12월 04일 (금) 09:21  시사IN

애 낳으면 150만원 주는 나라

파리에서 버스를 타면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여성을 자주 보게 된다. 좁은 버스에서 유모차가 오르고 내릴 때면 번거롭지만 버스 기사나 승객은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엄마에 대해서 인내심을 발휘한다. 지하철에서도 마찬가지다. 거리 곳곳의 유모차는 오늘날 파리에서 익숙한 풍경이다. 주변 친구들을 보면 결혼을 한 커플이거나 안 한 커플이거나 자녀를 한 명에서 두 명, 심지어는 세 명을 낳기도 한다. 

프랑스의 출산율이 낮다는 말은 옛말이 된 듯하다. 얼마 전 프랑스 국가 조사기관인 INSEE 자료에 따르면, 유럽에서 프랑스는 아일랜드와 함께 출산율이 높은 나라다(여성 1명당 2명 출산). 주변국인 이탈리아·스페인·독일이 여성 1명당 1.4명을 출산한 것에 비하면 훨씬 높은 수치다. 산모의 연령 역시 많아졌다. 2008년 출산 여성의 평균 연령은 30대로 지난 20년 동안 두 살이 더 많아졌다. 또 신생아 21.5%의 엄마 연령이 35세 이상이라고 한다. 결혼이 아닌 동거관계에서 태어난 신생아 수도 전체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베이비 붐 시대와도 무관하게 출산율이 낮은 나라였다. 1994년에는 출산율이 가장 저조해 여성 1명당 1.65명을 출산했다. 이유는 경제위기와 더불어 아이를 3세까지 키우는 데 어려움이 컸기 때문이다. 


출산여성 일자리 지키기에 민·관 협력 


프랑스 정부는 이때부터 출산 장려 정책을 적극 폈다. 출산을 권장하기 위해서는 경제·사회적 정책이 필요하다고 인식한 것이다. 재정 지원과 관련해 프랑스 정부가 지출하는 돈은 830억 유로(약 114조원)로 국내총생산(GDP)의 5%를 차지한다. 이 돈은 가족수당 기금(Caisse d'allocation familial) 및 학교 입학 보조금(Allocation de Rentree Scolaire)을 통해 자녀를 출산한 가정에 지원된다. 예를 들어 아이가 태어나면 탄생 축하금으로 889유로(약 150만원)를 지급한다. 아이가 세 살이 될 때까지 매달 177유로(약 30만원)가 지원되고 여섯 살 때까지 보육에 대한 정부 보조금이 분배된다. 자녀가 세 명이면 600~800유로(100만~140만원)가 지급된다. 또 자녀가 있는 가족의 경우 세금 역시 감세된다. 예를 들어 부모가 아이를 방과 후 수업에 보내면 이를 감안해 세금을 할인해준다. 프랑스의 높은 세금 규모를 생각해볼 때 감세는 자녀가 있는 가족에게 큰 도움이 된다. 

 



 
정부의 강력한 재정지원,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인정한 것이 프랑스 출산율을 높였다. 위는 부모와 함께 등교하는 프랑스 어린이들. 

그런데 프랑스의 출산율 증가는 정부의 재정 지원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프랑스 인구연구기관(Inde) 디렉터인 프랑스 프리우 씨에 따르면 '여성의 직장과 출산 지원의 일치'가 바로 출산율 증가의 동력이라고 설명한다. 즉 일하는 엄마의 육아 부담을 분담해 여성이 일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지원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예를 들어 자녀를 둔 여성의 파트타임 근무, 출산 이후 아내 및 남편의 육아휴직 등이 이에 해당된다. 또 각 자치구뿐만 아니라 회사에서도 놀이방을 운영해 여성이 자녀를 양육하는 어려움을 덜어준다. 프랑스 회사의 경우 의무적으로 임금 총액의 5.4%를 육아 분담금으로 지급해야 한다. 이 금액은 GDP의 1%에 해당한다. 

출산율 증가의 또 다른 원인은 변화된 가족 제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이제 결혼이 가족을 구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제도가 아니다. 혼외 관계에서 탄생한 아이들도 결혼한 부모에서 태어난 아이와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는다. 


동거 인정하면서 출산율 급증 


프랑스의 커플 형태로는 결혼·동거 그리고 합법적 동거(팍스·PACTES)가 있다. 팍스라고 불리는 이 제도는 1999년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만들었는데, 결혼을 하지 않은 커플도 간단한 신고만으로 결혼과 같은 사회적 권리를 부여받는다. 결혼한 커플과 마찬가지로 의료보험, 자녀 양육, 집 계약, 사망 시 재산 상속 등 사회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장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제도가 실시되면서 30만명에 이르는 커플이 결혼이 아닌 팍스를 신청하게 됐다. 이 제도는 이제 일반 커플에서 동성애 커플에게까지 적용되는 추세다. 이처럼 동거를 법적으로 인정한 가족제도 변화가 아이러니하게도 출산율을 높였다. 1970년대만 해도 혼외 출산이 10%였는데 2008년에는 52%에 이른다. 결혼과 비결혼에서 탄생한 아기 사이의 불평등이 없어지면서 혼외 출산이 사회적 관습에 어긋난다는 인식에서 일상화한 풍경으로 바뀐 것이다. 

출산율 증가의 또 다른 원인은 이민이다. 프랑스에 이민 온 외국인들의 출산율은 높은 편이다. 1998년 국제결혼을 통해 태어난 신생아가 8%였다면 지금은 12.7%에 이른다. 또 외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기 수는 6.9%다. 즉 신생아 가운데 대략 20%가 외국인 커플이거나 국제결혼 커플의 자녀인 셈이다. 

그렇다면 프랑스 정부가 출산 정책에 주목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사회의 고령화 문제 때문이다. 현재 출산율이 높다고는 하지만 프랑스 사회의 고령화 추세는 여전히 심각하다. 75세 이상 노인층이 전체 인구의 7.5%에 달한다. 특히 지난 10년 동안 노인층의 증가 속도는 전체 인구 증가 속도보다 5배나 빠르다. 문제는 사회의 고령화 추세가 세대 간 분배로 이뤄지는 은퇴 시스템의 존속을 위협한다는 점이다. 결국 젊은 세대가 늘어나 사회·경제 활동력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최근 출산율 증가세가 다시 주춤해질 만한 상황이 발생했다. 바로 경제위기 때문이다. 실업률 증가와 수입 감소,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가족 늘리기 계획에 큰 걸림돌로 작용한다. 경제적 후퇴가 출산율 저하로 이어진 과거 사례는 이 같은 우려를 뒷받침한다. 1930년대 경제대공황 때 낮은 출산율을 기록한 적이 있다. 또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1993년 경제 후퇴 때 출산율이 가장 떨어졌다. 

파리·최현아 편집위원 / 

‘한강 기적’… 반세기만에 베풂으로 갚다

 
한국, OECD 개발원조委 가입] 원조로 일군 ‘한강 기적’… 반세기만에 베풂으로 갚다
[서울신문]여기 한 나라가 있다. 반세기 전 이 나라는 세계에서 제일 못사는 축에 속했다. 

하루 세 끼를 제대로 챙겨 먹는 집안이 거의 없었다. 도시락을 못 싸가는 학생이 부지기수였다. 겨울에는 차가운 수돗물을 데워 씻었다. 연탄가스 중독의 불안을 베고 갈라진 구들장 위에서 고단한 잠을 청했다. 

●DAC, 세계 원조 90% 담당 

이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에 단비 같은 도움의 손길들이 들어왔다. 잘사는 나라들이 건네준 돈으로 이 나라는 호구(糊口)했고, 먹고 살 기반을 마련했다. 다행히 이 나라 국민은 부지런했다. 좋은 지도자를 만났을 때 이들의 근면성은 무지개처럼 피어났다. 꽃다운 처녀들이 손이 부르트도록 밤새워 재봉틀을 돌렸다. 한창 멋부릴 나이의 청년들은 공장에서 손가락이 잘려 가면서 일했다. 

앞만 보고 달리다 돌아보니 이 나라는 어느새 세계 13위권의 경제강국이 돼 있었다. 이 나라는 가난할 때 받은 도움을 이제 다른 어려운 나라에 돌려줄 때라고 생각한다. 원조를 받은 나라가 주는 나라가 되는 경우는 지구상에서 이 나라가 유일하다. 바로 대한민국이다. 

한국인이라면 25일 마음껏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해도 좋다.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산하 개발원조위원회(DAC)의 회원으로 공식 가입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1961년 설립된 DAC는 선진국 클럽인 OECD 30개 회원국 가운데 원조 규모가 큰 23개 나라가 가입한 '선진국 중의 선진국 모임'이다. 

세계 원조의 90% 이상을 제공하는 '기부국 클럽'이다. 한국이 가입하면 24번째 회원국이 된다. 가입 여부는 기존 회원국들이 이날 프랑스 파리 OECD 본부에 모여 결정하는데, 한국의 가입은 기정사실이라고 외교통상부는 24일 밝혔다. 

가입 조건은 공적개발원조(ODA) 총액이 연간 1억달러를 넘거나 국민총소득(GNI) 대비 ODA 비율이 0.3%를 넘어야 한다. 한국의 ODA 지출은 2005년 7억 5200만달러로 GNI의 0.1%를 넘어섰다. 

정부는 ODA 비율을 2012년 0.15%, 2015년에는 0.25%까지 지속적으로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한국이 지금까지 제공한 원조 총액은 48억달러다. 

반면 1945년 해방 이후 1995년까지 한국이 국제사회로부터 받은 원조액수는 127억달러다.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600억달러(70조원)에 해당한다. 한국은 1995년 비로소 세계은행의 원조대상국 신분을 벗어났다. 그리고 200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돕는 나라로 변신했다. 

우리도 어려운 사람이 많은데 남을 도울 여력이 있느냐는 소리가 나올 수도 있다. 외교부가 지난해 8월 국민 5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72%는 '한국의 대외원조가 국익에 기여한다.'고 평가하면서도 '원조 규모를 늘려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현 수준 유지'(53%) 또는 '줄이거나 중단해야 한다.'(28%)는 이율배반적 태도를 보였다. 

●한국, 24번째 가입 영예 

하지만 원조는 우리 자신을 돕는 일도 된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베풀지 않는 부자가 자린고비로 지탄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도 평소에 국제사회에서 인심을 얻어놓지 않으면 낭패를 볼 수 있다는 지적이다. 

천영우 외교부 제2차관은 "궂은일은 모른 척하고 이득이 되는 일에만 뛰어든다면 어떤 나라가 좋아하겠느냐."면서 "DAC 가입은 국가 이미지와 품격을 격상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했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일본인 유가족,통곡도 원망도 없이… 혈육 흔적만 찾아

 
2009년 11월 18일 (수) 18:42  국민일보

일본인 유가족,통곡도 원망도 없이… 혈육 흔적만 찾아

참사 발생 4일 만인 18일 공개된 부산 중구 신창동 실탄사격장 화재 현장에 들어선 일본인 피해자 가족들은 흐르는 눈물을 삼키려는 듯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조용히 혈육의 유품을 확인하는 그들의 손길은 떨렸지만 목 놓아 울지 않았고 소리치며 한국 당국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40분가량 진행된 현장 공개를 마친 이들은 조용한 걸음으로 처참한 현장을 빠져나와 소리 없이 버스에 올랐다. 

이번 사고로 숨진 이나다 아츠노부(37)씨의 부인은 "도와주신 일본과 한국 정부, 부산시에 감사한다"며 오히려 다소곳이 머리를 숙였다. 

이들을 인솔한 일본영사관 직원들은 몰려든 취재진이 피해자 가족들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숨진 가족의 흔적을 찾는 이들이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영사관 관계자는 "유가족들은 자세히 유품을 확인했고 평상심을 잃지 않았다"고 전했다. 

함께 현장을 찾았던 부산시 관계자는 "가족을 삼킨 이국에 원망과 격한 감정을 품었을 만한데도 눈물만 뚝뚝 흘리며 평정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듯했다"면서 "슬픔을 참는 모습이 주위 사람들을 더 숙연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일본인 유가족들과 사고 수습을 위해 매일 대면했던 대책본부 관계자는 지금까지 고함 한번 들린 적이 없었다고 전했다. 사고 원인을 꼭 밝혀 달라는 이들의 요구엔 항상 예의가 동반됐다. 이들의 목소리는 낮기만 했다. 

대책본부 측이 보상 문제를 꺼내면 이들은 시신이 훼손되지 않도록 해 달라는 부탁을 먼저 했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유족들은 처음엔 단호한 표정으로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고 원인 규명에 필요하다는 설명을 듣고는 곧바로 경찰에 적극 협조했다. 한 경찰관은 "냉정하다 할 정도로 침착한 그들이 몰래 한쪽 구석에서 혼자 눈물 흘리는 걸 보면 정말 뭐라도 도와주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유족들은 19일 오후 5시50분 가족의 유해와 함께 김해국제공항에서 대한항공 전세기편으로 귀국한다. 이들의 4박5일 한국 체류는 절제와 질서가 있는 슬픔이 더 아름답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부산=조원일 기자 wcho@kmib.co.kr 

2천억대 소주담합 과징금 예고.."어느 장단에 맞추란거냐"

2천억대 소주담합 과징금 예고.."어느 장단에 맞추란거냐"
공정위, 11개 소주업체에 2263억 과징금 의견
업계 반발.."국세청 행정지도-공정위 담합조사 모순"
입력 : 2009.11.18 14:10
 
[이데일리 이성재 안승찬기자] "같은 정부 아래서 어느 부처는 소주 가격 인상에 대한 행정지도를 하고, 어느 부처는 행정지도를 받아 가격을 인상한 업체를 담합이라고 몰아가니 어느쪽에 서야 할 지 모르겠다."

이종진 한국주류산업협회 상무는 18일 전화 통화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이 상무는 "아직 소주업체들이 가격을 담합했는지 정확히 판명이 나지 않는 시점에마치 소주업체들의 담합이 이뤄졌다는 식의 분위기가 나오는 것은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공정거래위원회가 각 소주업체에게 보낸 심사보고서에 명기된 과징금은 부당한 금액으로, 지방 중소 소주업체들은 문을 닫으라는 처사"라며 반박했다.

이와 관련 공정위는 지난 12일 11개 소주업체들에게 총 2263억원에 달하는 과징금을 산정해 통보했다. 지난 2006년부터 3년간 진로와 롯데, 지방소주사들이 가격담합에 의해 부당 이익을 챙겼다는 것이다.

회사별로는 진로(000080)가 1162억원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두산이 246억원, 지난 3월 두산으로부터 `처음처럼`을 인수한 롯데주류도 99억원의 과징금을 부과 받았다.

지방소주 업체로는 부산의 대선주조가 206억원, 금복주 172억원, 무학 114억원, 선양 102억원이었다. 이밖에 보해 89억원, 한라산42억원, 충북 19억원, 하이트주조 12억원의 과징금을 각각 부과 받았다.

이 상무는 "통상적으로 소주 가격을 인상할 때 업계 1위인 진로가 국세청으로 부터 가격인상에 대한 행정지도를 받고 있다"며 "나머지 업체들은 진로의 가격 인상 여부에 따라 평균적으로 같은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미 가격인상 전 국세청과 사전 조율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실제 지방소주사들은 50%의 시장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진로보다 가격을 달리 할수 없는 입장이다. 업소 가격과 소비자 가격 등 그동안 진로의 인상 수준을 따르는 것이 업계의 통상적인 관례였다. 

이 상무는 "소주의 경우 그동안 MB물가 52개 품목에 적용되면서 물가 상승률보다 낮게 가격인상이 이뤄졌다"며 "만약 공정위가 조치가 과할 경우 고등법원에 항소하는 등 모든 법률적인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공정위 관계자는 "심사보고서 상에 있는 과징금 등은 심사관의 의견이지, 공정위의 공식적인 제재 수위가 아니다"며 "제재 수위는 전원회의에 상정돼 최종 결정될 것이다"고 말했다.

공정위의 행정 조치는 심사관이 가격 담합에 대한 조사 후 각 기업에게 심사보고서를 통보한 후, 기업이 심사보고서에 대한 자사의 의견이 담은 `의견서`를 2주안에 제출하도록 되어 있다. 이 후 공정위의 상임위원들이 전원회의를 거쳐 과징금이 부과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기업이 1차 심사에 불복할 경우 고등법원에 항소할 수 있다.

현재 11개 소주업체의 대내외적인 공식 창고 역할을 담당하는 한국주류산업협회는 소주업체들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26일로 정해진 의견서 제출을 연기 신청한 상태다.
 
이데일리 이성재 shower@

외계생명체에 관심 갖는 로마교황청

2009년 11월 11일 (수) 10:40  연합뉴스

외계생명체에 관심 갖는 로마교황청

(바티칸시티 AP=연합뉴스) 로마 교황청이 외계 생명체의 존재 여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교황청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모아 학술회의를 열고 외계생명체의 존재 가능성과 그 신학적 의미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교황청 천문대장 호세 가브리엘 푸네스 신부는 5일 간 계속된 이 회의 결과를 10일 결산하는 자리에서 "생명의 기원과 지구 밖 어딘가에 생명체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매우 적절하고 진지하게 검토해 볼 만한 사안"이라고 말했다. 

이번 회의에는 천문학과 물리학, 생물학 및 여타 분야 전문가 30명이 모여 새로운 학문으로 대두하고 있는 우주생물학의 핵심 분야인 생명의 기원과 외계 생명체의 존재 문제를 토론했다. 

예수회 신부로 천문학자이기도 한 푸네스 신부는 외계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이 "철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는 이번 회의에서는 과학적 시각에만 초점을 맞췄으며 각기 다른 학문이 이 분야 연구에 어떻게 협동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지가 주로 논의됐다고 밝혔다. 

미국 애리조나대학 천문학교수 크리스 임피는 교황청이 이런 학술회의를 주최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말했다. 

그는 "우주생물학 분야 연구자들과 생물학적 우주에서의 존재의 의미를 묻는 사람들 사이에는 대화를 할 수 있는 여지가 풍부하다"고 강조했다. 

이번 회의에 참가한 전문가들은 "(지구 외의) 다른 세상에 감각력을 가진 생명체가 존재하는 지"에 연구의 초점을 모을 것을 촉구했다. 

과학자들은 이미 태양계 바깥에서 수백개 행성을 발견했으며 임피 교수는 외계 생명체의 존재가 몇년 안에 확인될 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생명체가 지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알려지거나 혹은 지구 외의 어떤 곳에 인간과는 다른 생물.화학적 구성을 가진 생명체가 있다거나 또는 지능이 있는 생명체와 접촉하게 된다면 인간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엄청난 파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푸네스신부는 외계에서 지능있는 존재가 발견된다면 이도 역시 "창조의 한 부분"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말했다. 

maroonje@yna.co.kr 

오바마, 일왕에 90도 인사 논란

 
2009년 11월 16일 (월) 03:16  연합뉴스

오바마, 일왕에 90도 인사 논란

(워싱턴=연합뉴스) 고승일 특파원 =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아시아 4개국 순방의 첫 방문지인 일본에서 아키히토 일본 국왕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한 것을 놓고 미국내에서 한때 논란이 일었다. 

발단은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 14일 아키히토 일왕을 예방하면서 90도에 가깝게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한 장면을 놓고 미국의 인터넷 매체인 `드러지 리포트'가 "오바마, 일왕 앞에서 고개를 숙이다"라고 보도한데서 비롯됐다. 




드러지 리포트의 기사는 LA타임스 블로그에 `그(오바마)는 어디까지 저자세로 갈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연결돼 파문이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드러지 리포트의 기사는 "허리를 깊게 숙인 인사는 윗사람에 대한 커다란 존경심과 경의를 나타내는 표시지만, 미국에서는 곧은 자세로 악수를 하는게 더 좋게 보일 수도 있다"면서 딕 체니 전 부통령이 과거에 똑바로 선 자세로 일왕과 악수하는 사진을 실었다. 

기사는 또 더글라스 맥아더 전 유엔군총사령관이 아키히토 일왕의 부친 히로히토 일왕 옆에서 뒷짐을 진채 찍은 흑백사진도 함께 올려, 오바마 대통령의 `90도 인사'가 저자세임을 부각시켰다. 

이에 대해 미국 행정부 고위관리는 "오바마 대통령은 단지 외교적 의례(protocol)을 지켰을 뿐"이라며 "이 문제를 정치쟁점화하려는 사람들은 본질에서 한참 동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 관리는 "오바마 대통령이 일본에서 행한 연설과 이에 대한 반응, 또 (미.일 정상의) 양자회동의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이라면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의 위상을 끌어올렸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이번 방일은 중요한 시기에 이뤄진 훌륭한 방문이었다"고 반박했다. 

ksi@yna.co.kr 

<기여외교 시대> 받는 나라서 주는 나라로

 
2009년 11월 15일 (일) 09:02  연합뉴스

<기여외교 시대> 받는 나라서 주는 나라로

※우리나라가 오는 25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산하 개발원조위원회(DAC) 특별회의에서 '선진국 중의 선진국'으로 불리는 DAC에 가입할 것이 확실시되고 있습니다. 1945년 해방 이후 국제사회로부터 현재가치로 총 600억달러의 도움을 받았던 한국이 이제 도움을 '주는' 나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하는 것입니다. 연합뉴스는 이에 따라 DAC 가입의 의미와 과제, 주요국 사례와 함께 유엔평화유지활동(PKO) 등 군사적 기여 현황과 전망을 같이 짚어주는 < 기여외교 시대 > 특집을 준비했습니다. 

(서울=연합뉴스) 이우탁 기자 = 우리나라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산하 개발원조위원회(DAC) 가입은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을 새롭게 하는 외교적 의미가 있는 '사건'이다. 

한국전쟁 직후 절대빈국의 상태에서 국제원조로 연명하던 나라가 실질적 원조공여국으로 전환한다는 의미로, 한마디로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DAC는 개발도상국에 대한 원조활동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OECD 산하에 설립된 위원회로, 일정한 원조수준(공적개발원조 총액 1억 달러 이상 또는 국민순소득 대비 0.2% 초과)이 충족돼야 가입할 수 있다. 

한국은 1996년 OECD에 가입했으나 그동안 산하 25개 위원회 가운데 DAC에만 참가하지 못했다. 현재 OECD 회원 30개국 가운데 DAC에 가입하지 않은 나라는 한국과 슬로바키아, 체코, 폴란드, 헝가리뿐으로 우리나라가 가입할 경우 DAC의 24번째 회원국이 된다. 

DAC가 신규회원국을 받아들이는 것은 1999년 그리스에 이어 10년 만으로, 그만큼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은 2015년까지 국민순소득(GNI) 대비 ODA 비율을 0.25%로 올린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우리나라가 공적개발원조(ODA) 가운데 유상원조 비율이 높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DAC 가입을 성사시킨 주요 원인도 이 목표 때문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GNI 대비 ODA 비율 0.25%라면 적지 않은 규모다. 
2005년 한국의 ODA 지출은 7억5200만달러로 처음으로 GNI의 0.1%를 넘어섰다. 그로부터 10년후인 2015년 한국의 GNI 규모가 얼마나 될지 구체적으로 예측할 수는 없지만 산술적으로 2005년의 2.5배에 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적어도 30억 달러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정도면 경제규모 세계 13위의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 기준을 충족하면서 국격을 높이는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외교부 당국자들은 보고 있다. 

한 당국자는 15일 "DAC 가입국을 '선진국 중의 선진국'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국제사회에서의 책임을 다하고 있다는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DAC 가입은 불과 얼마전만해도 국제 원조에 연명하던 나라가 급속성장을 통해 화려한 변신을 한 사실상 세계에서 유일한 사례라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사실 세계 2차대전 후 원조를 받은 대부분 국가는 내부의 분열과 집권층의 부패 등으로 국력성장의 기회를 잡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1945년 해방 이후 1990년대 후반까지 한국이 국제사회로부터 받은 원조액수는 모두 127억달러에 달한다. 당국자들은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600억달러(약 70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이 돈은 정부가 추진한 다양한 사업에 투입됐고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경제개발의 종자돈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은 1995년 세계은행의 원조대상국 명단에서 제외되면서 이른바 수원국(受援國)의 지위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지난해말 한국은 한해에 9천350억원을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 등의 개발도상국에 지원하는 원조 공여국이 됐다. 

게다가 한국은 DAC 가입국 중 가운데 유일하게 개도국 경험을 가진 나라라는 점에서 단순하게 돈을 지원하는 것에서 넘어 '원조 공여국과 수원국간의 연결고리'라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이렇게 보면 한국의 DAC 가입은 내년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 개최결정과 함께 한국의 국제사회에서의 높아진 위상과 국격을 확실하게 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DAC 가입을 계기로 한국이 개발도상국들을 지원하는 유.무상 원조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대책 마련에도 주력해 나갈 방침이다. 

lwt@yna.co.kr 

`한일청구권협정' 헌재 심판대 오른다

`한일청구권협정' 헌재 심판대 오른다

미불임금 피해자 "개인재산 보호원칙 위배" 

(서울=연합뉴스) 차대운 기자 = 국가가 경제협력 대가로 국민들의 대일본 청구권을 일방적으로 소멸시킨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 조항이 헌법재판소의 심판을 받게됐다.

일제 징용 피해자들은 일본에서 받아오지 못한 `미불임금'을 돌려주거나 정당하게 보상해달라는 소송을 일본과 한국 법원에 잇따라 냈으나 청구권협정 조항에 걸려 번번이 패소했다.

13일 헌재에 따르면 일제시대 강제 징용으로 부친을 여읜 이윤재씨는 개인 청구권을 소멸시킨 한일청구권협정 2조1항이 국민의 재산권을 보장한다고 규정한 헌법에 반한다며 헌법소원을 냈다.

2조1항에는 "양 체약국은 양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을 확인한다"는 취지의 내용이 담겨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정부는 한국인들이 일본 기업들로부터 받지 못한 임금을 포기하는 등 양국의 과거청산 대가로 5억달러를 들여와 포항제철(현 포스코) 설립 등 경제재건을 위한 사회간접자본(SOC) 투자에 썼고 징용 피해자들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

이씨는 헌법소원 청구서에서 "국가와 별도인 개인으로 하여금 가해자인 일본 정부 및 기업에 재산권을 주장할 수 없도록 함으로써 본질적 권리를 침해해 헌법상 과잉금지의 원칙에 정면으로 반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 공탁소에 보관돼 있는 미불임금을 1엔당 2천원씩으로 계산해 `위로금'을 주도록 한 태평양전쟁강제동원희생자지원법 조항의 위헌 여부도 가려달라고 요청했다.

일제에서 해방된 1945년과 지금의 금값이 약 14만배의 차이가 나는데 이 같은 물가 상승분을 전혀 반영하지 못해 정당한 보상이 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씨의 경우 부친이 받지 못한 일본 내 공탁금은 5천828엔이어서 정부가 정한 위로금은 1천165만원 가량인데 실제 물가 상승분을 반영하면 이보다 훨씬 액수가 커지게 된다.

현재 일본에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지급되지 않은 미불임금 3억600만엔이 공탁돼 있는데 이는 공탁 당시인 1945년 직후의 액면가여서 학계 등에서는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우리 돈 3조∼4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씨는 부친의 미불임금에 관한 위로금 결정 방식에 문제가 있다며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냈으나 최근 서울행정법원은 관련법에 1엔당 2천원을 주도록 한 명문 조항이 있는 만큼 태평양전쟁강제동원희생자는 재량권이 없다는 취지로 원고패소 판결하고 원고가 낸 위헌법률심판제청 신청도 각하했다.

setuzi@yna.co.kr

친일인명사전 편찬위 발표

조선·동아 창립자 친일인사로 수록
친일인명사전 편찬위 발표 "장지연도 일본 천황 미화"
 
2009년 11월 09일 (월) 04:22:32 조현호 기자
 
조선·동아일보 창립자와 '시일야방성대곡'의 필자 장지연, 박정희 전 대통령, 장면 전 총리 등 주요인사들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됐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위원장 윤경로)는 8일 오후 2시 서울 숙명여대 내 숙명아트센터에서 친일인명사전(전3권) 발간 국민보고대회를 통해 이들을 포함해 1차로 4389명의 친일행위자를 수록했다고 밝혔다.
친일인명사전에 조선·동아일보 창립자, 박정희, 장지연 등 수록
편찬위는 이날 발표된 명단에 수록된 고려대와 동아일보 창립자 김성수(호 인촌·전북 고창 생·1891∼1955) 전 부통령에 대해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고, 같은해 10월 조선총독부로부터 경성방직 설립 인가를 받은 뒤 이듬해(1920년) 7월부터 동아일보 사장으로 일했다"며 "동아일보를 매개로 물산장려운동에 참여(1922년 11월부터)했고, 1923년 3월 조선민립대학기성회 회금(會金)보관위원으로 활동했다"고 설명했다.
   
  ▲ 동아일보 창립자인 고 인촌 김성수. ⓒ인촌기념회 홈페이지  
 
편찬위는 김 전 부통령이 동아일보 사장·취체역과 보성전문학교 교장(1932년 3월∼35년 6월)으로 1936년 11월 '일장기말소사건'의 여파로 동아일보 취체역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복귀를 거듭했지만 △1937년 7월에 일어난 중일전쟁의 의미를 널리 확산시키기 위해 마련된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시국강좌를 7월30일과 8월2일 이틀 동안 담당했고 △같은 해 8월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했으며 △같은 해9월 학무국이 주최한 전조선시국강연대의 일원으로 춘천·철원 등 강원도 일대에서 시국강연에 나선 것 등을 지적했다.
편찬위에 따르면 김 전 부통령은 이후에도 1938년 7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에 참여하고 이사를 맡았고, 8월엔 경성부 방면위원, 10월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국민생활개선위원회 의례 및 사회풍조쇄신부 위원에 임명됐다. 1939년 4월엔 경성부내 중학교 이상 학교장의 자격으로 신설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참사를, 1941년 5월 조직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 및 평의원을, 8월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 위원 및 경기도위원을 지낸 데 이어, 9월엔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에 참여하고 10월에 감사로 뽑혔다. 1941년엔 조선방송협회 평의원과 조선사회사업협회 평의원도 겸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위 발표…"인촌 김성수, 조선임전보국단 감사·징병격려 등 친일행위"
김 전 부통령은 조선의 징병제 실시가 결정된 이후 1943년 8월5일자 <매일신보>에 "문약(文弱)의 고질(痼疾)을 버리고 상무기풍을 조장
하라"는 징병격려문을 기고해 "징병제 실시로 비로소 조선인이 명실상부한 황국신민으로 됐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11월 6일자 <매일신보> 석간에 '대의에 죽을 때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라는 글을 통해 "대동아 성전에 대해 제군과 반도 동포가 가지고 있는 의무"를 강조했다. 이밖에도 김 전 부통령은 징용을 촉구(경성일보 같은해 11월20일자)하고, 군인원호사업에 힘쓸 것을 강조(12월7일자)하는 글을 게재하기도 했다. 해방 후 김 전 부통령은 1945년 9월 미군정청 한국교육위원회 위원으로, 10월 미군정청 한국인고문단 의장으로 활동하다 이듬해 1월 다시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했고, 송진우의 사망으로 공백이 된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로 선출됐다. 민주국민당 창당(1949년)에 이어 대한민국 부통령(1951년 6월)에까지 올랐고, 박정희 정권(1962년) 땐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에 추서됐다.
   
  ▲ 고 계초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조선일보가 방씨 일가의 조선일보로 자리매김하게 하고, 사실상 현재의 조선일보 창립자로 평가받는 방응모(호 계초·평북 정주생·1883∼?) 전 조선일보 사장도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편찬위에 따르면 방 전 사장은 대서업·여관업·동아일보 정주지국장·조선민립대학 기성회 정주지방부 상무위원을 하다 금광개발에 뛰어들어 1924년 평북 삭주의 교동광업소를 인수, 굴지의 광산업자(교동광산)로 성장한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일했다. 방 전 사장은 이듬해 조선의 경영권을 인수, 부사장에 취임한 뒤 조선군사령부 애국부에 고사기관총 구입비로 1600원을 헌납하고 7월 사장에 올랐다. 
이후 방 전 사장은 조선총독부와 군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인과 일본인 합작으로 만들어진 대아시아주의 황도사상단체인 조선대아세아협회 상담역에 추대되기도 했다(1934년 3월).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조선중앙일보가 각각 정간과 강제휴간(1936년 8월)을 당하자 조선일보는 전국적으로 발전자축회를 개최하는 등 이를 사세 확장의 기회로 이용했다고 편찬위는 분석했다. 또 방 전 사장은이북 지역을 돌며 강연회와 좌담회를 열면서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한다고 강연해(1937년 2월) 참석자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고 편찬위는 전했다.
"계초 방응모, 일제 침략전쟁 옹호 활동"
 
방 전 사장은 중일전쟁 개전 직후 조선일보 간부회의(1937년 7월11일)에선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 씨'라는 용어 대신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으며, 이후 지면도 총독부로부터 '국민적 입장'으로 변했다는 평을 받았다고 편찬위는 지적했다. 방 전 사장은 같은 해에 '경성군사후원연맹 위원' '일제 침략전쟁 정당화 강연(경성방송국)' '지나사변(중일전쟁)과 제국의 결의 강연' 등 일제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활동을 왕성하게 펼쳤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 '경성연맹 창립총회 상담역'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 '경성부지원병후원회 고문' 등에도 추대됐다. 일제 말기엔 조광 발행인으로 취임(1940년)한 뒤 "안으로는 신체제의 독립, 밖으로는 혁신 외교정책을 강행하여 하루바삐 동아 신질서 건설을 완성해 세계의 신질서를 건설하고 나아가 세계 영구평화를 기도"하기 위해 "국민은 이 선에 따라 행동하고 생활"해야 한다는 글을 쓰기도 했다.(<조광> 1940년 11월호).
해방 이후 방 전 사장은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 고문(1945년 8월말)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9월초)으로 활동했지만 우파단체인 대한국민총회 발기인,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 등으로 활동했고, 이듬해 2월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 등을 지내다 한국전쟁 중에 납북됐다.
이번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면서 가장 주목됐던 인물은 박정희(경북 선산 생·1917∼1979) 전 대통령이다. 편찬위가 최근 밝힌 그의 친일행적은 괴뢰국 만주국에서 발행되던 <만주신문> 1939년 3월31일자에 '혈서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로부터'라는 글에 기록돼있다. <만주신문>은 박 전 대통령이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이라고 쓴 편지내용을 미담으로 소개했다.
이 신문이 보도했을 땐 만주군관에서 떨어졌지만 재도전 끝에 입교된 박 전 대통령은 1944년 12월23일 일본군 소위로 예비역으로 편입됨과 동시에 만주국군 보병 소위로 임관했으며 보병 8단 단장의 작전참모 역할을 했다. 이듬해 7월 만주국군 중위로 진급했으나 일본의 패망이후 무장해제된 뒤 자신이 소속됐던 8단을 떠나 광복군으로 합류했고, 미국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했다. 
박정희, 혈서로 일본군지원·남로당첩자·쿠데타 '눈부신 변신'
   
  ▲ 박정희(가운데) 전 대통령. ⓒ연합뉴스  
 
편찬위가 기재한 박 전 대통령의 이후 행적은 거의 극과 극을 오가는 '눈부신' 변신의 연속이었다. 
조선국방경비대 육군소위(46년 12월)→남로당 군내부 조직원 추정→육군사관학교 소령(47년 8월)→남로당 군 내부 프락치로 체포(48년 11월11일)→형집행정지(사형) 및 파면(49년 4월18일)→한국전쟁 중 육군본부 작전정보국 1과장으로 복귀→준장 진급(53년 11월)→7사단장(57년 3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2군 부사령관(60년 12월)→군사쿠데타(61년 5월16일)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저격을 받고 사망한 박 전 대통령에 대해 김영삼 대통령 재임 당시 5·16군사쿠데타는 불법이라고 공식 규정됐다.
이밖에도 편찬위는 1960년 4·19 혁명으로 집권해 총리에 올랐다 1년 여 만에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를 당한 장면(호 운석·서울 생·1899∼1966) 전 총리에 대해서도 친일인명 사전에 올렸다. 장 전 총리는 조선지원병제도제정축하회 발기인(천주교측 대표·1938년 2월), 경성부 정회준비위원회 역원전형준비위원(9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산하 비상시국민생활개선위원(10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1939년 5월), 천주교청년회연합회 회장(9월)을 지냈고, 국방헌금을 내기도 했다(1940년 7월).
1905년 을사늑약 때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송대곡'이라는 통한의 사설을 게재했던 장지연(호 위암·경북 상주 생·1864∼1921) 전 황성신문 사장도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시일야방성대곡 장지연도 일본 천황가 미화
   
  ▲ 고 위암 장지연 전 황성신문 사장. ⓒ연합뉴스  
 
편찬위는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해 <매일신보> 1914년 12월23일자부터 1918년 12월까지 4년 여 동안 장 전 사장의 실명으로 연재된 '고재만필(古齋漫筆)-여시관(如是觀)'과 한시 등 700여 편의 글을 들었고, 이 가운데 조선총독부의 시정을 미화하고 옹호하는 글이 실려있었다고 지적했다.
한 사례로 장 전 사장은 1915년 4월3일 '신무천황 제일(神武天皇祭日)'을 맞아 같은 날짜 <매일신보>에 일본 천황가의 계통을 소개하면서 "신무는 영웅의 신명한 자질로 동정서벌(東征西伐)하고 나라를 세워 자손에게 전해 주었으니, 지금에 이르도록 2576년간을 123대 동안 황통(皇統)이 길이 이어지고 있다"며 "이른바 만세일계(万世一系)란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주장했다고 편찬위는 소개했다.

추월당한 전자대국...일본의 충격

추월당한 ‘전자대국’ … 일본의 충격
아사히·닛케이 심층 보도
‘전기·전자 입국(立國)’. 일본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도약한 원동력이자 자부심을 상징해온 말이다. 그러나 올 7~9월에 일본 주요 전기·전자업체의 영업이익을 다 합쳐도 삼성전자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는 현실 앞에 일본 재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너무 커진 격차 앞에 놀란 것이다. 지난달 31일 도쿄증권거래소는 일본 전기·전자업계의 7∼9월 실적이 전 분기(4~6월)보다 회복세를 보였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일본 언론들은 그 전날 발표된 삼성전자·LG전자의 경이로운 실적에 주목했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삼성전자의 7∼9월 영업이익이 약 3260억 엔(약 4조2300억원)으로 같은 기간 소니·파나소닉·히타치 등 일본 대형 9개사의 영업이익 합계(1519억엔)의 두 배 이상 된다”고 전했다.

일본 재계는 전기·전자 강국을 자부하는 일본 업체들이 한국 업체에 실적에서 완패했음을 인정했다. 소니의 오네다 노부유키(大根田伸行) 최고재무책임자(CFO·부사장)는 “소니가 (삼성전자에) 패한 근본적 원인이 제품의 경쟁력에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파나소닉의 오쓰보 후미오(大坪文雄) 사장도 “(삼성전자와의) 글로벌 경쟁에서 차이가 있었다”고 말했다.

아사히(朝日)신문은 일본 재계의 이 같은 분위기를 ‘(한국 업체에 대한) 사실상의 패배선언’이라고 전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마라톤에 비유하면서 “삼성전자의 뒷모습이 크게 멀어졌다”고 표현했다. 일본 언론들은 이례적으로 일본 업체들이 한국 업체에 크게 뒤진 원인과 배경을 심층 분석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 업체들은 경기침체 때 투자를 줄이는 데 급급했지만 삼성전자는 오히려 불황기를 이용해 적극적인 투자에 나선 뒤 경기 회복기에 대량 생산에 나서면서 시장 지배력을 강화했다”고 보도했다. 불황기에는 설비 가격도 내리기 때문에 경기 회복기에 대비해 거액이 투입되는 반도체와 액정 투자의 적기라는 분석이다.


이런 전략적인 투자가 가능한 배경에 대해 이 신문은 “강력한 경영 리더십을 발휘한 이건희 전 회장의 존재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전문 경영인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오너 경영인의 담력이 최고 수익의 원동력이 됐다”고 덧붙였다. 글로벌 경영을 향한 열의도 일본 전자업체들과 삼성 간의 우열을 가른 요인으로 꼽혔다. 삼성은 협소한 국내 시장을 벗어나 모든 상품의 타깃을 글로벌시장으로 설정하지만 일본 업체들은 내수시장에 안주해 와 대응이 늦다는 것이다.

아사히신문은 삼성·LG 등 한국 전자업체가 지난해 말 적자를 기록했지만 올 들어 원화 약세에 힘입어 유럽은 물론 중국·인도·중남미 등 다양한 시장에 경쟁력 있는 상품을 신속하게 내놓아 매출을 늘렸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일본 업체가 실지를 회복하기 위해선 해외시장 개척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도쿄=김동호 특파원

[안중근의거 100년] 살아남은 자의 슬픔

 


[안중근의거 100년] 살아남은 자의 슬픔

  • 입력 : 2009.10.21 16:18 / 수정 : 2009.10.21 16:36
▲ 1939년 10월16일, 조선호텔에서 안중근 아들 안준생(왼쪽)이 이토 히로부미의 둘째 아들 이토 분키치(오른쪽 첫번째 앞줄)를 만나 아버지를 대신해 사죄한다고 말했다. 뒤에 선 사람은 조선총독부 외사부장 마쓰자와다쓰오(중앙)와 아이바 기요시(오른쪽) 및 통역 촉탁이다. / 연합뉴스

백범이 단죄하고 싶어한 아들 안준생
1939년 이토 아들과의 ’화해극’에 동원

1945년 8월15일 “왜적이 항복한 뒤에 우리도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임시정부 수뇌진 중 백범 김구 일행은 그해 “11월5일 선발로 중경을 출발하여 5시간의 비행 끝에 (그날 오후) 6시에 상해에 착륙했다.” 

이때의 감회를 백범은 “13년 전에 떠났던 상해의 공기를 비로소 다시 호흡하게 되었다”고 읊었다. 

13년 전 상해를 떠날 때에 비해 이곳에 사는 우리 동포는 몇십 배가 늘어난 사실을 지적하면서 백범은 화제를 바꾼다. 

“그러나 왜적과의 전쟁으로 생활난이 더욱 심해진 까닭에 각종 공장이나 사업 방면에서 부정한 업자들이 속출했다. 그런 가운데 이전의 독립정신을 굳게 지키며 왜놈의 앞잡이가 되지 않은 사람들은 선우혁ㆍ장덕로ㆍ서병호ㆍ한진교ㆍ조봉길ㆍ이용환ㆍ하상린ㆍ한백원ㆍ원우관 등 불과 10여 명뿐이었다. 그들의 굳건한 지조를 가상히 여겨 서병호의 집에서 만찬회를 열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는 그만큼 일본 수중에 떨어진 상해에서 ’민족지조’를 지키며 살아간 조선 동포는 드물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친일부역배 중에서도 백범은 유독 한 사람만큼은 용서할 수 없었다. 백범일지에 보이는 구절이다.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安俊生)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고 중국 관헌에게 부탁했으나 그들이 실행치 않았다.”(배경식 역주, 백범일지 619쪽, 너머북스, 2008) 
안준생이 도대체 누구이기에 백범은 이토록 분노했을까? 

1939년 10월7일, 상해 거주 조선인 14명으로 구성된 ’만선시찰단’이 경성에 도착한다. 친일단체 상해 주재 조선인회 회장 이갑녕(李甲寧)을 단장으로 하는 시찰단 일행은 경성 도착과 함께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를 면담하기도 한다. 

이들의 고국 방문 소식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그리고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도 보도됐다. 

이들 신문보도를 비교하면 기사 비중에 확연한 차이가 난다. 

동아일보 39년 10월10일자는 ’상해조선인 실업가 작일(昨日.어제) 환영회 성황’이라는 1단짜리 기사에서 간단히 이갑녕을 단장으로 하는 시찰단이 고국을 찾아 환영회가 개최된 사실만을 전했다. 

조선일보는 10월2일자에서 ’상해 재류(在留) 동포 향토 방문시찰단 내(來) 7일 오후에 입경’이라는 2단짜리 예고기사를 수록한 데 이어 10월7일자 석간에서는 ’30년만에 보는 고토(古土), 물심간(物心間)에 신개벽’이라는 3단 기사를 통해 이들의 방문 사실과 활동, 그리고 방문자 명단을 첨부해 상세히 보도했다. 

이 방문자 명단에서 ’안준생’이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안준생은 10월15일, 박문사(博文寺)에 나타난다. 서울 장충단공원,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에 있던 사찰을 찾은 것이다. 정식 명칭이 보리사인 이 사찰이 박문사라고도 한 까닭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1909년 10월26일 안중근에게 사살된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찰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찰에 다름 아닌 안중근의 둘째아들 준생이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준생은 박문사에서 어떤 일을 했을까? 

친일신문 경성일보 10월16일자에는 ’망부(亡父)의 속죄는 보국(報國)의 정성으로’라는 제목 아래 ’이등공(伊藤公) 영전에 고개 숙이다’ ’운명의 아들 준생(중근의 유자 遺子 )군’이라는 부제 아래 준생이 전날 박문사를 찾아 이토의 영전에 향을 피우고 주지가 준비한 안중근의 위패를 모시고 추선(追善) 법요를 거행했다는 행적을 전했다. 

이 자리에서 준생은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속죄하고 전력으로 보국의 정성을 다하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한다. 

다음날인 10월16일, 준생은 조선호텔에서 이토 분키치(伊藤文吉)를 만난다. 당시 일본광업공사 사장인 분키치는 이토 히로부미의 둘째아들이다. 

이 둘의 만남을 담은 ’역사적인 사진’은 매일신보 10월18일자에 ’극적인 대면ㆍ여형약제(如兄若弟.형 같고 동생 같고), 오월(吳越) 30년 영석(永釋.영원히 풀다)’이라는 큼지막한 제목 아래 수록된 기사에 첨부돼 있다. 

이들의 만남을 담은 사진을 일본인 근현대사가 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 일본 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 교수가 이토 후손인 이토 히로아키(伊藤博昭)에게서 찾아내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발간된 근간 ’한국과 이토 히로부미’(한국에서는 도서출판 선인 출판)에 소개했다.(398쪽) 

미즈노 교수는 안준생에 대해 “자세한 경력은 알 수 없다”면서 중일전쟁 이전에는 독립운동에도 관계하고 있었던 듯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미즈노 교수는 안준생이 1950년 중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그다음 해에 죽었다는 다른 사람의 연구성과를 인용했다. 

안준생의 행적, 그중에서도 1939년 고국 방문 직전까지 활동 상황과 고국 방문 때의 더욱 자세한 행적은 쇼와(昭和) 14년(1939) 10월17일 조선동촉부에서 작성한 ’재(在) 상해 조선인 만선시찰단 선내(鮮內.조선 내부) 시찰 정황’이라는 일본 외무성 경찰사 자료로 남아있다. 

연합뉴스가 최근 발굴한 이 자료에 의하면 고국 방문 당시 안준생은 33세로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상해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는 안중근이 국외로 탈출할 때 어머니 태내에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백범이 해방을 맞아 귀국할 때 많은 친일부역배 중에서도 유독 안준생을 거론하며 그를 단죄하려 한 까닭은 바로 이런 행적에서 비롯된다. 

백범일지에 의하면, 백범은 동학에 참여해 황해도 일대에서 봉기를 일으켰을 때는 안중근 집안에 기거하며 목숨을 부지하기도 했다. 

안중근 집안과는 그런 인연이 있고, 더구나 안중근의 의거를 누구보다 높이 산 백범이지만, 아무리 그의 아들이라고 해도 노골적인 친일행적을 보이는 안준생을 용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조선총독부나 일본으로서도 안준생은 다름 아닌 안중근의 아들이기에 내선일치에 이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며, 그렇기에 안준생을 ’이용’하고자 집요한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안준생의 친일행적은 어쩌면 안중근의 혈육으로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기도 했을 것이다. 

안준생의 친일 행적은 적어도 학계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국내 어느 연구자도 이런 사실을 지적하지 않는다. 그만큼 안중근이 갖는 영웅성이 절대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은 ‘미국 기저귀’ 벗고 DJ를 배우라

일본은 ‘미국 기저귀’ 벗고 DJ를 배우라
강상중 도쿄대 교수, 일 정치리더십 부재 통렬 비판
가짜 리더들과 목숨 걸고 싸운 ‘김대중 리더십’ 정리
 
 
한겨레  한승동 기자
 
 
 
» 〈반걸음만 앞서 가라〉
 
 
 




〈반걸음만 앞서 가라〉
강상중 지음·오근영 옮김/사계절·9000원

 

<반걸음만 앞서 가라>는 정치사상사를 전공한 강상중(59) 일본 도쿄대 교수가 정치적 리더십 문제를 다룬 최근 저서다. 재일동포(자이니치) 2세 강 교수는 지금 일본에서 가장 잘나가는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아사히신문사가 내는 시사주간지 <아에라>는 일본에 유행한 한류(韓流)에 빗댄 ‘강류’(姜流)라는 조어로 일본 사회 내 강 교수의 높은 인기와 영향력을 표현하기도 했다. ‘강상중’(姜尙中)에서 따온 강류와 한류는 일본어 발음이 거의 같다. 신문·방송 등 매스컴의 주목도도 높고 학자로서는 드물게 그의 책이 많이 쏟아져 나오고 또 잘 팔린다. 이례적이다.

책 제목이 된 ‘반걸음만 앞서 가라’고 한 사람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2005년께부터 김 전 대통령을 매년 만났던 강 교수는 올해 4월 정식 인터뷰를 했고, 그때 김 전 대통령이 세계화 시대의 리더 역할에 관한 질문에 그렇게 대답했다. ‘정치학자 강상중이 제안하는 리더십 파워 일곱 가지’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따라서 김 전 대통령의 삶을 통해서 바람직한 리더십이 무엇인지 조목조목 살펴보는 실용서적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런 형식을 일부 취하고 있을 뿐 책 편제나 내용은 일본 현실정치 이야기에 무게중심이 놓여 있다. 강 교수가 “이명박 정권하의 역주행” “거꾸로 가는 광경”이라 비판했고,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그 역행을 막기 위한 “마지막 투쟁”, 말하자면 사투의 결과라고 한 한국 현실정치에 대해서도 그 부분이 시사하는 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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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라는 나라에서는 미운털이 박혀 있고, 고국에서도 부당한 대접을 받는 재일교포란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 현해탄을 사이에 둔 양국 간의 알력 속에서 신음소리를 내봐야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그런 ‘역사의 쓰레기’ 같은 존재인가, 우리는….” 그런 비참한 상황에서 그를 구출한 것은 1972년에 처음 가본 조국의 처참한 현실과 1973년에 일어난 ‘김대중 납치사건’이었다. “나는 비로소 거대한 구조적 폭력을 들여다본 것 같았다. 한·일 유착의 구조와 그것을 배후에서 지원하는 미국의 압도적인 그림자. 그것이 구조적 폭력의 ‘정체’임을 알았을 때, 나는 안이한 낭만적 감상에 이별을 고하고 역사적 현실이라는 거대한 존재와 마주하게 되었다.”

 

강 교수가 평가하는 김 전 대통령의 최고 덕목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구조적 폭력’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종식시키는 일을 평생소명으로 삼고 실천했다는 것이다.

구조적 폭력과 더불어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청동 기저귀’다. 일본 정치인들의 리더십 부재를 상징하는 청동 기저귀는 패전국 일본을 점령한 미국이 일본에 채운 ‘특수한 수갑과 족쇄’를 말한다. “패전으로 그때까지의 역사를 삭제당하고 갓난아기부터 인생을 시작한 일본에게 그때 청동으로 만든 거대한 기저귀가 채워졌던 것이다. … ‘동서냉전’에 대비한 기저귀다. 기저귀를 채운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미국이다. 즉 동서냉전이라는 세계정치의 힘의 균형을 위해 일본에는 강제로 거대한 기저귀가 채워졌고, 그 상태에 매우 고도로 적합한 것이 자민당이라는 보수정당이었던 것이다.”


강 교수에 따르면 요시다 시게루나 기시 노부스케,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등 미-일 동맹 체제의 틀을 완성한 총리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나카소네 야스히로나 다나카 가쿠에이 등 몇몇 특기할 만한 정치가들도 결국은 미국제 청동 기저귀를 차고 미국의 이해범위 안에서 논 “리더 아닌 리더”, “리더가 리더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리더일 수 있는” 존재들에 지나지 않았다. 야당이 거세당한 상황에서 일본 국민들은 집안싸움인 자민당 내 파벌투쟁에 별 신경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현실생활에 별로 절박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두들 우선은 살만했고 생명에도 별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 해도 상관없어’ 하고 지나쳐온 것이다.”

그런데 고도성장이 끝나고 냉전이 무너지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거품경제가 붕괴하고 불황이 가속화한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상황이 급박해졌다. “일자리가 없어지고, 월급이 깎이고, 저축이 줄고, 자녀를 키울 수도 없고, 병원에도 가지 못하고, 무서워서 병에 걸릴 수도 없는”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위기감과 앞날에 대한 불안감이 덮쳤다. 그런데도 자민당은 기껏 도로공사를 늘려 볼까, 은행에 공적자금을 투입해 볼까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등장한 것은 바로 자민당 주류 55년체제의 ‘이익분배 정치’가 이런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였다. 사람들은 “뭔가 해줄 것 같은” 분위기를 요란하게 연출한 고이즈미에게 잔뜩 기대를 걸었으나 그가 해결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그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사회적 격차와 빈곤문제를 키우고 지역사회를 피폐하게 만들고 사회보장체제도 망가뜨렸다. 민주당으로의 정권교체는 그 당연한 귀결이었다.

김대중은 그런 미국제 청동 기저귀 찬 부류들과는 달랐다고 강 교수는 말한다. 일본 못지않은 사실상의 일당 장기집권 체제가 이어진 한국의 정치 리더들 역시 미국제 기저귀를 찼지만 그것은 청동제보다 더한 무쇠 기저귀였다. 김대중은 무쇠 기저귀를 찬 게 아니라 그것을 찬 가짜 리더들과 목숨을 걸고 싸운 진짜 리더였던 셈이다. 청동 기저귀를 찬 자들의 리더십이 가짜였다면 무쇠 기저귀를 찬 자들의 리더십은 더한 가짜가 아닌가. 이케다의 ‘소득배증’이 미국의 요구에 영합한 가짜 리더십이었다면 박정희의 개발독재는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이른바 ‘전후정치’ 체제가 끝나고 새로운 변화 물결이 예고되고 있는 일본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보여 준 리더십의 진수를 전하고 싶다”는 게 강 교수가 이 책을 쓴 이유다.

개인의 자유와 경쟁 과잉으로 더 절박한 생존위기에 처한 대중들은 에리히 프롬이 얘기한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꿈꾸며 ‘하이 리턴 하리 리스크’ 식의 시이오(CEO)형 리더 모델을 거부하고 이윤폭이 적더라도 공정하고 안전하며 지속 가능한 리더 모델을 선호하기 시작했다는 게 강 교수 생각이다. 한나라당의 연이은 재보선 참패도 이런 기류 변화를 반영하고 있는 걸까.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대마도는 한국 땅' 옛지도 2점 첫 공개

<`대마도는 한국 땅' 옛지도 2점 첫 공개>

 
(마산=연합뉴스) 최병길 기자 = 대마도(쓰시마.對馬島)가 한국 땅으로 표기된 옛 지도 2점이 처음으로 공개돼 관심을 끌고 있다.

부산외국대 일본어학부 김문길 교수는 28일 경남 마산문화원에서 열린 `대마도 고지도 전시회'에서 대마도가 한국 땅으로 표기된 `대마여지도(對馬與地道)'와 사본을 전시했다.

대마여지도는 1756년 6월 일본 지리학자인 모리고안(森幸安)이 에도(江戶) 시대 막부의 명을 받아 제작한 뒤 공인을 받은 것으로 현재 원본이 교토 기타노덴만쿠(北野天滿宮)에 소장돼 있는 것을 김 교수가 찾아냈다.

2003년 출간된 모리고안 지도(森幸安地圖)에 수록된 이 지도에는 `부시준조선국지지례칙부향군령지470리(釜示准朝鮮國地之例則府鄕郡令之470里)'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대마도의 부ㆍ향ㆍ군 모든 법칙은 조선국 부산에 준한 것이다.거리는 470리다'라고 풀이된다.

김 교수는 "지난 여름 일본에서 이 지도를 찾아냈는데 사본으로만 볼 수 있어 아쉬웠지만 일본의 지리학자가 공식적으로 직접 표기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1834년에 제작된 청구도 동래부 기장현은 현재 고려대 도서관에 소장돼 있는데 김 교수가 직접 확인해 사본으로 햇빛을 보게 됐다.

이 지도에는 `본예신라수로470리재동래부지동남해중지실성왕7년무신왜치영어차도(本隸新羅水路四百七十里在東萊府之東南海中至實聖王7年戊申倭置營於此島)'라고 적혀 있다.

이 글귀는 `대마도는 원래 신라땅에 예속되어 있고 실성왕 7년까지 동래부에 속한 섬으로 470리 거리 동남쪽 바다에 있다. 무신년에 왜(일본인)가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고 적혀 있다.

김 교수는 "이 지도는 동래부 기장현을 중심으로 그린 것으로 대마도를 지금의 부산 동래부 기장현에 예속된 것을 의미한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날 오후 마산문화원 초청으로 마산 3.15아트센터에서 열리는 `동북아에 있어서 대마도 영토문제 연구'를 주제로 특강에서도 한국 땅으로 표기된 대마도의 실체를 알렸다.

김 교수는 "역사를 되짚어 각종 자료와 고증을 통해 대마도가 한국 땅이고 그 땅에 대한 정확한 역사인식을 후세에 심어주기 위해서라도 대마도의 실체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영주 마산문화원장은 "2005년 `대마도의 날'을 조례로 제정한 마산에서 한국 땅으로 표기된 대마도 지도를 처음으로 보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며 "고토 대마도에 대한 바른 역사의식을 함양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choi21@yna.co.kr

한일 해저터널 현장을 가다(월간중앙)

 
[르포 - 한·일 해저터널 현장을 가다] 부산·후쿠오카 이웃처럼 오간다
150km ‘바다밑 육로’ 뚫기 준비 끝 
자기부상열차 뜨면 40분 거리 … 한국 측의 ‘육로 개방 불안감’ 해결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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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가현 가라쓰시에 있는 한·일 해저터널 조사사갱.

월간중앙일본 후쿠오카(福岡)공항에서 남쪽으로 2시간 남짓 차를 달리면 도착하는 사가(佐賀)현. 이곳에는 한국인에게 쓰디 쓴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옛 유적이 있다. 바로 가라쓰(唐津)시에 남아 있는 나고야(名護屋)성터다. 400여 년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일본 전국을 통일한 후 조선과 명나라를 치기 위해 이곳을 군사 거점으로 삼아 병력을 길렀다. 

각 지역의 영주들은 도요토미의 명에 따라 이곳에 모여 견고한 성을 축조했다. 그 결과 일어난 전쟁이 임진왜란이다. 성터 끄트머리 절벽 위에 서면 일본 서쪽의 바다, 한반도 남쪽의 바다가 멀리까지 보인다. 성곽이 높이 오르고 병사들의 고함소리가 끊이지 않던 시절 도요토미는 저 바다를 바라보며 자신의 야망을 불태웠을 것이다. 

지금은 허물어져 흔적만 겨우 찾을 수 있는 이 초라한 성터가 임진왜란의 출전 기지였다니. 한국인에게 이만큼 뼈아픈 장소가 또 있을까? 나고야성터 옆에는 나고야박물관이 있어 이곳에서 출토된 유적을 살펴볼 수 있다. 박물관 측은 한국과 일본의 불편한 역사를 깨우치는 이 장소를 양국 간 우호 증진의 장으로 만들어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땅끝 해남에서 인간문화재가 만들었다는 장승이 박물관 로비에서 한국인 관광객을 반기고, 박물관 내 일·한교류센터에서 일하는 직원이 나와 한국어로 인사를 건넨다.“전쟁과 침략의 과거를 돌아보며 일본인도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불행한 과거를 이겨내고 이웃인 두 나라 간 교류가 확대되기를 기원합니다.”

사가현 공무원인 남편과 결혼해 일본에 정착했다는 한국인 박물관 직원이 말했다. 나고야성터에서 왼쪽을 바라보면 해안 쪽으로 더 튀어나온 가라쓰 지역이 한눈에 보인다. 이곳은 오랫동안 논의되던 한·일 해저터널의 일본 쪽 출발 지점이다. 

한·일 해저터널은 1980년대 초부터 거론됐으나 학계의 찬반 논쟁과 실현성에 대한 회의로 인해 한동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최근 몇 년 사이 다시 공론화하는 분위기다. 지난해부터 한국과 일본의 정치인·기업인이 적극적으로 해저터널 건설 필요성을 제고하고 나선 덕분이다.

지질조사 위해 570m까지 사갱 뚫어

1980년대 초 한·일 해저터널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제하이웨이건설사업단은 1983년 가라쓰에서 지형조사를 실시하고 1986년 파일럿터널공사를 시작했다. 해저터널을 뚫기 위해서는 지질조사를 위해 해저 쪽으로 비스듬히 굴착해 들어가는 파일럿터널을 먼저 뚫어야 한다. 

이것을 ‘조사사갱’이라고 부른다. 1989년까지 200m를 굴착하고 답보 상태였는데 2006년 3월 다시 2차 공사를 시작했다. 나고야성터에서 다시 남쪽으로 차로 30분 가량 내려가 한·일 해저터널 조사사갱 굴착 현장에 도착했다. 폭 5.4m에 높이 5m의 이 터널 입구 위에는 ‘한·일 터널 나고야 조사사갱’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입구 주변에는 지질조사를 위한 전문 장비와 굴착 작업을 위한 자재가 널려 있었다. 입구에 서서 경사진 터널 안쪽을 들여다보니 끝이 보이지 않는다. 급경사에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아래로 내려가 본다. 내부에는 작업용 레일과 급수관·배수관·조명이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터널의 총 길이는 570m에 이른다. 끝까지 내려가려면 한참 걸어야 한다. 깊게 내려갈수록 점점 공기가 더 차가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터널의 끝부분에 도달하니 기분이 묘하다. 머리를 들어도 터널 입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제야 이곳이 땅속으로 100m 넘게 내려온 지점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조사사갱은 지질조사 목적 외에도 본 터널을 뚫기 전 지하수를 미리 빼내기 위한 용도로도 필요하다”고 한일터널연구회 후지하시 겐지 상임이사가 설명했다. 한·일 해저터널에 대한 기술적 고문을 맡은 그는 구마가야구미에 입사해 댐과 터널 건설 기술자로 20년간 근무한 베테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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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일 해저터널이 생기면 주요 루트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쓰시마섬.

1983년 한일터널연구회를 설립해 한·일 해저터널이 직면한 기술적 문제들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 양국을 터널로 잇는다는 것, 말은 쉽지만 150km가 넘는 구간을 해저로 연결하는 거대한 토목공사다. 통일교의 문선명 총재가 이 사업에 대한 구상을 발표한 후 지금까지 비영리단체와 재단·포럼 등을 통해 꾸준히 가능성을 모색해 왔다. 

“20년 동안 토목기술이 발전해왔고 한·일관계도 예전에 비해 개선됐기 때문에 양국의 여론이 형성된다면 충분히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 연구회의 관측이다. 조사사갱이 위치한 현장에서 연구회 관계자들이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를 브리핑했다. 한·일 해저터널은 일본 규슈 북부에서 이키·대마도를 거쳐 한국에 이르는 220km를 해저터널과 교량으로 잇는다. 

최대수심부 230m까지 파고 들어가야 하는 난공사다. 연구회 측은 “수심 160m 이상 연약한 지반층에서 시공 경험은 세계적으로도 예가 없다”고 말했다. 건설된다면 영국와 프랑스를 잇는 유로터널의 4배 이상의 길이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 그렇다면 이 터널은 정말 실현 가능한가? 

연구회 측은 “기술적 측면을 묻는 것이라면 가능하다”는 답을 들려줬다. 이들은 정치·사회적 분위기 등 터널공사 앞에 산적한 과제는 논외로 하고 공사를 시작할 때 언제든 다양한 방안을 내놓을 수 있도록 기술적 연구에만 집중하고 있다고 했다. 터널을 지면 아래로 파고 들어갈 때 지질의 성분과 특성이 시공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해저지형과 수심도 마찬가지다. 일본 측은 수년간 실험선을 통해 일본 영해 해저 지질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가장 쉽게 굴착할 수 있으면서 가장 짧은 루트를 탐색해 최종적으로 3개 노선 안이 마련됐다. 거제에서 대마도 하도를 거쳐 가라쓰로 가는 1안, 거제에서 대마도 상도를 거쳐 가라쓰로 가는 2안, 부산에서 쓰시마를 거쳐 가는 3안이 있다. 

1안은 가장 짧지만 바다 밑으로 가는 거리가 가장 길고, 2안은 1안과 비슷하며, 3안은 거리가 너무 길고 지진대를 지난다는 단점이 있다. 영국의 포크스턴과 프랑스의 칼레를 잇는 50km의 영·불 해저터널은 하나의 터널이 아닌 3개의 터널로 구성돼 있다. 철도 전용 터널 2개와 관리용 서비스 터널 1개다. 

차량 수송 전용 열차인 르셔틀과 여객·화물용 고속열차인 유로스타 등 2종류의 열차가 운행된다. 한·일 해저터널은 철도와 도로를 함께 건설하는 방안과 철도만 운행하는 유로터널식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지금 국내에서 운행되는 고속철도나 아직 국내에 없는 자기부상열차가 들어설 수도 있다. 

실제 터널 건설에 따라 예상되는 부산과 후쿠오카 간 이동시간 단축 효과는 놀랍다. 자동차로 3시간30분, KTX나 신칸센으로 1시간20분, 자기부상열차가 들어선다면 무려 40분으로 단축된다. 사실상 하루 안에 오갈 수 있는 하나의 지역권이 되는 것이다.

후쿠오카까지 1일생활권으로 묶는 바다 밑 지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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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해저터널 예상 노선도.
두 나라 간 거리가 좁아지면 어떤 경제적 가치가 창출될 것인지도 주목된다. 해저터널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평화통일재단은 “물류비용 감소에 따라 한국기업이 일본시장 내에서 경쟁력을 더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관광산업도 활성화하는 것은 물론 터널이 연결되는 부산지역의 성장잠재력도 극대화하는 등 입지 지역이 각광받을 것으로 재단 측은 기대한다. 

한국에서는 이 프로젝트를 두고 “대륙으로 나갈 수 있게 길을 터줘 결과적으로 일본에만 좋은 일 아니냐”는 반대 여론도 있다. 터널이 생기면 아시아 대륙으로 뻗어나가는 횡단철도의 종점이 일본이 되기 때문. 평화통일재단은 “터널이 만들어 낼 변화를 너무 작게 보는 것”이라며 이를 부인한다. 

고부안 평화통일재단 포럼사무처장은 “단순히 물류 증진으로만 계산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터널을 통해 오가는 사람이 늘어나면 우리나라의 의료서비스를 누리기 위해 한국을 찾는 일본인도 늘어날 것이다. 어느 한 부분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산업분야에 긍정적 파급 효과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재단측은 “영·불 해저터널도 종점인 영국보다 프랑스가 더 혜택을 받고 있다”며 “결국 대륙의 주요 도시들과 얼마나 효율적 교통 네트워크를 구축하느냐에 달렸다”고 분석했다. 일본 후쿠오카 측은 수년간 실험선을 통해 일본 영해 해저 지질조사를 벌였다. 하카다(博多)항에서 대마도로 가는 쾌속선에 올라탔다.

현해탄을 지나는 이 배는 출항 1시간 후 이키섬에 잠시 닿아 승객을 내리고 다시 1시간여를 달려 대마도에 도착했다.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던 후쿠오카의 하늘을 뒤로 하고 겨우 2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대마도 이즈하라(嚴原)항의 날씨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화창하다. 

일본 본토와 거리감이 날씨의 차이에서 느껴진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1시간20분만 가면 대마도 히타카쓰(比田勝)항에 닿는다니 이곳은 진정 일본보다 한국과 가까운 땅인 셈이다. 한·일 해저터널의 경로이기도 한 이 바닷길은 17세기 통신사가 일본에 파견될 때 지나온 길과도 일치한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국교가 단절됐던 일본은 1606년 일본국 왕사의 조선 파견을 계기로 이듬해 조선의 외교사절인 통신사를 초청해 국교를 회복했다. 전쟁의 역사를 뒤로하고 새로운 교류의 장을 열었던 조선통신사는 한·일 해저터널을 추진하는 일본 측에 더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평화통일재단의 한 일본인 관계자의 말이다. “해저터널이 시작되는 지점이 임진왜란을 준비하던 나고야성터가 있는 가라쓰이기 때문에 자칫 한국인에게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질까 걱정된다. 두 번이나 일본에 의해 전쟁의 상흔을 입었기 때문에 해저터널이라는 새 길을 열어주기를 두려워할 것 같다.”

이즈하라항에서 북쪽으로 차로 1시간 넘게 달려 대마도 중간 지점으로 향했다. 급커브 경사길을 반복해 오르다 보면 에보시다케(鳥帽子岳) 전망대로 가는 계단길이 나타난다. 이곳은 대마도 아소(淺茅)만의 전망을 360도 바라볼 수 있다. 인근 해역에 동동 떠 있는 푸른 섬과 리아스식 해안인 아소만의 유려한 절경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 창출할 것”

해저터널의 주요 루트 중 하나로 꼽히는 대마도. 후쿠오카와 부산 가운데 놓인 이 섬이 중간 포인트라면 터널의 규모를 어렵사리 짐작해볼 수 있다. 가히 천문학적 숫자의 돈이 투입되며 양국에서도 유례 없던 대규모 토목공사가 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측한다. 투입되는 비용만 대충 추산해도 60조~70조원이다. 

건설비에 운행비와 시간절감 등 편익을 계산한 비용편익분석 결과 3가지 노선 중 어느 것도 0.6을 넘지 못해 사업 추진이 비합리적이라는 수치상의 결과가 나왔다. 비용이 100원이라면 수익은 60원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프로젝트 추진을 찬성하는 이들은 “국가 간 사회간접자본사업을 경제성만 가지고 판단할 수 없다”고 반박한다. 

“동아시아 통합에 대한 상징성을 가지고 한·일 교류 확대의 물꼬를 트는 등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터널 건설로 인해 한국이 동북아경제권의 중심에 설 수 있다는 관측도 이런 의견에 무게를 싣는다. 

2008년부터 한국과 일본 정·재계 거물들이 한·일 해저터널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는 점은 희망적이나 아직 양국 국민의 이목은 끌지 못하는 ‘그들만의 이슈’로 남아 있다. 여론이 조성되기는커녕 이 사업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이도 드물다. 국민의 공감대 형성과 더불어 경제성과 파급효과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검토가 이뤄져야 한·일 해저터널 프로젝트의 첫 삽을 뜰 날이 가까워질 것이다.

기술적 문제는 거의 극복 … 한국의 국민감정 뚫는 게 난제
인터뷰 - 후지하시 겐지 한일터널연구회 상임이사

 
-한·일 해저터널을 가로막는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인가?

“나는 기업에서 일하며 세이칸터널 등 공사 현장에서 감독을 맡은 토목기술자다. 처음 이 사업이 제안됐을 당시에는 ‘주먹구구식으로 계산해 보면 대충 가능하다’ 정도의 답변밖에 줄 수 없었지만 이제는 기술적 과제는 거의 극복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터널 건설을 위해서는 한국의 국민 감정이 가장 큰 선결과제라고 본다. 이웃 간 감정이 나쁘기는 영국과 프랑스도 마찬가지지만 우리 두 나라는 또 다르다. 일본이 한국을 지배한 역사가 그만큼 큰 상처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터널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양국 간에 진정한 우정을 쌓아 나가는 계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터널 굴착 과정도 위험하지 않은가?

“단층에 굴착 시공을 하다 보면 바닷물이 갱 안으로 유입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애써 판 터널이 모두 헛수고가 되는 경우도 생긴다. 현재 연구회가 조사한 지역에는 활단층으로 보이는 것은 없지만 조금 더 자세한 관찰이 필요한 해저지형도 분명 존재한다.”

-가라쓰와 대마도 모두 도시와 떨어진 외곽지역이다. 노선의 위치가 경제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해저터널이 양국의 도시권에서 멀리 떨어진 해역에 놓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라쓰는 규슈의 정치·경제 중심지인 후쿠오카와 가깝다. 후쿠오카권과 부산을 잇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본다.”

-건설비와 공사기간은 어느 정도로 추산하나?

“건설비는 노선의 자연조건과 해당 지역의 협력, 터널 구조체의 규모와 사용 목적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이다. 우리 연구회는 10조엔 내외로 예상한다. 공사기간은 최근의 터널 건설 기술을 감안하면 10년 내외일 것으로 생각되지만 7년 만에 마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기술자도 있다.”

글 박미소 월간중앙 기자 [smile83@joongang.co.kr] 

 

서울 女 두명중 한명, 얼굴 고쳤다

 

의사들, 서울 女 1800명 거리 조사 했더니… 두명중 한명, 얼굴 고쳤다

 
 
의사들, 서울 女 1800명 거리 조사 했더니…

'백화점 고객'은 눈·코 다 했고' 할인매장 고객'은 눈만 고쳤다
'백화점고객' 300명중 27명 윤곽수술한 것으로 보여 대학생 40%정도 '성형미인'

14일 서울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일평균기온 섭씨 14.5도의 선선한 가을날인데도 선글라스에 마스크를 쓰고 활보하는 20~30대 여성이 많았다.

이곳은 서울 강남구 신사동·압구정동·청담동을 잇는 일명 '뷰티벨트' 한복판이다. 성형외과 전문의가 운영하거나 고용된 국내 개인병원 네곳 중 한곳(881곳 중 253곳)이 이 지역에 있다. 가까운 사람들끼리도 성형 사실을 감추던 과거와 달리, 요즘 뷰티벨트를 걷는 여성들은 수술해서 부은 얼굴로 카페도 가고 쇼핑도 한다.

인근 백화점에서 쇼핑 중인 이모(25·회사원)씨는 쌍꺼풀 수술 부기가 덜 빠진 눈에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부끄럽지 않냐고요? 왜요? 요새 성형수술이 흠은 아니잖아요? 당장 남들 보기에 부자연스러워서 선글라스를 쓴 것뿐이지 창피해서 쓴 건 아니에요."

턱 전체를 붕대로 싸맨 한 여성이 옆 매장을 둘러봤다. 이씨가 "저 사람은 윤곽수술을 받은 것 같다"고 했다. "1000만원 가까이 든다던데 티도 안 나고 효과는 확실하대요. 부러워요. 저도 꼭 받고 싶어요."

최근 몇년간 성형이 '유별난 사람들이나 하는 수술'에서 '앞집 여자도, 뒷집 남자도, 내 친구 ○○도 받은 수술'로 크게 변했다. 그러나 성형수술이 연간 몇 건이나 이뤄지는지, 누가 왜 어떤 수술을 받는지, 시장 규모는 얼마나 큰지 정확히 밝힌 조사는 없다.

본지는 성형수술이 얼마큼 깊숙하게 한국인의 일상에 파고들었나 살피기 위해 대한성형외과의사회 소속 전문의 6명과 함께 거리로 나갔다. 3m 이내 거리에서 지나가는 여성들의 얼굴을 선착순으로 300명 관찰하고 눈·코 성형을 했다고 추정되는 사람 수를 기록했다.

조사 지점은 중산층 이상 주부들이 많은 서울 강남구 A백화점 식품매장, 다양한 계층이 뒤섞이는 서울 은평구 B할인매장 식품매장, 20대가 몰린 명문대 중앙도서관 입구를 골랐다.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전문의 1명이 조사한 뒤, 또 다른 전문의들이 2인1조로 같은 지점에서 다시 조사했다. 세 지점을 각각 두 차례씩 두달간 조사한 결과, 총 1800명 중 836명이 성형을 한 것으로 추정됐다. 열명 중 네명꼴(46%)이다. 


'루키즘(Lookism)'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거나 차별한다는 뜻이다. 1970년대 미국에서 처음 쓰이기 시작한 이 낱말은 이제 전지구적 화두가 됐다. 대중매체가 발달하면서 루키즘이 홍수처럼 확산됐고 이에 따라 각국 성형 시장이 한여름 강물처럼 불어나는 중이다.

취재팀은 전문의들과 나란히 서울 강남구 A백화점 식품매장, 서울 은평구 B할인매장 식품매장, 명문대 중앙도서관 입구로 나갔다. 20~50대 여성을 계층별·세대별로 폭넓고 정확하게 조사하는 게 목표였다. 관찰대상은 총 1800명이었다.


 

강남구 A백화점…두 명 중 한 명꼴

8월 28일 오후 6시30분, 서울 강남구 A백화점 식품매장은 저녁 찬거리를 사는 주부들로 북적댔다. 다양한 지역 고객이 오는 일반매장과 달리, 식품매장 주요고객은 부유층과 중산층이 많이 사는 압구정동·잠원동·논현동·청담동 주민들이다. A백화점 식품매장 손님 한 명이 한번에 쓰고 가는 돈은 평균 13만원이다.

배준성(34·JK성형외과) 전문의가 계산대 3m 앞에 서서 선착순으로 여성 300명을 꼼꼼히 살핀 뒤 "189명이 성형수술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눈만 한 사람은 87명, 코만 한 사람 8명, 눈·코를 다 한 사람 94명이었다.

다른 의사들이 다른 날짜에 같은 장소를 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지난 8일 오후 6시, 정재호(44·프로필성형외과)·윤원준(44·미고성형외과) 전문의가 A백화점 식품매장에서 같은 방법으로 2차 조사를 벌였다. 두 사람은 "300명 중 120명이 성형을 한 것 같다"고 했다. 눈 17명, 코 67명, 눈·코 36명이었다. 1차(189명)와 2차(120명)의 편차는 왜 생겼을까? 정 전문의와 윤 전문의는 "전문가라도 '관찰'이기 때문에 개인차가 있을 수 있어 한 사람만 '알쏭달쏭하다'고 해도 뺐다"고 했다.

은평구 B할인매장…두 명 중 한 명꼴

지난달 2일 오후 6시, 서울 은평구 B할인매장 식품매장. 응암동·역촌동·신사동 등 인근 지역의 다양한 계층 주부들이 뒤섞였다. B할인매장 식품매장 손님 한 명이 한번에 쓰고 가는 돈은 평균 5만5000원으로, A백화점의 절반 안쪽이다.

배 전문의가 식품매장 입구에 들어서는 여성 300명을 관찰한 뒤 "149명이 성형을 한 것 같다"고 밝혔다. 눈 99명, 코 1명, 눈·코 49명이었다.

2차 조사는 지난 16일 오후 6시, 홍정근(44·메트로성형외과)·윤정섭(48·윤정섭성형외과) 전문의가 진행했다. 두 사람은 "300명 중 142명이 성형을 한 것 같다"고 했다. 눈 101명, 코 19명, 눈·코 22명이었다.

홍 전문의는 "전체적인 얼굴 비례에서 도저히 나오기 힘든 커다란 눈을 가진 사람이 꽤 보이는데, 대부분 성형을 했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백화점 vs 할인매장 어떻게 다른가

성형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숫자는 강남구 A백화점(600명 중 309명·51.5%)이나 은평구 B할인매장(291명·48.5%)이나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결과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차이점이 눈에 띄었다.

A백화점은 눈·코를 모두 한 사람(130명)이 눈만 한 사람(104명)과 코만 한 사람(75명)보다 많았다. 반면 B할인매장은 전체 인원 가운데 3분의 2가 눈만 사람(200명)이었다. 윤원준 전문의는 "부유층이 많이 사는 지역일수록 성형수술이 보편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얘기"라고 했다.

A백화점은 1차와 2차 조사의 편차가 컸다. 반면 B할인매장은 양쪽이 비슷했다. 두 곳을 모두 조사한 배준성 전문의는 "A백화점은 성형 여부가 헷갈리는 사람이 꽤 있었는데, B할인매장은 비교적 명쾌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고 했다.

A백화점 2차 조사를 맡은 윤원준 전문의는 "부유층이 많이 사는 지역이라 비싼 병원에서 표가 덜 나게 성형한 사람이 많을 수 있다"며 "전문의 두 명 중 한 명이라도 알쏭달쏭하다는 사람은 모두 추려내 1차보다 숫자가 많이 줄었다"고 했다.

B할인매장 2차 조사를 맡은 홍 전문의는 "요즘 코 수술은 한 듯 안한 듯 고치는 게 유행이라, 과거에 오똑하게 세웠던 사람도 새로 수술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전체 조사와 별도로, 배 전문의가 두 곳을 모두 1차 조사하면서 윤곽수술 여부도 살폈다. 윤곽수술은 부위에 따라 400만~1000만원이 든다. 눈·코에 비해 흔적이 미묘한 까닭에 전체 조사에선 뺐다. 배 전문의는 "A백화점은 1차 조사 대상자 300명 중 27명이, B할인매장은 딱 1명이 윤곽수술을 한 것으로 보였다"고 했다.

명문대 중앙도서관 가보니…열 명 중 네 명꼴

지난달 25일 오전 11시, 남녀공학 명문대 중앙도서관 앞에서 배 전문의가 여학생 300명을 선착순으로 관찰한 뒤 "114명이 성형을 한 것 같다"고 했다. 눈 70명, 코 11명, 눈·코 33명이었다.

이어 지난 12일, 이규호(35·메트로성형외과)·윤정섭 전문의가 같은 방법으로 2차 조사를 벌였다. 두 사람은 "300명 중 122명이 성형을 한 것 같다"고 했다. 눈 87명, 코 21명, 눈·코 14명이었다.

1차와 2차 조사 결과에 큰 편차가 없었다. 양쪽을 합산하면 10명 중 4명 꼴(600명 중 236명)로 성형을 한 것 같다는 결론이 나왔다. 젊은이들에게도 성형이 폭넓게 확산됐음이 확인됐다.

윤 전문의는 "대학 입학 전에 쌍꺼풀 수술을 마치고, 방학 중에 추가로 코를 높이거나 앞트임·뒤트임 수술을 받는 학생이 많다"며 "최근 들어서는 윤곽수술과 지방흡입수술을 받는 대학생도 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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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A, 2012년 지구 멸망설 공개 비난

2009년 10월 22일 (목) 17:46  서울신문

NASA, 2012년 지구 멸망설 공개 비난

[서울신문 나우뉴스]2012년 지구가 소행성과 충돌해 사라진다는 '지구 종말설'이 인터넷에 떠도는 가운데 미국 항공우주국(NASA) 소속 과학자가 이런 주장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올해 말 개봉을 앞둔 지구 종말을 소재로 한 재난영화 '2012'(감독 롤랜드 에머히리)가 2012년 멸망설을 퍼뜨리는 '노이즈 마케팅'을 이용하고 있어 비난을 샀다. 

영화 배급사인 소니 픽쳐스는 개설한 웹사이트에서 "천문학자, 수학자 등 상당수가 2012년 멸망을 믿고 있다."면서 불안심리를 조장하고 있는 것. 

상황이 이렇자 NASA 소속 과학자가 나섰다. 우주생물학 협회의 데이비드 모리슨 박사는 "지금껏 2012년 지구가 멸망하냐는 질문을 수천 명으로부터 받았다."고 입을 열었다. 

이어 모리슨 박사는 "상업 영화가 의도적으로 불안심리를 이용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ethically wrong) 행위"라고 비난했다. 

이에 비키 루야 홍보 책임자는 "이 사이트에는 영화 로고가 곳곳에 있어 오해할 소지가 거의 없다."면서 "픽션 무비라는 건 누구나 아는 이야기"라고 펄쩍 뛰었다. 

한편 올 초부터 지구 종말론자들을 중심으로 마야달력이 끝나는 2012년이 지구의 마지막 해가 될 것이라고 주장이 제기됐다. 

여기에 일부 천문학자까지 나서 지구가 명왕성 궤도 바깥쪽인 카이퍼벨트에 있는 미확인 행성과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해 불안 심리를 자극했다. 

일부 청소년들은 지구 종말이 오기 전에 자살을 하거나 처녀성을 파는 등 극단적인 행동을 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혀 사회 문제로 대두된 바 있다. 

대다수 천문학자들은 2012년 지구 멸망설은 매년 제기되는 근거 없는 설 중 하나일 뿐이라고 동요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사진=영화 '2012' 스틸컷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newsluv@seoul.co.kr 

日 장관 간부회의 점심도 ‘더치 페이’

 
日 장관 간부회의 점심도 ‘더치 페이’
 
후생노동상, 500엔씩 받고 영수증 끊어
 
문화일보 김성훈기자 tarant@munhwa.com
 
‘장관 간부회의에서도 점심값은 더치 페이!’

일본의 나가쓰마 아키라(長妻昭) 후생노동상이 국장급 이상 오찬 간부회의를 주재하면서 참석자들에게 500엔(약 6500원)의 도시락 비용을 현장에서 징수하고 영수증을 발급해 화제가 되고 있다. 24일 일본 마이니치(每日) 신문에 따르면, 20일 나가쓰마 후생상이 소집한 간부회의에 참석한 관료들은 점심 도시락값을 각자 지불했다. 도시락값에는 음료수(차) 비용도 포함됐다. 일본은 공무원이건 회사원이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접대외의 회식을 할 때 식비를 균등 분할해 부담하는 것이 일반화됐지만 장관이 소집한 간부회의에서까지 도시락값을 받는 것은 이례적이다. 

이날 회의는 나가쓰마 후생상이 9월16일 민주당 정권 출범과 함께 취임한 이후 처음으로 소집한 간부회의였다. 탈 관료를 내건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정부에서 대신(장관)들은 보고를 받는 것 외에는 부대신과 정무관을 제외한 관료들과의 회동을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다. 나가쓰마 후생상이 주최한 간부회의에 참석한 관료들은 이날 정권 교체와 새 장관의 스타일을 피부로 톡톡히 실감했다. 내각 출범 후 한 달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회의 참석자들은 후생상의 요청에 따라 회의 시작전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했다. 

나가쓰마 후생상은 “간부 여러분의 지도를 잘 부탁드린다. 국회 예산확보에 노력해달라”고 당부했다. 이날 회의는 나가쓰마 후생상이 자신을 포함한 정무 3역과 공무원 출신 관료들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마련했다. 

김성훈기자 tarant@munhwa.com

日국민 49% "한국에 위안부 사과해야"

 

日국민 49% "한국에 위안부 사과해야"

처음으로 여론 역전 "사과 불필요" 30.3%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이 공식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본인이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일본인보다 처음으로 더 많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정재정)은 지난 8월 초 한·중·일 세 나라 수도의 시민을 각각 500명 정도 조사한 결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도쿄 시민 중 48.9%가 '일본이 공식사과해야 한다'고 답했고, 30.3%는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답했다고 19일 밝혔다. 특히 '사과해야 한다'는 의견은 여성(53.6%)과 30~40대(57.8%)에서,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은 남자(38.1%)와 60세 이상(34.5%)에서 높게 나타났다.

이 조사가 시작된 2007년에는 '사과할 필요가 없다'가 50.4%, '공식사과해야 한다'가 38.4%였고, 2008년에는 '사과할 필요가 없다' 53.6%, '공식사과해야 한다' 40.8%였다.

이번 조사결과는 일본 총선 직전에 실시됐지만, 하토야마 일본 민주당 정권 출범 이후 역사문제에 대한 일본인들의 인식 변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된다.

한편 한·중 관계의 전망을 묻는 질문에 '앞으로 더 좋아질 것'이라는 응답이 한국인은 지난해보다 증가(52.3%→60.3%)했지만, 중국인(74.2%→61%)과 일본인(31.6%→23.3%)은 큰 폭으로 감소했다. 한·일 관계에 대한 전망은 한국인과 일본인은 긍정적 전망이 44% 내외에서 비슷한 반면, 중국인은 긍정적 전망이 30.1%로 다소 낮았다.

또 한·중·일의 역사 쟁점 중 가장 먼저 풀어야 할 문제로 한국인은 '독도문제 해결'(23.6%)을 꼽은 반면, 중국인은 '영토 문제'(12.3%), 일본인은 '역사의식 정립'(11.2%)을 꼽았다.

이번 조사는 동북아역사재단이 한국갤럽에 의뢰해 지난 8월 1일부터 9일까지 서울 527명, 베이징과 도쿄 각각 500명의 시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것으로 신뢰수준은 95%±4.4%이다.





이한수 기자 hslee@chosun.com

"한국과 관계 좋다" 일본인↑ 중국인↓

 

"한국과 관계 좋다" 일본인↑ 중국인↓

(서울=연합뉴스) 김지연 기자 = 지난 1년 사이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보는 일본인은 늘어난 반면 한국과 중국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보는 중국인은 줄어들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19일 동북아역사재단에 따르면 한국갤럽에 의뢰해 8월 1-9일 서울 527명, 베이징 500명, 도쿄 500명을 상대로 실시한 한중일 관계에 대한 설문 조사에서 일본 응답자의 65.5%는 한일 관계를 긍정적으로 봤다. 

이는 지난해 조사의 53%보다 12.5%포인트 높아진 것이다.

한국인은 지난해 22%보다 22.3%포인트 많은 44.3%의 응답자가 한일 관계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한국과 중국의 관계에 대해서는 중국인 67.4%가 긍정적으로 답했다.

하지만, 이는 2007년(87.6%), 2008년(72.4%)에 이어 지속적으로 긍정적인 응답률이 낮아진 것이다. 

한국인은 지난해 36.4%보다 많은 58.9%가 한중 관계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에 대해 동북아역사재단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전후로 제기된 혐한론, 한국내 유학생 난동 사건 등 한국내에서 중국을 부정적으로 인식할 만한 사건이 올해는 상대적으로 적었고, 한일 관계의 경우도 부정적 영향을 줄 만한 특별한 이슈가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역사적인 쟁점 현안은 세 나라 응답자 모두 자국과 연관된 사안은 높은 인지도를 보였으며, 공통적으로는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일본군 위안부,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에 대해 인지도가 높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에 대해서는 한국인 97.5%, 중국인 88.3%가 사과해야 한다고 응답해 일본인 48.9%와 큰 차이를 보였다. 다만, 공식 사과에 대한 일본인의 지지율은 2007년 38.4%, 2008년 40.8% 등 꾸준히 늘어났다.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반대하는 한국인은 73.3%로, 2007년(82%), 2008년(78.8%)에 이어 줄었으며 일본에서도 참배에 대한 부정적 의견이 44.2%, 35%, 28.3%로 최근 3년간 꾸준히 줄었다. 반면, 중국인은 85% 내외의 반대 의견이 3년간 이어졌다.

독도 표기 방법에 대해서는 한국인의 98.3%가 독도로, 일본인의 62.2%가 다케시마로 표기해야 한다는 의견이었으며 그 이유로도 각각 '한국 땅이어서'와 '일본 땅이어서'를 꼽은 이들이 가장 많았다.

이번 조사의 표본오차는 95%의 신뢰수준에 한국 ±4.3%포인트, 중국과 일본 ±4.4%포인트다.

cherora@yna.co.kr

"일제도 안중근 日법정 재판 부당성 인정"

 
2009년 10월 18일 (일) 05:33  연합뉴스

"일제도 안중근 日법정 재판 부당성 인정"

신운용 연구원, 이토 히로부미 등 전문기록 발견 
"재러한인에 日재판권 없어"…"한국과 협의 필요성 인정" 
(서울=연합뉴스) 임형섭 기자 =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앞두고 일제가 하얼빈 의거와 같이 조선인에 의해 외국에서 발생한 사건에 재판권을 행사한 것은 국제법상 하자가 있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한 사료가 발견됐다. 

더욱이 그런 판단을 내린 당시 일제 수뇌부가 결정 몇 년 뒤 안 의사의 손에 절명한 이토 히로부미 본인이었던 것으로 드러나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신운용 책임연구원은 안 의사 의거 2년 전인 1907년 하얼빈에서 한국인 김재동 등이 일본인을 살해한 사건에 관한 기록을 최근 일본의 외교사료관에서 발견해 18일 공개했다. 

자료는 일본 정부가 재판을 준비하는 과정과 이후 재외 한인에 대한 재판권 문제를 검토한 내용 등이 포함돼 있다. 

김재동 사건 직후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였던 카와카미 도시히코는 러시아가 그의 신병을 넘겨주려 하지 않자 고무라 주타로외상에게 전문을 보낸다. 

카와카미는 "(일본이) 한국인에 대해 재판권을 갖지 않는다고 하면 인도받지 않는 것이 지당하다고 사료되나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훈령을 청한다"고 문의했다. 

그러자 고무라 외상은 카와카미에게 "한국인들의 신병을 인도받으라"는 훈령을 내렸고, 일본 정부는 결국 이들을 넘겨받아 직접 재판해 사형 등을 선고했다. 

이후 일본 정부는 재외 한인으로 인해 발생한 사건의 재판권을 어떻게 행사할 것인지를 논의했는데, 이듬해 이토 히로부미가 이 사건과 관련해 하야시 다다스 외상에게 보낸 전문이 주목된다. 

이토는 전문에서 "재외 한인 재판사무에 대해 한국 정부와 협의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인정한다"며 "그러나 이 경우 법률 관제(제정) 등이 필요할 뿐 아니라 실행상 지장이 적지 않으므로 협의할 필요가 없다"고 밝혔다. 

이토 역시 하얼빈에서 조선인에 의해 일어난 사건을 일본이 직접 재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신 연구원은 "당시 국제법에 따르면 사건이 발생한 러시아에서 재판을 주관해야 하고 일본에 신병을 인도하려면 한국과 협의를 거쳐야 했다. 하지만 사료에서 보듯 일본은 `편의상' 재외 한인에 대한 사법권을 불법적으로 가져갔고 그 부당성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일제가 이후 안 의사의 재판권을 러시아로부터 가져오는데 이 사건을 `선례'로 삼았다는 점도 드러났다. 

의거 후 구라치 데츠기치 정무국장은 이시이 기쿠지로 외무차관에게 안 의사 신병 처리를 문의하며 `선년 재청(지난해 청나라에 있는) 영사에게 발한 훈령을 참조해 의견을 지급 바란다'고 전보를 보냈는데, 해당 훈령은 김재동 사건에서 고무라 외상이 보냈던 것이기 때문이다. 

신 연구원은 "일본 스스로도 국제법에 어긋난다고 인정한 김재동 사건이라는 선례가 하얼빈 의거 후 안 의사의 재판권을 일본이 가져오는데 중요한 근거로 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일본이 안 의사를 일본 법정에서 재판한 것이 정당한 것이었느냐에 관한 한일 역사학계의 논란이 새 국면을 맞을 전망이다. 

서울시립대 정재정 교수는 "일본 측은 러시아가 안 의사의 신병을 스스로 넘겨줬기 때문에 일본 법정 재판은 당연한 조치였다고 주장해 왔다"며 "이번에 발견된 이토 히로부미의 전문 내용 등은 일본 학자들 논리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어 "안중근 재판이 러ㆍ일간 정치논리로 이뤄졌다는 것이 지금까지 정설이었다면, 이번 논문은 일본의 치밀한 공작의 산물이라는 측면을 새로 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평했다. 

hysup@yna.co.kr 
 

 

안중근의사 순국前 사진원본 국내 첫 공개

 
2009년 10월 09일 (금) 04:07  서울신문

안중근의사 순국前 사진원본 국내 첫 공개

[서울신문]안중근(1879~1910) 의사의 의거(19 09년 10월26일) 100주년을 앞두고 안 의사가 중국 뤼순(旅順)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다 순국하기 전까지 5개월간의 과정을 담은 사진 원본과 감옥에서 남긴 글씨가 8일 국내에 처음 들어왔다. 

이들 사진 27점과 유묵(遺墨·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 3점은 일본 류코쿠(龍谷)대가 소장품을 대여한 것으로, 국내에서는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이들 사진과 유묵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26일부터 내년 1월24일까지 '독립을 넘어 평화로' 특별전을 통해 일반에 공개된다. 

체포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찍은 것으로 보이는 안중근 의사의 상반신 사진은 코트를 입은 가슴에 수형 번호가 적힌 리본을 달고 양손을 가슴에 모아 왼손 약지 단지 흔적이 선명하게 보인다. 

서예박물관 이동국 학예사는 "이제까지는 원본을 복제한 희미한 복사본 사진만 볼 수 있었는데 이번에 100년 전 안중근 의사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차 고국 땅을 밟은 안중근 의사 유묵 3점은 논어의 경구인 '不仁者不可以久處約'(불인자불가이구처약·어질지 않은 자는 곤궁에 처했을 때 오래 견디지 못한다)과 '敏而好學不恥下問'(민이호학불치하문·민첩하게 배우기를 좋아하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중용의 경구인 '戒愼乎其所不睹'(계신호기소불도·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도 스스로 경계하고 삼간다)를 적었다. 유묵은 모두 사형집행 직전인 1910년 3월에 쓴 것으로 약지의 단지 흔적이 있는 왼손을 눌러 찍은 안 의사의 장인(掌印)이 있다. 

27장의 사진 중에는 면회 온 정근·공근 두 아우와 프랑스인 신부 홍석구(조세프 빌레앙)에게 "내가 죽은 뒤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라고 유언을 남기는 모습, 호송마차를 타고 형무소에서 법원으로 재판을 받으러 가는 광경, 의거에 사용한 브라우닝식 연발 권총과 탄환을 찍은 사진 등이 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법원 판결문은 여전히 ‘왜색’

법원 판결문은 여전히 ‘왜색’

ㆍ사시미칼…빠루…고수부지…

국내 최고의 엘리트 집단인 판사들의 국어실력은 과연 어떨까.

연합뉴스는 한글날을 하루 앞둔 8일 판사들이 우리말을 바르게 쓰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법원 전산망 코트넷에 등록된 판결문을 분석했다. 그러나 결과는 의외였다. 맞춤법이 틀리는 등 한글 사용에 적지 않은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예컨대 조직폭력배 사이에서 흔히 사용되는 ‘사시미칼’이란 단어는 형사사건 판결문에서 흔히 등장한다. 일본어로 ‘생선회’라는 뜻의 ‘사시미(刺身)’가 그대로 쓰여진 것. 이를 ‘회칼’로 바로잡지 않은 탓이다. 공사현장에서 사용되는 ‘빠루’라는 말도 판결문에 자주 등장한다. 이 연장은 ‘배척’ 또는 ‘노루발못뽑이’라고 써야 옳다.

우리말 ‘갓길’로 바꿔쓸 수 있는 ‘노견(路肩)’이라는 말은 올해 53건, ‘고수부지’(둔치)는 1665건 등 일본식 단어들은 총 1665건이 검색됐다.

맞춤법과 제멋대로 된 외래어 표기도 문제다. ‘서슴지 않고’라고 써야 할 것을 ‘서슴치 않고’라고 잘못 쓴 판결문은 477건으로 제대로 쓴 840건의 절반에 가까웠다. 또 교통사고나 보험금 판결문에 등장하는 ‘복사뼈’는 ‘복숭아뼈’로 잘못 쓴 경우가 118건으로 맞게 쓴 64건보다 많았다. 전통무술의 하나인 ‘태껸’은 ‘택견’이라고 잘못 표기된 판결문만 100건이나 됐고 보도블록도 ‘보도블럭’으로 잘못 표기된 판결문이 2709건에 달했다.

외래어 표기법을 제대로 따르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다. 내비게이션을 ‘네비게이션’(304건), 렌터카를 ‘렌트카’(1만2137건), 싱가포르를 ‘싱가폴’(745건) 등으로 잘못 사용하고 있으며 이외에 슈퍼마켓을 수퍼마켓, 멤버십을 멤버쉽, 초콜릿을 초콜렛 등으로 잘못 적은 경우도 상당 수 있다. 특히 한 문단, 길게는 한 페이지 이상을 끊지 않고 써내려가는 만연체 문장도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윤대헌기자>

한국인 자살률? 세계 최고 수준! 왜 그럴까?

한국인 자살률? 세계 최고 수준! 왜 그럴까?

 
< 8뉴스 > 

< 앵커 > 

한국인은 옷 입을 때나 음식을 먹을 때 다른 사람들이 하는걸 따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자살률과 양주 소비율은 세계 최고 수준인데요. 

왜 그런지 조동찬 의학전문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 기자 > 

[김 모 씨/1년 전 부인과 사별 : 사실 죽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사실 죽으려는 시도도 한 두 번 정도 하고…] 

OECD 국가 중 최고인 자살률, 양주소비율 역시 세계최고인 한국인의 특성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삼성사회정신건강연구소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자아정체성을 조사한 결과 조사대상의 74%, 즉 4명 중 3명이 현실순응형으로 나타났습니다. 

현실순응형은 안정된 삶을 추구하지만 주변 권위에 복종하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성찰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 때문에 위기가 닥쳤을 때 술이나 약물 중독 심지어는 자살 등 극단적인 행동 가능성이 높게 됩니다. 

현실순응형은 조직과 사회 발전에 큰 공헌을 하지만, 개인의 행복지수는 떨어지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각 유형이 고르게 분포된 미국, 유럽과 달리 현실순응형 비율이 3배나 집중된 것으로 나타났는데, 대가족제도와 대기업문화 그리고 군사문화가 원인으로 분석됩니다. 

[이동수/삼성사회건강연구소 소장 : 고도의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학력 중심이라든지 개인보다는 어떤 그 집단을 더 추구하는….] 

자아정체성은 청소년시기부터 형성되는데, 개인의 특성과 개성을 존중해 주는 문화가 뒷받침돼야 합니다. 

조동찬 dongcharn@sbs.co.kr 

오키나와 주민의 장수 비결은?

오키나와 주민의 장수 비결은?

日 전문가 "동물성 단백질. 식이섬유 섭취 덕분"

일본의 대표적 장수지역인 오키나와 주민은 기름을 제거한 고기와 유지(乳脂) 등을 자주 섭취하는 것으로 보고됐다.

일본 전통식품화연구소 이시테 나오미치(石手直道) 소장은 8일 전북 순창군에서열린 '2009 순창 국제 장수 심포지엄'에서 "동물성 단백질이나 유지, 식품성 섬유를섭취하는 식생활 전통을 가진 오키나와현이 일본에서 장수하는 비율이 가장 높았다"고 밝혔다.

이시테 소장은 "일본은 불교사상과 고유 종교인 신도의 영향을 받아 오랜 기간 동물을 죽여 고기를 먹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으나 오키나와는 1872년까지 본토의 지배를 받지 않은 반 독립국으로서 지위를 유지하면서 육식을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불교가 보급되지 않은 오키나와에서는 돼지와 염소, 닭 등이 식용으로 사용됐다"며 "기름기가 있는 고기를 장시간 물에 데쳐 지방을 제거한 후 요리했으며 유지를 활용해 채소나 두부를 볶는 요리법도 발달했다"고 말했다.

이어 "산호초로 이루어진 섬이 많아 벼농사가 적합하지 않은 오키나와는 17세기부터 고구마가 주식이 됐으며, 이 같은 식품 섭취로 오키나와는 일본의 다른 지역보다 평균 수명이 월등히 높았다"고 덧붙였다.

전경수(서울대 인류학과)교수는 '보존과 접신의 발효문화론'이란 주제 발표에서"인류의 음식연구는 날 것과 익힌 것, 썩은 것에만 국한됐다"며 "발효과정의 장점을최대한으로 활용한 삭힌 음식, 특히 홍어에 대해서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 교수는 "삭힌 홍어는 건강한 생활의 담보를 위한 음식문화의 발명"이라고 극찬한 뒤 "홍어는 발효를 통해 영양소들을 증가시킬 뿐 아니라 각종 질환예방에도 유용한 음식"이라고 말했다.

그는 "홍어가 발효할 때 생성되는 암모니아는 위산을 중화시키고 장의 잡균을 제거하며 체내에서 해로운 세균의 증식을 억제하는 작용을 한다"면서 "특히 삭힌 홍어는 성장 발달과 두뇌발달, 인지기능 강화 등을 향상시키는 필수 아미노산 등이 풍부하다"고 덧붙였다.

순창=연합뉴스 / 20091008 15:47

대학생 해외인턴십을 일목요연 소개한 주간조선

 


* 대학생 해외인턴십을 일목요연하게 소개한 주간조선의 자료
→ 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4/21/2009042101314.html
 
 
해외인턴십 안내-- 더 좁아진 취업문… 해외로 나가볼까--알짜 인턴십을 찾아라!
지난 3월 25일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은 ‘글로벌 청년리더 양성사업 활성화를 위한 업무 협약’을 체결했다. 협의회가 해외인턴십 유경험자 데이터베이스를 한국산업인력공단 ‘글로벌리더종합정보망
(www.globaljump.go.kr)에 등재하면 공단은 이를 활용해 해외취업 기회가 생겼을 때 적임자를 알선, 추천한다는 게 협약의 주요 내용. 해외인턴십이 단순한 경험이 아닌 취업을 위한 실질적 관문이 될 수 있게 하자는 의도다. 대학생과 청년 구직자를 대상으로 하는 해외인턴십 프로그램의 규모와 종류가 날로 다양해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건 일정 비용을 지원받을 수 있고 신뢰도가 높은 정부 주도 프로그램이지만 최근엔 전문 알선업체나 해외 유명 대학이 주체가 돼 운영하는 프로그램도 느는 추세다. 여름방학을 겨냥한 프로그램은 대부분 이맘때쯤 접수를 받는다. 나머지도 상반기 중 선발공고가 예정돼 있는 경우가 많다. 해외인턴십 지원자가 참고할 만한 프로그램 정보를 취합했다.

국비 지원 받고 믿을 수 있는 ‘정부 운영 프로그램’
1인당 최대 1600만원… 하반기 선발 5월부터 시작

정부는 글로벌 인재를 양성하고 청년들의 해외취업 기회를 발굴, 지원하기 위해 해외인턴 양성지원 사업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올해는 대학 재학생과 졸업생 등 총 2931명을 대상으로 해외인턴 사업을 실시, 국제적 감각을 갖춘 글로벌 청년리더로 양성하겠다는 복안이다. 교육과학기술부를 비롯해 외교통상부, 지식경제부 등 다양한 부처가 주관한다. 프로그램에 따라 1인당 최대 1600만원의 국비가 지원된다.

외교통상부에서 진행하는 한·미 대학생 연수취업(Work, English Study and Travel·이하 WEST)은 지난 3월 첫 참가자 190명을 선발했다. WEST는 전문대를 포함한 대학교 재학생 및 1년 이내 졸업생을 대상으로 하며 고비용 어학연수를 대체하고 해외인턴십의 현지 적응능력 강화를 위해 미국에서의 어학연수 및 인턴을 연계한 프로그램이다. 어학연수 5개월, 인턴 12개월, 여행 1개월 등 최장 18개월간 미국에 체류할 수 있다. 올 하반기에 1000명을 선발하며 5월이나 6월 중 선발공고가 있을 예정이다. 관련 문의는글로벌인턴추진단(02-732-6407)으로 하면 된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올해 초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와 손잡고 51억여원의 예산을 들여 전문대생 800명을 선발, 해외인턴십 프로그램을 지원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국내에서 4주간 언어·직무 집중교육을 받고 출국해 현지적응교육(4주)을 거쳐 12주간 인턴십을 체험하게 된다. 전공 성적 3.0 이상, 2학기 이상 수료한 전문대생을 대상으로 한다. 항공료, 현지 영어교육비 및 체재비, 보험료 등을 포함하는 지원금액은 파견국가별로 달라진다. 1인당 최대 900만원까지 받을 수 있다. 근무 직종은 호텔 관리, 간호, 임상병리 등 30개. 파견기간은 4개월부터 10개월까지 다양하다. 1학기 선발인원 480명은 이미 출국했으며 2학기 인원(320명) 선발은 오는 5월 27일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 홈페이지(www.kcce.or.kr)에서 공고할 예정이다. (02-364-1563)

지식경제부가 맡고 있는 글로벌 무역전문가양성사업은 대학(전문대 포함) 재학생 및 졸업자 300명을 대상으로 참가자의 항공료와 체재비를 지원한다. 1차로 60명이 선발되었으며 7월에 2차 선발에 대한 공고가 예정돼 있다. 문의는 지식경제부 무역정책과(02-2110-4831)로 하면 된다.

농업진흥청의 글로벌 농업 청년리더 양성사업은 국내 농과계 대학생, 대학원생, 졸업생을 대상으로 대학원 이상 20명, 대학 이상 45명 등 총 65명을 선발할 예정이다. 대학원생 이상 20명은 필리핀·대만·페루 등 세계 각지의 농업연구기관에서, 대학생 이상 45명은 아시아·아프리카·남미 등에 설립될 해외농업기술개발센터에서 6개월간 연수하며 1인당 1400만원이 지원된다. 아직 선발공고는 발표되지 않은 상태. 관련 정보는 농진청 국외농업기술팀(031-299-1088)이나 홈페이지(www.rda.go.kr)를 참조하면 된다.


시간·장소 내 맘대로 ‘알선업체 대행 프로그램’
비용·기간·프로그램 제각각… 온라인 박람회도 개최


어학연수와 유학 수속을 대행해주는 어학원이나 유학원처럼 해외인턴십 역시 관련 절차를 대행해주고 수수료를 받는 업체가 꽤 있다. 모집시기와 연수기간이 정해져 있는 정부 주도 프로그램과 달리 대행업체를 이용하면 특정 날짜와 기간에 구애되지 않고 원하는 시기에 하고 싶은 만큼 참여할 수 있다. 다만 업체별로 신뢰도 차이가 클 수 있으므로 되도록 역사가 오래되고 평판이 좋은 업체를 물색하는 게 바람직하다.

글로벌인턴십(www.globalinternship.net)은 노동부 등록 국비 해외인턴십과 자체 개발한 해외인턴십 프로그램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미국·영국·캐나다·두바이 등의 해외인턴십을 알선해준다. 호주나 일본은 워킹홀리데이 제도를 활용할 수 있으며 싱가포르와 중국의 경우, 중국어 어학연수와 연계된 인턴십 프로그램도 제공한다.

리크루트캐나다(www.recruitcanada.co.kr)는 캐나다 해외인턴십을 전문적으로 취급한다. 어학원 개념을 겸하고 있는 게 특징. TESOL 수료과정 등 학습코스와 인턴십 프로그램을 연계해 직장인이 짧은 시간을 활용해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인턴십 근무지는 캐나다의 호텔과 리조트 등이다.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만든 유학 전문 오픈마켓 유학몬(www.uhakmon.com)은 지난 4월 6일부터 26일까지 ‘제1회 해외유학·인턴십 온라인박람회(fair.uhakmon. com)’를 개최하고 있다. 유학분류존 내 ‘해외인턴십’ 배너를 클릭하면 40여개의 관련 정보를 검색할 수 있다. 미국·캐나다·필리핀·호주 등 다양한 국가의 인턴십 프로그램을 찾아볼 수 있으며 등록비와 급여 수준이 제각각이므로 꼼꼼하게 검토해봐야 한다.

정철어학원이 운영하는 유학포털 정철유학(uhak.jungchul. com)에서도 어학연수와 해외인턴십을 연계한 ‘해외인턴십 어학연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코스는 10주(8주 트레이닝·2주 인턴십)에서 36주(24주 트레이닝·12주 인턴십)까지 다양하며 희망직업과 경력 등에 따라 금융·교육·서비스·인사·마케팅 등 다양한 분야의 인턴십에 참여할 수 있다. 18세 이상이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지만 일정 심사를 거쳐야 한다. 토플 iBT 50점 이상 등 공인영어성적도 필요하다. (02-563-0524)
해외인턴십이 인기를 끌며 해외 대학이 한국 대학생을 겨냥해 직접 프로그램 개발에 나선 경우도 생겼다.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는 올해 처음으로 어학연수와 인턴십을 연계한 한국 대학생 맞춤형 프로그램 EAPP(English for Academic and Professional Purposes)를 준비하고 있다. 대학 기숙사에서 묵으며 오전엔 영어 강의를 듣고 오후엔 각자 희망하는 기관으로 파견돼 인턴십 활동에 참여하는 형식이다. 연수기간은 6월 27일부터 8월 15일까지 7주간, 모집인원은 30명이다.

EAPP 프로그램의 가장 큰 특징은 참가자의 인턴십 선택권이 넓다는 것. 조지워싱턴대가 위치한 워싱턴DC 내 다수의 글로벌 기업 및 국제기구가 참여한다. 대표적인 곳으론 세계은행, 디아스포라 투자금융 프로젝트, 미국은행연합, 국제학생회의, 정치전문지 폴리틱스 매거진 등이 있다. 지난 4월 14일엔 미국 60개 지부, 전세계 400개 이상의 지부를 갖춘 세계적 민간환경단체 시에라클럽과도 인턴십 협약을 체결했다. 문의는 EAPP 프로그램 홈페이지(www.gwueapp.com)를 참조하면 된다.

영국 케임브리지대도 영국 남동부에 위치한 콩코드 인터내셔널 어학교와 연계해 어학연수와 케임브리지 인턴십을 동시에 수료할 수 있는 패키지 상품을 내놓았다. 영국 학생비자를 받고 합법적으로 근무하며 현지 생활비를 조달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 어학연수닷컴(www.estudytour.com)이 수속절차를 대행한다.


▶ 해외인턴십 지원 시 유의할 점

정부 프로그램  해당 국가 언어 능력이 기준
대행업체          별도 비용 없는지 살펴야

정부가 지원하는 대학생 해외인턴십 프로그램은 대부분 응시 기간이 제한돼 있다. 또한 해당국가 언어 구사능력이 우수해야 발탁될 수 있으므로 철저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해외인턴십 프로그램은 ‘국비(교비) 지원’이란 단서가 붙어 있어도 100% 지원은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본인부담금이 어느 정도인지 따져본 후 지원할 필요가 있다.

대행 업체를 이용할 경우엔 참가비 외에 수속료 명목의 별도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일부 프로그램은 비자 문제를 이유로 ‘일정 기간 어학연수를 받아야 인턴으로 근무할 수 있다’는 단서가 붙기도 한다. 이런 경우엔 참가비에 어학연수 학비가 더해져 비용 부담이 커질 수 있다. 연수 프로그램의 수준이 형편없을 경우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할 수도 있다. 신생업체의 경우 수속비만 챙기고 해외 일자리 알선엔 정작 소홀한 사례도 있으므로 더욱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 최혜원 기자 happyend@chosun.com

"여성비하" 사진거장 아라키 작품 광고사용 금지

 

 
 "여성비하" 사진거장 아라키 작품 광고사용 금지
 
 


[스포츠서울닷컴ㅣ이명구기자] 
광고에 사용된 세계적인 사진작가 아라키 노부요시의 작품이 여성비하 논란에 휘말려 결국엔 게재 금지명령이 내려졌다. 문제의 사진은 허벅지를 살짝 드러내고 전통 일본옷인 기모노를 입고 있는 여성이 손을 뒤로 한채 밧줄로 묶여있는 장면. 이탈리아의 한 업체가 이 사진을 광고로 사용했지만 광고 감시 기관인 ASA가 미디어에 게재 금지 명령을 내렸다.
 
광고를 기획한 Bisazza는 이 이미지를 사용해 잡지 '보그'와 '엘르 데코레이션' '월페이퍼 앤 더 월드 오브 인테리어' 등에 선보였다.

하지만 "여성을 비하하고 있다" "여성에 대한 성폭행을 암시한다"는 불만이 ASA에 제기됐다. 결국 ASA는 "예술적 양식으로 표현했다해도 성폭행이 있었던가 아니면 앞으로 행해질 것을 암시하고 있다"면서 광고 게재 금지를 결정했다.
 
이에대해 Bisazza는 모델은 일본의 게이샤를 표현한 것으로 사진은 예술적인 것이며 과도한 변태를 묘사할 의사는 없었다고 변명했다.

아라키 노부요시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일본의 사진작가로 유명 미술관에 작품이 전시돼 있다. 하지만 너무 과격한 성적표현으로 '포르노 사진작가'로 불리기도 했다. 2003년엔 한국에서도 사진전이 열려 화제를 모은 바 있다.

日주최 세계여행박람회서 “독도는 한국땅” 홍보

2009년 09월 20일 (일) 16:35  경향신문

日주최 세계여행박람회서 “독도는 한국땅” 홍보

일본 도쿄 빅사이트에서 열린 세계여행박람회에서 '독도'가 홍보되자 일본 주최측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세계여행박람회 한국관에 독도 홍보 포스터가 걸려있다.(사진=ZAKZAK)20일 산케이신문 계열 인터넷신문 'ZAKZAK'에 따르면 경상북도는 '한국관' 부스에서 독도 사진과 함께 일본어로 '대한민국의 보물섬 울릉도 독도'라고 적은 포스터를 내걸고 책자 '신비의 섬 울릉도·독도', 팸플릿 '바다와 별 동해 테마 여행' 등을 배포해 독도의 매력을 소개했다. 아울러 울릉도에서 출항하는 관광선도 소개하며 독도관광을 홍보했다. 

경상북도는 일본어로 '동해안 스케치여행'이라고 적힌 그림엽서도 배포하고 있는데 이 엽서에는 독도 그림이 그려져 있고 "우리 민족과 영원히 함께 하는 섬"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 신문은 "단순한 관광 홍보인지 정치적 주장인지 그 의도가 궁금하다"며 "독도가 역사적으로 일본 영토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불법점거하고 관광객을 불법 상륙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박람회의 일본 주최측은 "모든 홍보물을 일일이 파악하지 못했다"며 당혹감을 표시하면서도 "박람회에 출전한 국가(지자체)들도 손님이기에 홍보물 철거 요구는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일본여행협회(JATA)가 주최하는 세계여행박람회는 151개 국가 및 지자체가 자국의 관광지를 홍보하는 아시아 최대의 이벤트로 알려져 있다. 한국관광공사는 "이번 박람회를 포함한 다양한 한국 관광 홍보를 통해 올해 외국 관광객 800만명 유치 및 2012년 1000만명 유치 목표를 달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일본 외무성은 "한국 땅(울릉도)을 거쳐 독도로 가면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며 자국민에게 독도 방문을 자제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 경향닷컴 고영득기자 ydko@khan.co.kr > 

재범 사태에 美 교민사회 '흥분'

 

 

재범 사태에 美 교민사회 '흥분'

조선닷컴 뉴스미디어부 이승우 기자 press011@chosun.com 

입력 : 2009.09.11 20:18 / 수정 : 2009.09.11 20:55

"(한국은) 교민들에게 작은 실수 하나 용서받을 기회조차 없이 추방될 수 있는 두려운 곳으로 바꿔버렸습니다. 무엇보다는 이 일을 직접 본 시애틀교민께서 모국에 대해서 느낄 상실감과 배신감은 여기에 있는 저희들보다 말할 수 없이 깊으리라 생각됩니다."
미국 뉴욕시 맨하탄에 살고 있는 30대 교포 1.5세라고 소개한 한 네티즌은 최근 한국인 비하 발언으로 논란에 휩싸인 2PM의 멤버 재범의 사태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현재 교포사회에선 '재범 사건'이 화제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이에 따른 부작용 역시 상당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이 교포는 "미국교포 출신으로 성공한 한국가수란 존재는 굉장히 부러운 선망의 대상이 돼 한국과 한글을 배우고 싶어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며 "하지만 지난 며칠 사이에 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일이 발생했다. 4일간 재범씨에게 일어난 일이 몰고 온 거대한 충격은 교포사회가 가지고 있던 한국이란 나라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정반대로 뒤집히게 되는 이유로 작용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교포를 비롯한 혼혈인들이 좋은 일로 유명해져 매스컴을 타게 되면 그렇게 강하게 한국계임을 강조하다가도 이런 일에는 외국인이 되어 '양키 고 홈' 이라는 소리 따위를 들으면서 쫓겨가야 한다면 우리가 과연 어디를 뿌리로 여기고 모국 또는 조국으로 부르면서 마음의 위안을 삼아야 하겠느냐"며 "도대체 왜 그 어리고 힘없는 재범씨에 한국의 가장 아름답고 따스한 정으로 감싸 안아주지 않고 손가락질만 해 도망치는 떠나 보내야 했는지 너무나 서럽다"고 덧붙였다. 
그런가 하면 재범을 둘러싼 각종 논란을 접하고 있는 교민사회는 한결같이 참담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 30대 교포에 따르면 일부 교민들은 겨울 방학 동안 한국을 방문해 한국문화를 체험할 계획을 취소했다고 한다. 이렇듯 한국의 이미지가 교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기 시작한 것은 최근 재범 사태가 언론에 보도되면서부터였다. 
교민들은 "어린 아이들을 공부 시키기에는 한국은 무서운 나라라는 인식이 박히게 된 것인지 한국말을 거의 못하는 아이들을 어떻게 보내느냐"며 "특히 한국의 대중가요에 심취한 십대들에겐 더욱 충격으로 다가와 한국이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민주주의 국가인지에 대한 의심이 든다"고 전했다. 

하토야마 "일본의 정권교체는 오바마 덕분"

 
2009년 09월 03일 (목) 05:45  노컷뉴스

하토야마 "일본의 정권교체는 오바마 덕분"

[워싱턴=CBS 박종률 특파원] 

54년 만의 정권교체를 이루며 오는 16일 차기 일본 총리로 취임하는 하토야마 유키오 민주당 대표가 3일 "이번 승리는 오바마 대통령 덕분"이라고 밝혔다. 

하토야마 대표는 이날 새벽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가진 전화통화에서 "민주적인 방식으로 일본에서 첫 정권교체가 이뤄졌다"면서 "변화는 용기를 필요로 하는데, 바다 건너에 있는 (변화를 앞세워 정권교체를 이룬)오바마 대통령과 미국민들이 일본 국민들에게 용기를 줬다"고 말했다. 

하토아먀 대표는 또 "(이달 하순에) 미국을 방문하게 될 때 만나고 싶다"면서 "오바마 대통령은 기후변화와 핵폐기 등 현안해결을 위한 리더십을 발휘해 왔으며, 일본 민주당도 이에 동참하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양국간의 건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싶다"고 말하고 "특히 경제분야에서도 긴밀한 협력을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미국측 요청으로 이뤄진 이날 전화통화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일본 민주당의 선거승리를 축하한다는 뜻을 전했고, 양국 동맹관계를 지속한다는 데에도 의견을 같이 했다. 

그러나 이날 전화통화에서는 최근 이슈로 떠오른 주일 미군기지 이전문제와 관련한 논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하토야마는 오는 23일부터 뉴욕에서 개최되는 유엔총회와 다음날 피츠버그에서 열리는 G20 금융정상회의에 잇따라 참석하는 것으로 세계 무대에 공식 데뷔하게 된다. 
nowhere@cbs.co.kr 

일본에서 창업-아이템, 유통구조 파악이 관건

 
한국무역의 길잡이 주간무역
 
 
 
아이템, 유통구조 파악이 성공의 관건 
/인터뷰/ 이순배 거산재팬주식회사 사장
 
▲     이순배 사장
“일본시장이 큰 것 같지만 한국과 마찬가지로 매우 협소하다. 시장이 세분화돼 있어 상품아이템이나 유통구조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으면 성공하기 힘들다.” 

거산재팬의 이순배 사장은 무슨 일을 하든지 공부를 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특히 해외시장 진출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상품의 품질, 가격 뿐 아니라 소비자의 성향, 유통시스템에 대한 이해 등 종합적인 학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엔화강세기조가 상당기간 유지될 것으로 기대되면서 최근 일본시장 진출을 계획하고 있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국내 수출기업들의 일본시장으로 성공적인 진출을 돕기 위해 이순배 사장을 전화로 만났다. 그에게서 일본시장 현지화의 조건과 방안에 대해 들어봤다. 




- 일본시장 진출기에 대해 듣고 싶다. 

고향은 충청남도 홍성이다. 한양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하고 회사에 근무하다 잠시 섬유관련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섬유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든 터라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1990년에 고합 일본주재원으로 근무를 하다 1997년에 거산재팬주식회사를 창업했다. 처음에 일본에 진출했을 때는 많이 어려웠다. 

당시 일본은 장기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무역업이다 보니 먼저 제품을 구입하고 납품 후 수금을 하다보니 운영자금을 조달하는 일이 가장 큰 문제였다. 하지만 일본에서 근무한 경험을 살리고 일본정부의 무역진흥정책 등을 면밀하게 살폈다. 결과 일본정부가 중소기업지원을 위해 보증협회의 보증으로 5천만 엔 한도로 대출해주던 ‘안정화자금’을 지원받아 유동성문제를 해결했다. 


- 일본시장에 진출할 때 먼저 해야 할 일은. 

가장 중요한 것은 현지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다. 한국이나 중국도 마찬가지이지만 일본은 특히 나까마(동료의식)이 강하다. 일본인들은 자기들 나까마에 끼워줄 때 매우 엄격하다. 사전에 철저한 조사와 학습이 필요하다. 또 소비자의 특성과 유통시장에 대한 이해도 선행돼야 한다. 


- 일본소비자와 유통구조에 대해 말해 달라.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소비자는 연령, 소득계층 별로 다른 소비행태를 보인다. 젊은 층의 경우 유행에 민감하고 즉흥적으로 구매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중장년층의 경우 인지도가 있는 제품만 구입하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판매하려는 아이템의 특성에 따라 전략을 달리해야 한다. 

일본은 가격과 품질에 따라 유통구조 자체가 다르다. 고급품을 주로 취급하는 백화점, 중간정도 레벨인 양판점(이토요카도, 쟈스코, 다이에 등), 중국제품을 중심으로 저렴하고 품질이 떨어지는 제품만 취급하는 홈센터(게이오, 카인즈, 코난상사 등)가 있다. 유통채널이 구분돼 있듯이 소비자도 양분화 돼 있어 진출하려고 하는 제품의 품질, 가격 등 마케팅포인트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 유통과정에서 일부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는데. 

영업적인 측면에서 보면 품질이 좋고 가격경쟁력이 있으면 당연히 영업하는데 수월할 것이다. 하지만 물건을 한번 파는 것보다 사후관리를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대개 한국기업들의 경우 자기 제품에 문제가 발생하면 소극적인 대응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럴 때 일수록 더 적극적으로 고객에게 다가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위기가 기회가 된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 최근 상황을 보면 호재와 악재가 겹쳐서 일어나는 것 같다. 

비즈니스맨들에겐 지금이 진퇴양난의 시기인 것 같다. 원화약세가 일본시장 확대의 절호의 기회인 것은 분명한데, 일본시장이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보니 아무리 싸게 물건을 가지고 들어와도 잘 팔리게 될지가 의문이다. 그래서 철저한 조사와 시장에 대한 학습이 중요하다. 

이럴 때 공신력 있는 기관들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역협회와 KOTRA가 최근 수출증대에 대한 여러 가지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각 지방자치단체들도 마찬가지다. 공신력있는 기관들의 신용을 잘 활용해 일본 내 바이어와 신뢰를 쌓을 필요가 있다. 

송윤창 기자 

차세대 2차전지 '일본 아성' 깼다

차세대 2차전지 '일본 아성' 깼다
서울경제 기사전송 2009-08-31 15:50 최종수정 2009-08-31 17:56
 

삼성SDI+LG화학 2분기 통합 점유율 일본업체 추월

차세대 핵심산업으로 꼽히는 2차전지 분야에서 삼성SDI와 LG화학 등 국내 업체가 지난 2ㆍ4분기 사상 처음으로 일본의 아성을 무너뜨렸다.

하이브리드차ㆍ휴대폰 등에 사용되는 2차전지는 한번 쓰고 버리는 기존 전지와 달리 충전해서 계속 쓸 수 있는 전지로 차세대 성장산업으로 각광받고 있다.

31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2차전지시장 조사기관인 일본 IIT가 최근 내놓은 2ㆍ4분기 점유율은 1위 산요(점유율 19.6%), 2위 삼성SDI(18.6%), 3위 LG화학(13.4%), 4위 소니(11.8%) 등의 순이었다.

특히 2ㆍ4분기 시장 점유율의 경우 한국 업체가 선전하는 가운데 일본 업체의 정체가 나타나면서 통합 점유율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1ㆍ4분기만 해도 삼성과 LG의 통합 점유율은 26.4%로 일본(소니와 산요) 점유율 32%에 비해 턱 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불과 3개월 뒤인 2ㆍ4분기 삼성(18.6%)과 LG(13.4%)의 통합 점유율은 32%로 일본 소니와 산요의 통합 점유율(31.4%)을 앞질렀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일본보다 늦게 진출한 2차전지 분야에서 한국 업체의 점유율이 앞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그만큼 우리 기술력이 발전했고 이것이 해외에서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라고 지적했다.

2차전지 산업은 일본의 독주를 저지하면서 반도체와 LCD처럼 명실상부한 글로벌 톱 대열에 오르는 것이 가능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조창현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일본 업체를 앞선 것은 기술수준이 대응한 위치에 올라왔고 앞으로 일본을 추월할 잠재력이 있다는 것”이라며 “앞으로 따라가는 전략이 아니라 앞서가는 전략을 구사한다면 일본을 앞설 수 있다”고 말했다.

이종배기자 ljb@sed.co.kr

日정권교체..동포 참정권 주어지나

 
2009년 08월 31일 (월) 11:05  연합뉴스

日정권교체..동포 참정권 주어지나

민단 "희망적", 선거때 민주당 총력지원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일본의 제1야당인 민주당이 54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루자 재일동포들의 최대 관심사인 지방 참정권 획득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은 제45회 중의원 총선거가 공시되자 지부별로 민주당 후보의 당선을 목표로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민주당의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대표가 지난 17일 일본 기자클럽이 개최한 주요 6정당의 당수토론회에서 `영주외국인의 지방참정권'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생각할 때가 왔다"고 공언했기 때문이다. 







또 민주당과 공명당의 후보 중 "참정권을 주겠다"고 공약한 출마자들이 민단에 선거지원을 공식적으로 요청해 왔었다. 

이에 따라 민단 중앙본부와 49개의 지방본부, 354개의 지부, 청년회, 부인회 등은 자신들이 지원하는 후보의 사무소로부터 받은 전단지에 증지(우표) 붙이기, 후보 유세 참가, 포스터 게시, 지원자 명부의 회수 등 총력 지원에 나섰다. 

중앙과 지방본부의 간부들은 지원하는 후보의 선거사무소에 격려차 방문한 데 이어 산하단체의 간부들과 함께 연설회와 출정식에 참가해 얼굴을 내밀었다. 

이처럼 민단은 1946년 창단 이래 처음으로 일본의 선거에 적극적으로 관여해 지방참정권에 찬성하는 후보에 대한 적극적인 응원과 지원을 전개했다. 

지난 26일 일본 민주당 본부와 선거대책사무소를 방문해 7선 의원의 이와 쿠니 데쓰도(岩國哲人) 국제국장과 도이 루이찌(土肥 隆一) 의원 선거 사무실을 방문해 승리를 기원하는 모임을 가졌던 한일기독의원연맹 회장 김영진 민주당 의원은 31일 "아주 희망적"이라고 말했다. 

김 의원은 "이와 쿠니 국제국장은 `(참정권과 관련)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해를 구해야할 당내 일부 의원도 있고, 사민당과 공명당의 의견도 들어야 한다'고 말했다"면서 "신중하면서도 희망적인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의원은 9월11-12일 당선 축하차 다시 방일해 재일동포의 지방 참정권을 허용해 달라고 적극적으로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전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인 이구홍 해외교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과거 자민당은 겉으로는 한일 친선을 얘기하면서도 재일동포의 법적 지위 향상에 대해서는 냉담했다"며 "이런 와중에도 민주당은 `우리는 힘만 있으면 참정권을 실현시키겠다'고 공언한 만큼 이번 정권 교체는 동포들에게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재일동포들은 오랜 기간 지역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납세의 의무를 다하고, 지역사회 발전에 공헌해 왔는데, 주민의 권리인 지방참정권을 부여하지 않는다며 16년 전부터 획득운동을 펼쳐왔다. 그들은 1998년 일본 국회에 참정권 법안이 제출돼 10년 이상이 지났음에도 법안이 성립되지 않은 것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각 정당은 더는 미루지 말고 신속히 입법화할 것을 요구해왔다. 

또 재일동포들은 영주 외국인에 지방참정권을 부여해도 위헌이 아니라는 1995년 최고재판의 결과와 입법화를 요구해 온 많은 지방자치단체 의회의 의견서 채택도 근거로 제시해 왔다. 

정몽주 민단 사무총장은 "민단은 냉정하고 신중하게 대응하면서 문제를 풀어나갈 것"이라며 "앞으로 일본 국회에 참정권 법안이 상정되도록 민주당에 요망서를 보내는 등 지금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ghwang@yna.co.kr 

'54년집권' 낡은정치 진저리… 日국민은 자민당을 버렸다

 

[열도 빅뱅] '54년집권' 낡은정치 진저리… 日국민은 자민당을 버렸다

파벌·세습정치에 환멸 '바꿔보자' 열풍
"전후 日정치 종막…변화의 바람 불 것"

"자민당 정권으로는 더 이상 안 되겠다." 30일 일본 총선에서 민주당을 선택한 일본 유권자들은 한결같이 자민당 정권을 부정해야 할 시기가 왔다고 말하고 있다. 이번 일본 중의원 선거는 민주당에 대한 기대와 열광의 표시라기보다 자민당에 대한 환멸과 부정의 결과다. 자민당 지배의 전후 정치체제가 무너진 것이다.

1955년 창당 이후 일당 지배를 이어온 자민당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참의원 선거 때부터다. 이 선거에서 자민당은 야당인 사회당에 10석 뒤지며 창당 이후 처음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다. 리크루트사가 자민당 거물 정치인들에게 공개 전 주식을 건넨 것이 폭로돼 자민당의 정경유착이 발가벗겨진 이듬해였다. 당시엔 보수정당에 더 없는 버팀목이었던 냉전체제가 막을 내리고, 자민당 최대 공적인 고도성장은 거품이 터지기 직전의 위태로운 절정을 맞고 있었다.

1993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여전히 제1당을 유지했지만 반자민 연립의 호소카와(細川) 내각에 정권을 뺏겼다. 자민당 창당 후 첫 정권교체였다. 이듬해 사회당과 손 잡고 정권을 되찾았지만 자민당은 이제 예전같지 않았다. 단독 정권이 불가능해 사회당, 공명당과 손을 잡아야 정권 유지가 가능했다.

자민당 창당 이듬해부터 73년까지 일본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9.1%. 이후 거품경제가 꺼지기 직전인 1990년까지는 3.8%였다. 이 고도성장이 자민당 1당 지배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잃어버린 10년'의 장기불황을 겪으면서 2007년까지 성장률은 0.3%로 추락, 자민당 입지를 좁혔다.

'우정(郵政)민영화'로 대표되는 고이즈미(小泉) 정권의 작은 정부 지향은 그런 고민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경쟁과 능률을 우선시하는 고이즈미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양극화라는 사회적 고통을 수반했다. 일본 언론 조사에 따르면 자신이 중간층이라고 여기는 일본인이 1987년에는 75%였지만 2006년에는 54%로 줄었다.

자민당의 한계를 체감한 유권자들이 결정적으로 '정권교체'를 결심하게 만든 계기가 있다. 2006년 고이즈미 총리 퇴진 이후 3년 동안 계속된 자민당 정권의 리더십 부재다. 아베(安倍)에서 후쿠다(福田), 아소(麻生)로 이어가며 1년마다 총리가 바뀌었다. 자민당 '55년체제'를 지탱해온 파벌 정치, 선거구를 물려받는 의원 세습 등 자민당의 낡은 구조에 진저리치는 국민들
이 갈수록 늘었다.

이는 곧 민주당이 1998년 창당 때부터 목표로 했던 '정권교체'를 실현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는 뜻이다.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은 관료주도 정치의 개혁을 외치며 낡아 빠진 자민당 체제를 정면 부정했다. 육아지원금 등 서민에 대한 막대한 재정 지원책도 효과를 발휘했다. 노나카 나오토(野中尙人)가 쿠슈인(學習院)대 교수는 "일본 전후정치 체제는 명실상부하게 끝났다"며 "앞으로 10년 이상 서서히 일본 정치는 모든 것이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日 최악 실업·양극화 … 부패·무능 기득권 ‘심판’

 

2009년 08월 30일 (일) 23:46  경향신문

日 최악 실업·양극화 … 부패·무능 기득권 ‘심판’

'심판' 그리고 '변화'. 


8·30 일본 총선 결과는 이 두 단어로 요약된다. 유권자들은 자민당의 54년 독주 체제에 대한 염증과 새로운 정치에 대한 갈망을 민주당에 대한 압도적인 지지로 표출했다. 빈부 격차 확대로 이어진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해 "아니오"라고 선언하면서 '새로운 일본'에 대한 기대를 표현한 것이다. 

보수적인 일본 유권자들이 이처럼 자민당에 등을 돌리며 '변화'를 선택한 것은 자민당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극에 달했다는 증좌다. '유효기간'이 끝난 자민당은 이미 정당으로서 가치를 상실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1955년 출범 후 반공 이데올로기와 경제 고도성장에 힘입어 승승장구해왔지만 변화를 외면하다 민심과 멀어진 탓이다. 

무엇보다도 이번 총선에서 대세를 가른 것은 경제문제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다. 89년 세계 4위를 기록했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지난해에는 14위로 떨어졌고, 국가 부채는 860조엔을 넘어섰다. 그 사이 주가는 반토막 아래로 추락했다. 

경제 위기로 인한 민생 악화에도 불구하고 우왕좌왕하는 정책은 국민들의 불신과 불안을 증폭시켰다. 경제는 악화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길거리로 내몰렸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등한시한 채 '정액급부금 지급' 등 선심성 정책에만 매달렸다. 아소 다로 총리는 선거 기간 중 "정부의 경제정책이 서서히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유권자들은 공감하지 못했다. 총선 이틀 전 발표된 사상 최악의 실업률(5.7%)은 '정국보다는 정책'이라면서 유권자의 신뢰를 얻으려던 자민당의 무능함을 드러낸 결정적 계기가 됐다. 영국의 BBC방송은 "일본이 그동안 기록적인 실업률 증가 등 경기침체에 시달려왔다"며 "어려운 경제상황에 분노한 유권자들이 자민당으로부터의 변화를 선택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2005년 총선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비효율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우정 민영화 등 각종 개혁 조치를 내걸며 바람을 일으켰지만 그가 표방한 신자유주의 정책은 빈부 격차 확대의 부작용만 낳았다. 그의 신자유주의 개혁은 빈부·도농 간 격차를 더욱 벌려놓으면서 민심의 이반을 촉발시켰다. 

자민당의 장기 집권은 관료 조직의 폐쇄성과 함께 이권과 결탁한 유착관계를 형성했다. '정치·관료·기업'의 기득권을 축적하면서 자신들만의 정책을 추진해왔다. 무책임한 정치, 리더십의 부재 역시 자민당 몰락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50대의 젊은 총리인 아베 신조가 후임으로 나섰지만 1년 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뒤를 이은 후쿠다 야스오까지 자진 사퇴하면서 유권자들의 불신을 키웠다. 이번 선거는 이런 자민당을 심판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민주당의 체질 강화도 승리 요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자민당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겨냥해 '새로운 일본' '이번엔 정권교체'라는 슬로건을 전면에 내세운 전략이 주효했다. 자민당이 책임감, 경제 회생을 내걸었지만 반세기 이상 계속돼 온 자민당 체제가 결국은 국민이 아닌 관료를 중심으로 한 정치였다는 점을 부각한 것이 유권자들의 지지로 연결됐다. 

선거전략에서도 민주당이 승리했다. 민주당은 과거 당수의 인기와 이미지를 활용한 '공중전'에서 탈피, 가가호호 누비며 표밭갈이에 나서는 '지상전' 능력을 착실히 수행한 것도 먹혀들었다. 

반대로 자민당은 선거 사령탑 부재라는 악재에 시달렸다. 판세가 악화되자 자민당 간부들은 개인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지역구 선거운동에 매달렸고, 당 차원의 선거 지휘부 기능은 취약성을 드러냈다. 

그러나 민주당의 승리가 자민당에 대한 민심이반에 따른 반사이익의 측면이 강하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민주당에 대한 적극적 지지의 표현이라기보다 집권당에 대한 반감이 작용한 때문이란 것이다. 자민당을 대체할 수 있는 '새 정치'를 주문하는 유권자들의 목소리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 도쿄 | 조홍민특파원 dury129@kyunghyang.com > 

日총선 민주 압승..54년에 정권교체(종합)

2009년 08월 30일 (일) 23:32  연합뉴스

日총선 민주 압승..54년만에 정권교체(종합2보)

(도쿄=연합뉴스) 김종현 최이락 특파원 = 일본의 8·30 총선에서 제1야당인 민주당이 단독 과반수를 확보하면서 자민당을 대파했다. 이에 따라 사실상 54년간의 자민당 장기 지배 체제가 막을 내리고 역사적인 여야 간 정권교체가 이뤄지게 됐다. 

NHK의 개표방송에 따르면 이날 오후 11시 20분 현재 민주당이 단독 과반수(241석)를 20여석 넘어선 263석을 확보하면서 승리를 확정지었다. 반면 여당인 자민당은 84석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이어 공명당 11석, 사민당과 국민신당, 공산당 각 3석 등의 순이었다. 104석은 이 시각 현재 당선자가 확정되지 않았다. 민주당이 확보한 263석은 중의원 상임위원장을 독점할 수 있는 안정다수 의석(252석)을 넘어서는 것이다. 

앞서 NHK는 이날 오후 8시 투표 종료와 동시에 발표한 출구조사 결과에서 민주당이 298~329석을 얻어 84~131석을 얻는데 그친 자민당을 완파하면서 차기 정권을 잡을 것으로 전망된다고 보도했다. 

또 교도통신도 출구조사 결과 민주당이 300석 이상을 얻어 압승하면서 정권교체에 성공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아사히 TV는 민주당이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이 315석을, 자민당이 106석을 얻을 것으로 예측했으며, TBS 방송은 민주당이 321석을 얻을 것으로 예상했다. 

이런 출구 조사 추이대로 민주당이 일찌감치 단독 과반수를 획득한 것으로 나옴에 따라 일본 정치사는 1955년 창당한 자민당에 의한 장기 집권이 일단 마무리되고 야당에 정권 운영이 넘어가는 새로운 역사를 기록하게 됐다. 

민주당의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대표는 이날 당 본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국민의 뜻이 마침내 결실을 보아 정권교체를 이루게 됐다"고 사실상 승리를 선언했다. 

반면 자민당 총재인 아소 다로(麻生太郞) 총리는 "자민당에 대한 불만을 씻어내지 못했다"면서 사실상 패배를 선언하고 총재직 사퇴 의사를 밝혔다. 

하토야마 대표는 정권교체가 확정된 만큼 31일 중으로 '정권이행팀'을 구성하고 자민당으로부터의 정권 인수 작업에 공식 돌입할 방침이다. 하토야마 대표는 오는 15일께 열린 특별국회에서 차기 총리로 선출된다. 

하토야마 대표는 또 예산 낭비 등 자민당 정권의 각종 문제점을 청산하고 민주당 정책을 구현하는 것을 주임무로 하는 행정쇄신위원회도 곧바로 출범시키는 등 '새로운 일본' 창출을 위해 본격적으로 나선다. 

특히 하토야마 대표는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에 반대하는 등 한국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어서 차기 정권에서의 한일관계도 새로운 전기를 맞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미국과의 관계에서는 '긴밀하고 대등한 외교'를 천명하고 있어 미·일 관계의 향방이 주목된다. 

민주당이 이번 총선에서 자민당을 완파하고 정권교체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자민당 장기 지배로 인해 빈부격차나 도시와 농촌 등 지역 간의 격차가 심화하면서 민심이 극도로 악화한 데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또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의 개혁 정책이 오히려 비정규직 양산 등 구조적인 문제를 증폭시킨데다 후임자인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의 잇따른 중도 사퇴, 그리고 아소 다로(麻生太郞) 총리의 민심과 동떨어진 행보도 이번 총선 결과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새로 출범하는 하토야마 정권은 선거 과정에서 제시했던 예산의 전면적인 재편성을 통한 복지분야 지원 확대 등의 정책을 착실하게 추진하면서 내년 7월 예정된 참의원 선거에서 승리, 중의원과 참의원 과반수 확보해 안정적인 국정운영의 기초를 마련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됐다. 

반면, 지난 1993년 과반수 획득 실패로 10개월간 야당 경험을 했던 자민당은 앞으로 제1야당으로서 총재직 사퇴의사를 밝힌 아소 총리의 후임 선출 등 지도부 개편을 통해 당력을 재정비하고 민주당을 견제하면서 재기를 도모할 것으로 전망된다. 

choinal@yna.co.kr 





日, 안중근 의거 배후로 고종 지목

日, 안중근 의거 배후로 고종 지목



고종, 안중근 재판관할권 변경 위해 밀사 파견

이태진 교수 일본 기밀문서 공개

(서울=연합뉴스) 김윤구 기자 = 일본 정부는 안중근 의거의 배후 세력에 고종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고종이 항일 독립운동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밀문서가 발견됐다.

안중근ㆍ하얼빈학회 공동대표인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는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소장자료에서 안중근 의거 이듬해인 1910년 1-3월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 총영사와 조선통감이 고무라 일본 외무대신에게 각각 보낸 보고서 6건을 발견했다고 29일 밝혔다.

이 기밀보고서는 경성에서 하얼빈을 거쳐 1910년 1월27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고종의 밀사 2명이 안중근을 일본 법정에서 러시아 법정으로 관할권을 옮겨 구해내려 했던 정황을 담고 있다.

3월2일자 보고서는 특히 "배일(排日)의 본원(本元)은 물론 한국황제라고 한다. (중략) 작년 10월 하얼빈에서 일어난 흉변(凶變) 사건(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도 궁정에서 연추(煙秋.크라스키노)의 최재형을 선동한 것"이라며 고종을 하얼빈 의거의 배후로 지목했다.

같은 날 보고서에는 또 "니코리스크 시에서 사망한 이용익도 한황(韓皇)의 밀사로서 당시 그가 가지고온 내탕(內帑.왕의 사비)의 잔금 7천엔은 지금도 최봉준의 집에 보관돼 있다고 한다"고 기록됐다.

앞서 2월17일자 보고서에는 고종의 밀사가 블라디보스토크 거류민회에 출석해 "아태황제(我太皇帝.고종) 폐하의 칙명을 받고 이렇게 폐하의 친새(親璽)가 찍힌 밀서를 가지고 여순(旅順)의 옥중에 있는 안중근을 구해내 러시아령에 있는 우리 동포와 함께 극력 이를 러시아의 재판에 맡기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이 밀사들은 30대의 송선춘, 조병한으로 송선춘은 한국 관리 출신으로 일본어와 영어에 능숙하고 일본과 미국에도 다녀온 적이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한편 소네 조선통감이 1910년 1월8일에 고무라 외무대신에게 보낸 비밀통발(機密統發) 제20호라는 보고서에는 안중근 의사를 구하기 위해 러시아인 미하일로프가 상하이의 영국인 변호사 더글러스에게 변호를 의뢰했으며 변호비용은 고종의 심복으로 상하이에 있던 민영익, 민영철, 현상건이 모금한 1만엔으로 냈다고 적혀있다.

더글러스는 안중근을 면회해 '한국정부의 고문인 미국인 스티븐스를 암살한 전명운이 겨우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으므로 안중근도 비슷한 형량을 받을 것이고 만약 재판이 무법(無法)으로 가면 열국(列國)에 호소해 만국공동재판을 받도록 하겠다'라 말했다고 기록됐다.

이태진 교수는 "고종이 보낸 밀사는 안중근이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하고 한인들에게 안중근을 돕기 위한 모금 운동을 독려하기 위해 파견됐으며 이 2명 외에도 더 있을 것으로 본다"면서 "일본이 퍼뜨린 고종 무능론의 영향으로 그간 학계에서도 항일독립운동은 고종 황제와 무관하다고만 생각돼왔지만 실제로 직접 관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kimyg@yna.co.kr

<사진 설명: 고종이 배일(排日)의 본원(本元)이란 내용의 보고서>

'미수다' 출연 베라, 한국 폄훼 논란

 

'미수다출연 베라한국 폄훼 논란 
최근 독일에서 출간된 책에 한국 비하하는 내용 담은 것으로 알려져, "오역한 해명 

노컷뉴스 방송연예팀 김재윤 기자 

 


KBS 2TV '
미녀들의 수다'(이하 미수다) 출연한 독일인 베라 호흘라이터가 한국 비하 논란에 휩싸였다.
베라는 최근 독일에서 '서울의   이루는 '(Schlaflos in Seoul)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하지만 방송에서 '한국에 취했다' 평소 한국에 대한 애정어린 발언을  것과는 달리그녀가 한국 사회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일고 있다.

이번 일이 알려지게  것은 지난 20 독일에서 유학 중인  유학생이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글을 올리고 부터다.  '독일에서 공부 중인 학생'이라고 자신을 밝힌  유학생은 "베라가 최근 독일에서 발간한 '서울의   이루는 ' 작정하고 한국을 비판하려고  같다" 밝혔다.

베라는  책에서 "매너 있고 배운 유럽인으로 한국에 살면서 노력해도 이해 불가능한 상황이 매일 생긴다" 밝히면서 "한국의 젊은여성들은 유행을 광적으로 쫓아 미니스커트를 입는데도 계단을 올라갈  가리면서 그걸  입는지 모르겠다", "채식주의자인내가   한국은 채식주의자에 대한 배려가 없다"  한국의 문화를 꼬집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네티즌들은 '그녀가 그동안 말한 한국사랑은 거짓이었나', '그녀는  2 미즈노 교수'라며 베라를 비판하고 나섰다한편,파문이 커지자 베라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 책은 한국어로  있지 않고 독일어 번역이 제대로  있지 않아 읽을 수가 없다누군가가 인터넷에  책의 내용을 잘못 번역해 올린 "이라고 해명했다.

kjy7@cbs.co.kr 

너희가 조선 놈이냐, 한국으로 떠나라"…100회 맞은 도쿄 '금요시위

 
2009년 08월 21일 (금) 11:39  뉴시스

"너희가 조선 놈이냐, 한국으로 떠나라"…100회 맞은 도쿄 '금요시위'

【광주=뉴시스】안현주 기자 = "너희가 조선 놈이냐. 일본 놈이냐. 한국이 그렇게 좋으면 거기 가서 살아라." 

일본의 양심적 시민들이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명예회복을 촉구하며 일주일에 한번 열고 있는 시위가 한국인들의 무관심 속에 100회째를 맞았다. 

일본 '나고야 소송 지원회(이하 지원회)' 회원들이 도쿄 미쓰비시중공업 앞에서 한국의 근로정신대 할머니들 명예회복과 보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처음 시작한 것은 지난 2007년 7월20일. 

매주 금요일에 열려 '금요시위'라고 이름 붙여진 이 끈질긴 투쟁을 이끌어온 지원회는 21일 오전 미쓰비시중공업 앞에서 조촐한 '100회 기념행사'를 가졌다. 

금요시위은 전범기업인 '미쓰비시사'에 근로정신대 문제의 자발적 해결을 촉구하는 시위로, 지난 2년1개월 동안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치러 왔지만 정작 피해 당사국인 한국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할머니들의 손해배상 소송의 도쿄 최고재판소(대법원) 상고를 계기로 금요시위를 시작한 지원회는 지난해 11월 최종 '기각' 판결이 나 사실상 사법적 구제를 받을 수 없음에도 매주 '미쓰비시사'에 자발적 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지원회는 일본인들로 구성된 순수 지원단체이며, 과거 침략전쟁의 반성과 할머니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금요일마다 나고야에서 360여㎞ 떨어진 도쿄까지 신칸센을 타고 원정시위를 벌여오고 있다. 

지원회가 100차례 시위를 개최하기 위해 이동한 거리는 지구를 한바퀴를 훌쩍 넘어섰고, 매주 기차 삯으로만 2만2000엔(한화 30여만원)을 내놓는 등 지금까지 소송 및 시위와 관련된 활동에만 성금 수억엔이 들었다. 

정의를 수호하려는 양심적인 일본인들의 노력은 한국인들의 마음도 흔들었다. 
늦었지만 금요시위가 알려지면서 광주에서는 '시민모임'이 구성됐고, 서울에서도 지난 1월30일부터 미쓰비시중공업 서울사무소 앞에서 일제 징용 피해자들 중심으로 금요시위를 시작했다. 

시민모임 이국언 사무국장은 "지원회원들은 일본인들로부터 '한국으로 떠나라'는 야유와 핀잔을 받으면서도 100회 동안 금요시위를 이끌어 왔다"며 "서울~광주간 보다 더 먼 거리를 '정의와 양심' 만을 믿고 지금껏 달려온 지원회 여러분들께 한국인을 대신해 존경과 감사의 말을 전한다"고 말했다. 

< 관련사진 있음 > 
ahj@newsis.com

<김前대통령서거> 호남에 대한 각별한 애정

<김前대통령서거> 호남에 대한 각별한 애정


< 김前대통령 서거>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서울=연합뉴스)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金大中.85) 전 대통령이 18일 오후 1시 42분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달 13일 폐렴으로 신촌세브란스에 입원, 중환자실에서 집중치료를 받고 증세가 호전돼 22일 일반병실로 옮겼으나 하루 뒤 폐색전증이 발병하면서 인공호흡기를 부착한 채 치료를 받아왔으나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1925년 전남 신안에서 가난한 농부였던 아버지 김운식(金雲植)과 어머니 장수금(張守錦)의 4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목포 북교초등학교와 5년제인 목포상고를 졸업한 뒤 목포일보 사장을 지냈으며 민주당 대변인이었던 63년 목포에서 6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된 뒤 7,8,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 전 대통령은 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나섰으나 당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게 석패한 뒤 87년, 92년 대선에서 연거푸 낙선했으나 97년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사진은 98년 2월 25일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제15대 대통령 취임식 당시의 김 전대통령. <연합뉴스 DB> 2009. 8.18 changki@yna.co.kr

(광주=연합뉴스) 신재우 기자 = 재임 시절 헌정사상 첫 정권교체로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호남의 변함없는 지지 덕분'이라고 말해왔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주요 행사 때마다 호남을 방문해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김 전 대통령의 퇴임 후 첫 호남 방문은 `정치적 고향'인 광주였다. 퇴임 1년 8개월 만인 2004년 11월 1일 광주 방문에서 김 전 대통령은 국립 5·18 묘지를 참배하고 방명록에 '永遠無窮(영원무궁)'이란 글을 남겨 5·18 정신이 역사 속에 영원히 기억되기를 소망했다. 김 전 대통령은 2000년 현직 국가원수로서 처음으로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해 5·18 묘지를 참배했었다. 당시 그는 "이름만 불러도 가슴이 저미는 충장로와 금남로, 그리고 전라남도 도청에서 빛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민주주의의 영웅들을 생각할 때 한없는 슬픔과 감동, 그리고 새로운 각오를 하게 된다"고 말해 청중들이 눈시울을 붉혔었다. 김 전 대통령은 광주지역 인사들과의 만찬에서 "국내 정치에는 일절 간섭하지 않고 오직 평화를 위해 남은 생을 바치겠다. 한반도의 평화와 세계의 평화, 가난한 사람들의 평화, 고통받은 사람들의 평화를 위해 일하겠다"고 다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듬해 9월 6일 자신의 이름을 딴 `김대중 컨벤션센터' 개관식 참석차 광주를 다시 찾았다. 당시는 국가정보원이 국민의 정부 시절 불법도청이 있었다는 사실을 공개해 전. 현 정권 간 갈등이 심화하던 시기로 김 전 대통령은 불편한 심기를 표하고 입원까지 했지만, 개관식 참석을 최종 결정했다. 그는 개관식 연설에서 자신의 변함없는 지지기반인 광주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드러내면서 "민주주의를 위한 희생과 헌신의 선두에는 5.18이 있고 그것은 바로 광주에서 일어난 일이다…이 센터를 광주시민의 꿈을 펼칠 구심점으로 만들자"고 강조했다. 이로부터 9개월 뒤인 2006년 6월 김 전 대통령은 광주에서 열린 6.15 남북정상회담 6돌 기념 남북공동행사에 주빈으로 참석했다. 김 전 대통령은 개막식에서 "5·18 광주정신은 민주, 평화, 통일의 정신이었고 6.15 남북정상회담의 정신도 이런 광주의 정신을 계승한 바 크다"며 다시 한번 5.18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그는 또 이틀 뒤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옛 소련 대통령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노벨평화상 수상자 광주정상회의에서도 `광주 정신'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민주주의를 지키려고 목숨을 바치고 질서와 평화를 지킨 비폭력 운동이었다"며 "광주는 민주주의 성지로 10일간 계속된 민중항쟁은 위대한 정신을 가진 거사였다"고 정의했다. 광주에서의 일련의 역사적인 행사를 마친 뒤 9월에는 모교인 전남 제일고(옛 목포상고)가 있는 목포에 방문하게 된다. 재임 시절 `지역감정 해소'라는 명분에 묶여 고향 땅을 자유롭게 밟지 못했던 김 전 대통령은 "8년 만에 고향에 와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됐고 큰 짐을 내려놓은 것 같다. 이 고장 출신으로서 여러분의 따뜻한 격려에 얼마나 행복하고 떳떳하고 감사한지 모르겠다"며 고향에 대한 애틋한 정을 드러냈다. 이어 올해 4월에는 14년 만에 고향 신안 하의도 방문해 "재임 중은 물로, 재임 후에도 여러분에게 큰 힘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미안해하면서 "다만 일생을 민주주의를 위해 독재자와 정면으로 싸웠고 5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6년 반을 감옥에 있었지만, 전라도 여러분의 압도적인 성원으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며 감사를 표했다. 이 밖에도 김 전 대통령은 2007년 10월 광주디자인비엔날레에 참석해 광주가 아시아 디자인 산업의 중심이 되기를 기원하고, 2008년 10월에는 해남 명량대첩 축제를 방문해 전적지를 돌아보는 등 호남의 문화예술 발전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기도 했다.

withwit@yna.co.kr

[김대중 前대통령 서거] 연보

[김대중 前대통령 서거] 연보

<연보> ■출생과 성장(1924∼1951)

1924. 전남 신안군 하의면(荷衣面) 후광리(後廣里)에서 아버지 김운식(金雲植)과 어머니 장수금(張守錦)의 둘째 아들로 출생. ‘後廣’은 그의 아호가 되었다

1944 목포상업학교 졸업, 목포상선회사에 취업. 이후 회사 관리인으로 회사를 경영하는 등 청년 사업가로 활동

1946. 차용애 여사와 결혼, 슬하에 홍일, 홍업 두아들을 둠

1950. 6.25 한국전쟁 발발. 공산군에 체포되어 목포형무소에서 총살 직전에 탈출 (첫 번째 죽을 고비)

■국회의원시절 (1961∼1979)

1961. 강원도 인제에서 5대 민의원 보궐선거 출마, 당선. 4번째 도전에 성공하였으나 5.16 쿠데타로 국회의원 선서조차 하지 못함

1962. 이희호 여사와 재혼. 슬하에 홍걸

1964. 국회 본회의에서 김준연 의원에 대한 구속동의안 상정 지연을 위해 5시간 19분 동안 의사진행 발언

1967. 통합야당 신민당 창당. 신민당 정무위원, 대변인

1970. 신민당 전당대회 후보 경선에서 7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됨

1971. 7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46% 득표), 박정희 당선

1971. 8대 국회의원 선거 신민당 후보 지원 유세차 지방 순회중 무안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함(두번째 죽을 고비)

■유신시대 핍박(1972∼1979)

1972. 일본 동경에서 유신 반대 첫 성명 발표. 미국 워싱턴에서 국민투표 무효선언 발표

1973. ‘동경납치 살해미수 사건’ 발생. 중앙정보부 요원에 일본 그랜드 호텔에서 납치 당해 수장될 위기에서 극적 생환(세번째 죽을 고비)

1973. 납치된 후 동교동 자택에 귀환. 귀국하자마자 가택연금과 동시에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 당함

1976. 윤보선, 정일형, 함석헌, 문익환 등 재야 민주지도자들과 함께 ‘명동 3.1 민주 구국선언’ 주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1심에서 징역 8년 선고

1977. 대법원에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형 확정(긴급조치 9호 위반) 옥고

■민주화운동(1980∼1992)

1980.동교동 자택에서 체포, 구속, 비상계엄 전국확대, 광주 민주 화 운동 발발,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네번째 죽을 고비)

1985. 망명 2년 3개월만에 당국의 반대와 주위의 암살 걱정을 무릅쓰고 귀국. 김포 공항에서 대인접촉이 봉쇄된 채 격리, 가택연금

2.12 총선에서 야당, 신민당 돌풍의 중심 역할

1987. 평화민주당 창당, 총재 겸 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

1988. 13대 국회 사상최초로 여소야대 국회, 평민당 제1야당

1990. 노태우-김영삼-김종필 3당 야합 반대 투쟁 시작

1992.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 김영삼 후보 당선, 정계은퇴 선언, 이듬해 영국출국

1995. 정계복귀 선언, 새정치 국민회의 창당

1997. 국민회의 제15대 대통령 후보,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후보 단일화에 합의,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

■대통령 집권 이후(1998∼2009)

1998. 대통령 취임, UN 인권협회 인권상 수상, 필라델피아 자유메달 수상

2000. 분단 55년만에 남북정상회담. 남북공동선언 발표, 노벨평화상 수상

2002. 대통령 퇴임

2003.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개관,

2004.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재심판결에서 무죄 선고, 유럽 3개국(프랑스, 노르웨이, 스위스) 순방, 중국 방문(장쩌민 군사위 주석 등 중국 지도자 면담)

2009. 8월18일 서거

"김前대통령, 다발성 장기손상으로 서거"

 

"김前대통령, 다발성 장기손상으로 서거" 연합뉴스

박창일 연세의료원장 서거 공식 확인

(서울=연합뉴스) 백나리 기자 =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폐렴으로 치료를 받던 중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서거했다고 18일 밝혔다. 

박창일 연세의료원장은 서거 후 병원 브리핑룸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김 전 대통령이 오늘 오후 1시43분 서거하셨다"고 발표했다.

박 원장은 "7월 13일 폐렴으로 입원하셨지만 마지막에는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인해서 심장이 멎으셨고 급성호흡곤란 증후군과 폐색전증 등을 이겨내지 못하셨다"라고 말했다.

그는 심폐소생술을 했느냐는 질문에는 "생명을 더 연장할 가능성이 있을 때 시도를 하지만 다발성 장기손상으로 인해 더 견뎌내지 못할 것으로 판단해 하지 않았다"라고 답했다. 

지난 9일 심폐소생술을 했던 것과 관련해서는 "당시는 다발성 장기손상이었지만 약물 등으로 생명을 회생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기에 적극적인 조치를 했던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기자회견에 앞서 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알리며 "쾌유를 기원해주신 국민 여러분과 세계의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고 의료진에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라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 이희호 여사를 비롯한 가족들의 뜻을 잘 받들고 정부와도 긴밀히 협조해 김 전 대통령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정중히 모시겠다"라고 덧붙였다.

박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의 유언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여사님께 구체적으로 듣지 못했다"고만 대답했다.

nari@yna.co.kr
(끝)

하필이면 광복절에 기모노 입고…

하필이면 광복절에 기모노 입고…

[동아일보]

일본여행상품 방송 판매현대홈쇼핑에 시청자항의

현대홈쇼핑이 광복절인 15일 새벽 방송에 일본 전통의상 기모노(着物)의 일종인 유카타(浴衣)를 입은 쇼핑호스트들을 출연시킨 데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현대홈쇼핑은 이날 ‘자유투어 일본 북규슈’ 여행상품을 소개하며 남녀 쇼핑호스트 2명에게 각각 유카타를 입혀 방송을 진행했다.

이 상품은 8월 22일부터 3, 4일 일정으로 일본 기타큐슈(北九州)를 여행하는 내용으로 광복절인 15일 0시 40분부터 1시간 동안 판매됐다.

방송을 지켜본 시청자들은 ‘아쉽다’는 반응을 보였다. 직장인 전모 씨는 “뭘 팔든 홈쇼핑 채널의 자유지만 하필 광복절 새벽에 일본옷을 입고 일본 여행을 가라고 권하는 건 심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홈쇼핑 측은 “홈쇼핑 여행상품은 모두 해당국 복장을 입고 방송을 진행한다”며 “상품 판매시기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한 점은 인정한다”고 해명했다. 회사 측은 시청자들의 반발이 이어지자 17일 오후 관련 상품 내용을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삭제했다.

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日 8·15 종전기념일 야스쿠니 신사 가보니

 

日 8·15 종전기념일 야스쿠니 신사 가보니 서울신문 2009-08-17

[서울신문]│도쿄 박홍기특파원│일본의 제64회 종전기념일인 15일 야스쿠니 신사의 안팎은 온통 ‘극우들의 축제마당’이나 다름없었다. 도쿄 지오다구 지하철 구단시타역 출구에서 신사까지 80m쯤 떨어진 인도는 우익들의 정치선전장으로 변해 있었다. A급 전범인 ‘도조 히데키’의 사진과 함께 ‘일본에는 전범이 없다. 한국, 중국은 야스쿠니신사에 참견마라’, ‘총리는 야스쿠니에 참배하라’, ‘외국인 지방참정권 절대 반대’라는 등의 플래카드가 즐비했다.

거리의 한쪽에서는 확성기로 “일본의 기초를 닦은 영령에 감사를”이라며 떠들고, 다른 쪽에서는 외국인참정권에 반대하는 전국협의회 소속 회원들이 “일본 국민의 고유권리를 파는 짓”이라고 구호를 외치며 서명운동도 벌였다. 외국인 지방참정권은 영주권을 가진 재일교포들의 숙원 과제 가운데 하나다. 또 극우세력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 제작한 역사왜곡 중학교 교과서의 채택을 호소하는 이들도 섞여 있었다. 거리는 공식 허가를 받은 듯 극우단체들의 독차지였다. 건네는 유인물이 많은 탓에 지나가기도 힘들 정도였다.

신사의 안쪽도 다르지 않았다. 곳곳에서 일장기가 펄럭이고, 극우단체로 보이는 ‘호국 청년’이라는 명패를 단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활보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군복에 총을 메거나 칼을 찬 이들이 보란 듯이 전쟁 당시의 의례를 재현하기도 했다. 주차장에는 각지에서 참배객을 태우고 온 대형 버스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요코하마에서 올라왔다는 모리타(83)는 “해마다 종전기념일에 신사를 찾아 선조 및 전몰자 영령들의 명복을 빈다.”면서 최근 하토야마 유키오 민주당 대표가 밝힌 야스쿠니신사와 별도의 국립추도시설 건립 구상에 대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한 남성(63)은 이에 대해 “터무니없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논문을 발표했다가 경질된 공군사령관 격인 전 항공막료장 다모가미 도시오는 “오늘의 일본은 싸우다 죽은 영령들의 덕분이다. 감사해야 한다.”며 즉석 연설, 박수를 받았다.

정치인들도 줄을 이었다. 오전 8시30분쯤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참배했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4년, 아베 전 총리는 2년 연속이다. 아베 전 총리는 “영령에 존중하는 뜻을 표하기 위해”라고 밝힌 반면 고이즈미 전 총리는 코멘트를 하지 않았다. 또 여야 의원들로 구성된 ‘다함께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 소속 의원 41명도 신사를 찾았다. 각료 가운데는 유일하게 노다 세이코 소비자담당상만 참배했다. 야스쿠니신사에는 이날 오전 5시부터 참배객이 들어오기 시작, 오후 7시 문을 닫을 때까지 15만 6000여명이 찾았다.

글 사진 hkpark@seoul.co.kr

조선총독부, 탄광촌 징용 노동력 착취 발악…잇단 탈영에 경고문까지

[단독] 조선총독부, 탄광촌 징용 노동력 착취 발악…잇단 탈영에 경고문까지

 

 
[2009.08.14 22:16]     
 

 

 

 


[쿠키 사회] '조선의 특별지원병은 자기 가족 일이나 자기 이익도 불구하고 나라(일본제국)를 강하게 하기 위해 모든 어려움을 무릅쓰고 군무에 복역하고 있습니다. 제군도 지원병과 다름없이 조선서 선발된 산업전사가 되어 일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 기어이 돌아오지 않고는 안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에는 재계약을 이어서 일할 결심을 하여 주시기를 생각합니다. 그 계약은 3년이나 5년이나 긴 것이 좋습니다. 속히 가족을 불러서 지금 일을 계속하는 것이 훌륭한 황국신민이올시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일본 내 탄광촌에서 일하던 조선인 징용자들에게 조선총독부가 이러한 지침을 내린 사실이 14일 드러났다. 1941년(소화16년) 10월1일자로 보내진 문서에서 총독부는 '나라를 강하게 하기 위해' '선발된 산업전사' '훌륭한 황국신민' 등의 말로 조선인 징용자를 부추기고 있다. 자신들의 전쟁에 가담하도록 독려하면서 사실상 착취인 징용을 정당화한 것이다. 노동력 누출과 체제 동요를 막아 식민 통치를 강화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해당 문서는 강제징용진상규명위원회 위원인 김문길(64) 부산외대 일어일문학과 교수가 최근 일본 후쿠오카 석탄박물관 내 탄광 자료실에서 찾아내 본보에 처음으로 공개했다. 문서는 수신자인 조선인 징용자들을 '산업젼사졔군(産業戰士諸君)'으로 지칭했다. 발신자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로 돼 있다. 글은 가로 30㎝, 세로 10㎝ 크기의 직사각형 종이에 먹으로 쓰여 있다. 본문은 일본어와 한글로 각각 11문장에 31줄씩이다.

이 문서에서 총독부는 "전쟁에 이기자면 나라의 힘을 강하게 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나라의 힘을 강하게 하자면 … 석탄과 광석을 파는 일은 특히 대절(아주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석탄을 비롯한 화석 연료는 전쟁을 치르는 일본에 가장 주요한 군수물자였다. 어느 탄광에서든 캐는 일은 징용된 조선인이 도맡고 있었다. 온갖 궂은 일에 동원된 조선인은 제국주의 전쟁의 중심에 뛰어든 일본에 없어서는 안될 동력원이었던 것이다.

문서에서 총독부는 "그런데 제군 중에는 무단으로 직장을 떠나는 사람이 있고 또 쟁의를 일으킨다는 일을 북해도(홋카이도)에서 통지 받은 일이 있다"면서 "모쪼록 지금부터는 그런 부덕한 사람이 없도록 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탄광촌에서는 이탈자가 잇따를 수밖에 없었다. 작업 환경이 열악했고 노동 강도는 극심했다. 징용자들은 사고를 당하거다 병을 얻어도 제대로 치료 받지 못한 채 앓다 죽어 가야 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발버둥친 조선인을 '부덕한 사람'으로 몰아붙인 총독부는 "제군은 동료나 직장 사람과 사이좋게 지내고 경찰서나 협회, 회사 사람의 지도를 잘 듣도록 하고, 또 새로 그곳에 가신 분은 선배의 가르침을 잘 좇아 모든 분과 같이 훌륭한 황국신민이 되어 즐겁게 일에 힘쓰도록 마음먹어 달라"고 촉구했다. 총독부가 거듭 강조하는 '황국신민'은 천황이 다스리는 나라의 신하와 백성이라는 뜻이다.

완곡하고도 단호한 어조 뒤엔 일본의 절박한 심정이 감춰져 있다. 김 교수는 "석탄 없인 하루도 전쟁을 치를 수 없는 일본은 조선인 징용자들이 잇따라 이탈하자 전쟁 준비에 차질이 빚어지는 상황을 걱정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총독부의 글은 위기감을 느낀 일본이 자신들의 근대사에서 최대 상징으로 꼽히는 천황과 '야마토 다마시(大和魂·대화의 정신)'를 앞세워 조선인들을 각성시키려 한 것으로, 사실상 경고문"이라고 말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

이하 총독부 문서 전문

산업젼사졔군(産業戰士諸君)

(산업전사 제군)

멀-이 고향을 떠나 산업전사로서 변함없이 북해도에서 일하고 잇는 졔군을 마음것 감사하는 동시에 가족과 함게 우리들의 자랑꺼리로 하고 잇슴니다.

(멀리 고향을 떠나 산업전사로서 변함없이 북해도(홋카이도)에서 일하고 있는 제군을 마음껏 감사하는 동시에 가족과 함께 우리들의 자랑꺼리로 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턱별지원병은 자긔 가족 일이나 자귀의 리익도 불고하고 나라을 강하기 위하야 모던 난고을 무럽시고 군무에 보역하고 잇슴니다.

(조선의 특별지원병은 자기 가족 일아니 자기 이익도 불구하고 나라를 강하게 하기 위해 모든 어려움을 무릅쓰고 군무에 복역하고 있습니다.)

졔군도 지원병과 다름업시 조선서 선발된 산업전사가 되어 일하고 잇다는 것을 이저서는 안됨니다. 젼쟹에 이기자면 나라의 힘을 강하게 하지 아니하면 안됨니다.

(제군도 지원병과 다름없이 조선서 선발된 산업전사가 되어 일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전쟁에 기자면 나라의 힘을 강하게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나라의 힘을 강하게 하쟈면 국민 젼부가 각쟈의 일에 일심노력으로 일하는 것이 대졀(大切)함니다마는 석탄과 광석을 파는 일은 턱히 대졀함니다.

(나라의 힘을 강하게 하자면 국민 젼부가 각쟈의 일에 일심노록으로 일하는 것이 대절(아주 절실)합니다마는 석탄과 광석을 파는 일은 특히 대절합니다.)

졔군은 병대(兵隊)와 갓치 젼쟁을 하고 잇는 마음으로 한침 더 참되게 일하는 것을 빌고 잇슴니다.

(제군은 병대(군대)와 같이 전쟁을 하고 있는 마음으로 한층 더 참되게 일하는 것을 빌고 있습니다.)

거런대 졔군 중에는 무단으로 리직(離職)을 하는 사람이 잇고 또는 쟁이(爭義)을 이러킨다는 일을 북해도에서 통지을 밧고 잇는 일도 잇슴니다.

(그런데 제군 중에는 무단으로 직장을 떠나는 사람이 있고 또 쟁의를 일으킨다는 일을 북해도(홋카이도)에서 통지를 받고 있는 일도 있습니다.)

그럼으로 재군의 가족과 함게 대단 걱정하고 잇슴니다. 모쪼록 금후는 거런 부덕(不德)한 사람이 없도록 하여쥬시요.

(그러므로 제군의 가족과 함께 대단히 걱정하고 있습니다. 모쪼록 이제부터는 그런 부덕한 사람이 없도록 하여 주시오.)

생각하면 새월의 지내는 것은 빨나서 소화십사연에 거곳에 가신 분은 게약긔환이 끗날 때까 되엿슴니다마는 이 젼쟁이 게속되는 한 석탄과 광석이 만히 필요 하니까 기여히 기선(歸鮮)치 안코는 안될 턱별한 사졍이 없는 한에는 쟤게약을 이여서 일할 결심을 하여쥬시기를 생갑함니다.

(생각하면 세월이 지나는 것은 빨라서 소화14년(1939년)에 그곳에 가신 분은 계약 기한이 끝날 때가 되었습니다마는 이 전쟁이 계속되는 한 석탄과 광석이 많이 필요하니까 기어히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고는 안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에는 재계약을 맺어서 일할 결심을 하여 주시기를 생각합니다.)

거 게약은 삼년이나 오연이나 긴 것이 조섬니다. 속히 가족을 불너서 지금 일을 게속하는 것이 훌능한 황국신민이올시다.

(그 계약은 3년이나 5년이나 긴 것이 좋습니다. 속히 가족을 불러서 지금 일을 계속하는 것이 훌륭한 황국신민이올시다.)

제군은 요(僚)나 직장의 사람과 이조케하고 경찰서나 협화회, 회사 사람의 지도을 잘 덧도록하고, 또 새로 그곳에 가신 분은 선배의 가러침에 잘쪼차 여러(皆)분과 갓치 훌능한 황국신민이 되여 길접게(樂) 일에 힘시도록 마음먹어 쥬시요.

(제군은 직장 사람과 사이좋게 지내고 경찰서나 협회, 회사 사람의 지도를 잘 듣도록 하고, 또 새로 그곳에 가신 분은 선배의 가르침을 잘 좇아 모든 분과 같이 훌륭한 황국신민이 되어 즐겁게 일에 힘쓰도록 마음먹어 주시오.)

일로부터는 졈 츄아지니 신채을 주의하여 상쳐와 병에 덜이지만코 일하시기을 빌고 이게슴니다.

(이제부터 좀 추워지니 신체를 주의하여 상처와 병에 걸리지 말고 일하시길 빌고 있겠습니다.)

소화십육연십월일일 조선총독부

(소화16년(1941년) 10월1일 조선총독부)

日 고이즈미.아베 전 총리 야스쿠니 참배

2009년 08월 15일 (토) 13:28  연합뉴스

日 고이즈미.아베 전 총리 야스쿠니 참배

아소 다로 총리는 무도관서 열린 전몰자 추도식 참가 
(도쿄=연합뉴스) 최이락 =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가 일본의 '종전 기념일'인 15일 도쿄 야스쿠니(靖國)신사를 각각 참배했다. 

아베 전 총리는 참배 후 기자들에게 "오늘은 영령에 존중하는 뜻을 표하기 위해 참배했다"고 말했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이날 참배 이유를 묻는 질문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종전기념일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고이즈미 전 총리가 4년 연속, 아베 전 총리는 2년 연속이다. 

또 여야 의원들로 구성된 '다 함께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 소속 의원들도 오전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다. 

하토야마 구니오(鳩山邦夫) 전 총무상도 참배를 한 뒤 "여기에 아소 다로(麻生太郞) 총리가 오지 않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는가. 정말로 분노를 느낀다. 분하다"라고 아소 총리를 비난했다. 

그는 또 형인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민주당 대표가 종교성이 없는 국립추도시설을 건설하겠다고 밝힌 데 대대 "반대다. (야스쿠니신사에서) 영령들에게 일본인의 국민성, 정신성으로서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말했다. 노다 세이코(野田聖子) 소비자행정담당상도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다. 

아소 다로 총리는 이날 일본 무도관에서 열린 전국 전몰자 추도식에 참가했다. 그는 최근 종전기념일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해 "계획이 없다"고 밝힌 바 있다. 

choinal@yna.co.kr 

윤동주 日형무소에서 생체실험 당해

 

"윤동주 日형무소에서 생체실험 당해"


독립기념관이 공개한 윤동주와 문익환의 생전 모습1930년대 은진학교 시절 교복을 입은 윤동주(뒤줄 오른쪽)와 문익환(뒤줄 가운데) 모습./독립기념관 제공/ 2005.2.24 (천안=연합뉴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광복절 특집 방송

(서울=연합뉴스) 권영전 기자 =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1942년 일본 유학길에 오른 윤동주. 바로 이듬해인 1943년 그는 일본 경찰에 체포돼 재판에서 2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형기를 다 채우지 못한 채 광복을 불과 6개월 남기고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졌다.

일본 형무소에서 밝힌 사인은 뇌일혈. 그러나 시신 수습에 참여한 가족들이 들은 이야기는 달랐다. 

윤동주와 함께 후쿠오카 형무소에 갇혀 있던 사촌 송몽규는 자신과 윤동주가 주사를 맞아서 그렇게 됐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송몽규도 한 달 뒤 숨져 생체실험을 둘러싼 의문은 미궁에 빠져 있다. 

그동안 미스터리에 싸여 있던 윤동주의 죽음에 대해 일본인 문학평론가 고노 에이지는 비교적 구체적인 증언을 내놓는다. 그는 윤동주가 맞았던 주사가 생리 식염수를 수혈하는 생체실험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전쟁 중이던 일제가 부족한 수혈용 혈액을 대신할 물질을 찾고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 국립도서관의 문서에는 당시 규슈 제국대학이 후쿠오카 형무소 재소자들을 상대로 바닷물을 수혈하는 생체실험을 했다는 증언이 1948년 일본 전범 재판 중 나왔다고 기록돼 있다.

SBS가 광복절을 맞아 15일 오후 11시10분 방송하는 '그것이 알고 싶다-윤동주, 그 죽음의 미스터리'는 윤동주의 죽음과 관련된 이런 내용을 자세히 소개한다.

comma@yna.co.kr

‘대표 친일파’ 이완용 가문은 ‘풍비박산’

2009년 08월 14일 (금) 14:30  한겨레

‘대표 친일파’ 이완용 가문은 ‘풍비박산’

[한겨레] [친일·항일 '굴곡진 100년사'] 


장남은 요절, 차남은 일본 귀화 


증손자 92년 땅찾기 소송 '눈살'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경술국치' 당시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이완용(1858~1926) 가문은 해방 이후 멸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이완용 자신도 '대표 친일파'로 악명이 높았던 탓에 살아생전 자객의 습격을 받아 생사의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이완용은 공식적으로 승구·항구 두 아들을 두었지만, 장남이 1905년 요절하는 바람에 차남 항구의 아들인 병길이 가문을 이었다. 이완용의 후손들은 1930년대까지는 거부 명단에 이름이 오르내리지만, 이후 기록에선 이름을 찾을 수 없다. 송병준 등 다른 '매국노'들의 경우, 자손 간의 다툼으로 재산이 공중분해됐다는 사실을 당시 신문 기사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3·1운동 이후 문화통치가 도입되면서 조선 귀족들의 효용 가치는 더욱 줄었고, 일제의 푸대접도 심해졌다. 이완용은 3·1운동 이후 총독부 기관지 < 매일신보 > 4월5일치 1면 톱으로 "동포의 자중을 당부한다"는 내용의 '경고문'을 발표했지만, 효과가 없었던 듯 2·3차 경고문은 사회면 중간으로 줄어들었다. 

해방 이후 이병길은 '반민특위'에 체포됐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견제로 반민특위가 무력화된 뒤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1992년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땅 712평(당시 시가 30억원)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내고 승소해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이윤형이 그의 아들이다. 이윤형은 그 뒤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 2002년께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차남 이항구는 해방 직전인 1945년 3월에 숨졌다. 일제 말기라 그 아들인 이병주가 작위를 물려받았지만 특별한 친일행위가 확인되지 않아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그는 1962년 일본으로 밀항해 귀화했다. 

길윤형 기자 

日 고이즈미.아베 전 총리 야스쿠니 참배(종합)

日 고이즈미.아베 전 총리 야스쿠니 참배(종합)

아소 다로 총리 무도관서 열린 전몰자 추도식 참가 
(도쿄=연합뉴스) 최이락 특파원=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가 일본의 '종전 기념일'인 15일 도쿄 야스쿠니(靖國)신사를 각각 참배했다. 

아베 전 총리는 참배 후 기자들에게 "오늘은 영령에 존중하는 뜻을 표하기 위해 참배했다"고 말했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이날 참배 이유를 묻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종전기념일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고이즈미 전 총리가 4년 연속, 아베 전 총리는 2년 연속이다. 

또 여야 의원들로 구성된 '다 함께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 소속 의원들도 오전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다. 

하토야마 구니오(鳩山邦夫) 전 총무상도 참배를 한 뒤 "여기에 아소 다로(麻生太郞) 총리가 오지 않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는가. 정말로 분노를 느낀다. 분하다"라고 아소 총리를 비난했다. 

그는 또 형인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민주당 대표가 종교성이 없는 국립추도시설을 건설하겠다고 밝힌 데 대해 "반대다. (야스쿠니신사에서) 영령들에게 일본인의 국민성, 정신성으로서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말했다. 노다 세이코(野田聖子) 소비자행정담당상도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다. 

아소 다로 총리는 이날 일본 무도관에서 열린 전국 전몰자 추도식에 참가했다. 그는 최근 종전기념일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해 "계획이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아소 총리는 추도식 식사에서 "(일본은 2차대전 당시) 많은 국가들, 특히 아시아 각국 사람들에게 많은 손해와 고통을 줬다"고 2차대전과 관련한 가해 책임을 언급했다. 

그는 또 "과거를 겸허히 뒤돌아 보고 비참한 전쟁의 교훈을 약화시키지 않고 차세대에 계승해 가야 한다"며 "부전(不戰)의 맹세를 새롭게 하고, 세계의 항구평화 확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공헌해 나가겠다"라고 강조했다. 

종전기념일 식사에서 일본 총리가 이런 내용의 침략전쟁 가해책임을 언급하는 것은 19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전 총리 이후 계속돼 온 것이다. 

choina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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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64주년, 쇠말뚝과 자산

 
 
광복 64주년, 쇠말뚝과 자산 

 
쇠말뚝 뽑아내고 철탑 박는다는 비판도
 
강천면 자산 혈맥에 박혀 있는 일제시대의 혈침(쇠말뚝) 제거행사가 제64주년 광복절을 맞아 자산 서북릉 현장에서 열린다.
이번 행사로 광복절인 8월15일만을 기다려온 자산이 드디어 쇠말뚝으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을 맛 보게 될 전망이다.
 
친일 사학자들 쇠말뚝 제거운동 비난도
 
▲     © 세종신문

여주군이 강천면 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자산 등산로 정비사업을 실시하면서 강천리 주민들에 의해 발견된 이 쇠말뚝은 주민들과 전문가들에 의해 일제가 박은 혈침 중 하나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능선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일각에서 주장하고 있는 측량 등의 필요에 따라 일제가 박아놓은 쇠말뚝이었다고 보기 힘들다.

일제 강점기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우리 민족의 정기를 끊어버리겠다는 집념으로 우리 산천의 주요 혈맥 곳곳에 혈침을 박아놓았다는 것이 그동안의 수많은 연구와 조사자료들에 의해 사실로 드러난 바 있다.

일부 친일 사학자들이나 언론계에서 쇠말뚝 제거운동을 비난하며 “일제에 대한 피해의식에서 나온 허구” 라거나 “쇠말뚝 제거운동은 국수주의” 혹은 “일본인들이 측량을 위해 박아놓은 것” 이라는 식의 주장을 퍼뜨려 왔지만 그동안 풍수지리상 중요한 혈맥에서 발견된 쇠말뚝들은 그들의 주장이야말로 허구임을 여실히 증명해 왔다.
 
전통 산악개념에 따르면 중요한 혈맥

자산에서 발견한 쇠말뚝의 경우에도 대동여지도 등 고지도들과 대간, 정맥 등 우리나라 전통 개념인 ‘산자분수령(산은 물을 가르고 물은 산을 넘지 않는다)’에 따라 주요 혈맥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특히 산이 뻗어나가다가 고개를 만들고 마지막으로 치솟는 곳은 풍수지리상 땅의 지기를 살피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혈맥으로 알려져 있다.
 
▲ 대동여지도 상에 나타난 자산일대. 정맥을 타고 내려온 자산과 강천, 금당천 등의 지명이 보인다.     © 세종신문

멀게는 양평군 지제면과 원주시 지정면으로 이어져 온 정맥이 강천면의 당산과 보금산, 마감산을 지나 성주봉, 뚜갈봉 등 지맥을 따라 섬강과 남한강의 두물머리로 쏟아져 내린다.
이 때 강에 발을 담그기 전 마지막으로 넘는 두 고개가 바로 강천리의 창남이고개와 닷둔이고개다.

물을 단 한차례도 건너지 않고 뻗어내린 지맥이 마지막으로 고개를 쳐드는 지점이 바로 닷둔이고개를 지나 시작되는 자산 서북릉이다.
그리고 그 서북릉의 중간쯤에 쇠말뚝이 박혀 있는 것이다.
 
쇠말뚝의 종류도 가지가지

▲     © 세종신문
지난 2005년 독립기념관이 공개한 일제 쇠말뚝 사진은 일제의 혈맥끊기가 얼마나 주도면밀하게 이뤄졌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당시 사진 속 쇠말뚝은 지름 3cm 길이 150cm로 대구광역시 남구 앞산에서 신천을 끼고 오른쪽으로 내려오는 산줄기에서 발견된 것이다. 

아래에서 10cm 정도에 지름 7cm 의 철판을 용접해 붙이고, 팔뚝 굵기의 참나무 약 60cm를 불에 그슬려서 가로로 대고 철사로 단단히 고정해 땅에 묻었다.
이 쇠말뚝은 일제가 우리 국토의 지맥을 끊기 위해 곳곳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독립운동사 관계자는 “풍수 비방에 참나무나 자작나무를 불에 그슬려 용맥이 지나는 지점에 묻으면 지맥을 차단해 흉한 일이 생긴다고 하는데 일제는 이것을 따른 것” 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일제는 한국인들이 ‘뛰어난 지기(地氣)를 받아 훌륭한 후손과 위인이 태어나 나라를 구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는 한 일제의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며 “한국인의 풍수사상을 역이용해 패배의식을 심어주어 자신들의 지배를 영구히 하고자 했던 것” 이라고 분석했다.

그밖에도 일제에 의해 혈맥에 박힌 쇠말뚝은 머리모양과 꼬리모양이 다양하다.
이번에 뽑아낼 쇠말뚝을 통해 여주군(당시 원주목) 산천에 행해진 일제의 쇠말뚝 만행이 어떠한 형태로 이루어졌는지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쇠말뚝 뽑아내고 철탑 세운다는 비판도

일제의 쇠말뚝을 뽑아낸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나선 여주군이 정작 우리 전통의 풍수와 산악개념을 한꺼번에 망가뜨리게 될 현 정부의 개발정책에는 두손들어 환영하는 이중성을 보이고 있어 이에 대한 비판도 잇따르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저탄소 녹색성장’ 이라는 표어를 홍보하면서 정작 4대강 사업(한반도 운하), 경인운하, 핵발전소, 그린벨트 해제 등 환경을 파괴하는 다양한 행위를 일삼는 등 표리부동의 모습을 보이고 심지어 일제의 쇠말뚝을 뽑아낸 백두대간의 수많은 산들에 케이블카를 놓는다며 철탑을 심겠다는 지자체들의 계획을 잇따라 허용하거나 조장하면서다.

여주군 등 상당수 지자체가 정부의 무분별한 개발계획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앞장서 환영하고 나서는 등 말 그대로 쇠말뚝 뽑아낸다고 자랑하면서 국토의 가슴에 철심을 박는 행동대장을 자임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그동안 여주군이 정부의 모든 개발계획에 단 한차례도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해왔다는 점에서 이번 쇠말뚝 제거행사의 진정성에도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다.
특히나 쇠말뚝을 제거하는 자산 일대는 4대강 사업으로 강천보가 들어서게 되면 상당부분 훼손을 입게 될 구간 중 하나다.
 

을사조약 직후 고종이 보낸 전보 발견

을사조약 직후 고종이 보낸 전보 발견

(서울=연합뉴스) 김윤구 기자 = 대한제국 고종 황제가 을사조약 직후 조약의 부당성을 외국에 알린 전보가 발견됐다. 

이 전보는 을사조약 강제 체결 7일 뒤인 1905년 11월24일에 독일 외교부에 접수된 것으로 조약 체결 이후 외국 정부의 도움을 요청한 대한제국의 문서로는 최초로 평가된다. 




지난해는 고종이 조약 체결에 임박해 독일 정부에 보낸 것으로 보이는 전보가 발견됐었다. 
정상수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는 국사편찬위원회가 복사한 독일 외교부 정치문서보관소 소장 일본 관련 외교 문서 가운데 고종이 당시 베를린 주재 공사관 민철훈에게 보낸 전보의 독일어 번역본을 발견했다고 20일 밝혔다. 

고종 황제는 이 전보에서 "이토(히로부미) 특별공사, 하세가와 장군, 하야시 공사가 군대를 이끌고 짐의 궁궐로 난입했고 무력을 동원해서 짐을 위협해 그들 스스로 만든 조약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서울에 통감을 임명했고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양도하게 했다"며 "이러한 범죄행위는 국제법상 도저히 용인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고종은 또 "독일의 도움은 국제법을 통해 일본인들에게 항의할 수 있는 본인과 우리 조국을 위한 유일한, 마지막 희망"이라면서 민철훈에게 독일 정부에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할 것을 명했다. 

정 교수는 "지난해 발견한 전보는 '일본 정부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넘겨받으려 한다'는 내용으로 을사조약 체결 직전에 보낸 것이며 이번에 나온 것은 조약 체결 수 일 후에 보낸 것"이라며 "첫 번째 전보보다 고종의 절규가 더 잘 드러나 있다. 을사조약의 국제법상 무효를 고종 황제가 처음 제기한 문서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주장했다. 

kimy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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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나가는 韓기업 일본만 가면 '덜덜'…왜?

잘나가는 韓기업 일본만 가면 '덜덜'…왜?
다음 이어 싸이월드도 철수, 글로벌 1등 제품들도 맥 못춰

CBS경제부 권민철 기자
 

국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강자인 SK커뮤니케이션즈의 싸이월드 일본판이 오는 8월 문을 닫는다. 

지난 2005년 말 일본 시장에 진출했다가 시장을 선점하고 있던 토종업체들의 벽을 결국 넘지 못하고 4년만에 사업을 접게 됐다. 

이에앞서 포털 다음은 지난 3월 일본 법인 '타온'을 정리했다. 2004년 일본의 이동통신, 통신망 사업자인 파워드컴과 합작해 커뮤니티 포털 '카페스타'를 열어 UCC 기반의 멀티미디어 블로그 서비스 등의 서비스를 제공해 왔지만 결국 폐쇄할 수 밖에 없었다.

인터넷뉴스 사이트 오마이뉴스도 비슷한 시기 일본서 철수했다. 2006년 8월 한국과 마찬가지로 '모든 시민은 기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시민기자의 기사를 받아왔지만 참여율 저조로 3년이 못돼 무릎을 꿇었다.

일본서 고배를 마신 이들 업체들의 공통점은 자만심이었다. 자사의 서비스가 한국에서 뜨자 현지 사정에 대한 면밀한 스터디 없이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일본에 진출한 것이 화근이었다. 

SK커뮤니케이션 관계자는 "선발자의 이익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일반론으로 실패를 합리화하려 했지만 "일본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부차적인' 설명이 더 패인에 가까워보인다. 

이런 IT업체들 말고라도 한국의 대표적인 산업도 일본에서 빛을 못 보기는 마찬가지다. 미국, 유럽 등 선진 시장에서 기세등등한 자동차와 세계 1등이라는 휴대폰도 일본시장에서는 시장 점유율마저 잡히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삼성전자 가전 부문의 경우는 일찌감치 지난 2007년 말에 일본서 완전히 발을 뺀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일본에서 덩치를 키우며 미래를 일궈가는 기업들도 있다. 

온라인 게임업체 엠게임은 2005년 9월 진출한 이래 10여종의 온라인 게임을 일본 시장에 내놓았다. 지난해만 매출 840만달러(110억원)을 올리며 일본 시장에 소프트랜딩하고 있다.

팬택계열 역시 일본에서 비교적 대접받고 있는 기업이다. 글로벌 기업인 노키아, 삼성전자, LG전자가 일본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 있는 사이 조금씩 영역을 넓히고 있다. 

2005년 11월 일본에 처음 진출한 이후 일본 내 외국 휴대폰 메이커로서는 처음으로 100만대 판매고를 올린 모델을 배출했고 현재까지 누적 250만대를 팔며 선전하고 있다. 

시장점유율로 보면 미미한 수치지만 브랜드 인지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처지를 감안하면 값진 성과다. 이들 회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른 회사들과의 차이점이 있다. 

[BestNocut_R]엠게임의 경우는 온라인 게임을 특성에 맞게 사용자들의 애로사항을 실시간으로 신속 응대하면서 현지 업체와 서비스 면에서 '차별화'를 꾀한 것이 주효했다.

일본 업체들의 굼뜬 고객 서비스의 틈을 헤집고 들어가 반전의 디딤돌로 삼은 것이다.

팬택계열의 경우는 현지화 전략이 성공을 거둔 경우다. 이 회사 양율모 홍보팀장은 "국내나 미국 등 다른 시장에서 출시된 제품을 일본에 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일본 소비자와 시장에 맞는 제품을 개발한 것이 먹혀들어갔다"고 말했다.

앞으로 일본에 진출할 기업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성공 코드들이다.

twinpine@cbs.co.kr

한나라에 표 던졌던 486(40대ㆍ80년대 학번ㆍ60년대 출생) , 그들이 다시 등을 돌렸다

 

한나라에 표 던졌던 486(40대ㆍ80년대 학번ㆍ60년대 출생) , 그들이 다시 등을 돌렸다

 
넉달새 지지율 11.8%p 빠져 민주당으로 7.8%p 이동

'노무현 전 대통령 조문정국' 이후 나타난 여야 정당 지지율의 역전에는 이른바 386세대로 불리던 40대의 기여가 가장 컸던 것으로 나타났다. '60년대 태어나 80년대 대학을 다닌 30대'란 의미의 386세대는 올해부터 이들의 막내인 1969년생까지 모두 불혹(不惑)의 40대에 접어들어 '486세대'가 되면서 정치적으로 보수화되는 경향을 보였지만, '조문정국' 이후 다시 진보 쪽으로 'U턴'한 셈이다.

미디어리서치·한국일보의 6월 6~7일 조사에 따르면 정당 지지율은 지난 2월과 비교해 한나라당은 37.2%→27.3%, 민주당은 19.0%→29.4% 등으로 요동쳤다. 특히 40대에서 한나라당은 35.0%에서 23.2%, 민주당은 18.6%에서 26.4%로 10%포인트가량씩 등락했다. 지지율의 변동 폭이 5%포인트 안팎에 그친 20·30대와 계속 한나라당이 우세한 50대 이상에 비해 급격한 변화였다. 한국갤럽이 지난 5일 자체 실시한 정당 지지율 조사에서도 다른 연령층에 비해 40대에서 여야 정당 지지율의 변화가 가장 심했다.

대통령에 대해서도 40대는 30대와 함께 지지 철회자가 가장 많았다. 갤럽조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은 33.5%(2월)에서 26.7%(6월)로 낮아졌는데 연령별로는 30·40대에서 9.1%포인트씩 하락해, 20대(4.3%포인트)와 50대 이상(5.2%포인트)보다 하락 폭이 컸다.

386세대는 절반가량이 40대로 접어들던 2004년 중반 이후 보수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에 힘입어 한나라당 지지율도 열린우리당을 추월했었다. 지난 2007년 대선에선 갤럽의 투표자 사후조사에서 40대의 과반수(52%)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투표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조문정국'을 계기로 이들의 지지성향이 다시 과거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

조문정국은 운동권 출신의 야권 386 국회의원들에게도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야권 내부에서 "386들의 우경화로 야성(野性)을 잃고 있다"는 비난까지 들었던 386 정치인들은 노 전 대통령 죽음 이후, 야당의 강경노선을 주도하는 중심에 다시 섰다. 누구보다 강한 단결력과 투쟁성을 보여주며, 386세대 특유의 응집력으로 투쟁에 소극적이던 관료나 전문가 출신 야당 국회의원들을 이끌고 있다.

관심의 초점은 조문정국이라는 '쇼크' 때문에 486에서 '도로 386'으로 회귀한 40대의 정치성향이 그대로 유지될 것이냐는 점이다. 박길성 고려대 교수는 "이들은 정치적 감성이 가장 예민한 세대"라며 "정치적 상황이 평상 국면으로 돌아가면 다시 안정추구 성향을 보이겠지만 앞으로도 잠재돼 있는 세대 정서가 이번 같은 특수 상황 또는 선거 국면에서 다시 표출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이현우 서강대 교수도 "40대는 '안정과 변화'란 이중적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어느 한쪽으로 쏠릴 수 있다"고 했다. 가상준 단국대 교수는 "경기침체 등으로 정부에 대한 실망감이 누적되고 있던 이들에게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가 정당 지지성향의 변화를 촉발했다"며 "하지만 야당이 잘해서 지지율이 오른 게 아니기 때문에 그 구도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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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아세안 개발원조 확대

李대통령 "對아세안 개발원조 확대"(종합)

(서귀포=연합뉴스) 추승호 기자 = 이명박 대통령은 1일 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에 대한 공적개발원조(ODA)와 인적교류를 대폭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제주도 서귀포시 국제콘벤션센터(ICC)에서 개막된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 참석, 모두 발언을 통해 이같이 말했다. 

이 대통령은 "아세안 국가와 개발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역내 개발 격차를 고려한 맞춤형 지원을 제공해 나가고자 한다"면서 "2015년까지 대(對) 아세안 ODA를 2008년의 2배인 4억달러로 증액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2015년까지 총 7천명의 아세안 연수생을 국내에 초청하고 `월드 프렌즈 코리아(World Friends Korea)' 프로그램을 통해 IT분야 등을 중심으로 1만명의 해외봉사단을 파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문화.인적 교류 활성화를 위해 "한.아세안 협력기금을 2010년 이후 500만달러 규모로 확대하고, 증액된 200만달러는 문화.인적 교류 분야에 집중 투입할 것"이라며 "우수한 아세안 학생들이 한국에 많이 유학할 수 있도록 `글로벌 코리아 스칼라십(Global Korea Scholarship)'을 확대해 금년에 109명인 대상자를 2012년까지 200명 이상으로 늘려가겠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2012년 완공을 목표로 건설중인 `아시아 문화전당'을 통해 문화예술 창작자간 교류를 증대해 나가고자 하며, 방송프로그램 등 문화콘텐츠 교류사업도 적극 추진해 나가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이 대통령은 "세계화의 영향으로 아시아에서도 역내 협력이 점차 불가결해지고 있다. 한.아세안 관계도 이런 시대 흐름에 발맞춰 새롭게 도약해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면서 "우리 정부는 대(對) 아시아 기여 증대, 맞춤형 경제협력, 기후변화 등 범세계적 이슈에 대한 공동대응 등을 위해 노력해 나가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또 마무리발언에서 "동등하고 대등한 관계로 아세안과 교류.협력해나가면서 배울 것은 배우고, 우리가 앞서가고 있는 것은 격차를 줄이도록 협력해 나가겠다"면서 "전세계 글로벌 네트워크가 중요한 때가 왔다. 경제위기 극복도 어느 한두 나라가 앞장서서 되는 게 아니라 국제 공조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chu@yna.co.kr 

진중권, 개인 일로 진보신당 탈당

진중권, 개인 일로 진보신당 탈당 
진보신당 "탈당과 관련해 어떤 절차도 진행되고 있지 않다"
  선대식 (sundaisik) 기자
 
 
 
  
▲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자료사진).
ⓒ 남소연
 진중권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가 지난달 29일 진보신당에 탈당하겠다고 밝혔지만, 진보신당에서 이를 만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진 교수는 1일 오후 <오마이뉴스>와의 전화 통화에서 "탈당했느냐"는 질문에 "개인적인 일로 했다"고 말했다. 그 배경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보신당 쪽은 진중권 교수가 탈당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김종철 대변인은 "진중권 교수가 29일 탈당 의사를 밝혔다가, 주말 쯤 주변 인사들의 만류로 탈당을 유보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한성욱 사무부총장도 1일 진보신당 당원게시판에 "탈당과 관련한 어떤 절차도 진행되고 있지 않다"고 전했다. 


 

"호랑이, 생쥐 잡을 때 최선 다해"


 

진 교수는 이날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원래 이번 2학기에 미국으로 비행 유학을 가려고 했었다"면서 "아무래도 이번 2학기에도 계속 이 땅에 있어야 할 것 같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순수한 시간의 낭비, 순수한 정력의 낭비지만 호랑이는 생쥐 한 마리를 잡을 때에도 최선을 다한다"면서 "원래 생쥐는 호랑이가 즐겨 잡는 동물은 아니지만, 생쥐들 중에는 가끔 무리를 지어 호랑이의 단잠을 방해하는 생물학적 실패작들도 존재한다"고 전했다.


 

진 교수가 5월 29일 진보신당에 탈당의사를 밝힌 것은 같은 날 자신의 블로그에 "일단 싸움을 하기 위해 주변을 좀 정리하겠다"는 맥락에서 이뤄졌다는 해석이 많다. 김종철 대변인도 "29일 진중권 교수가 탈당 의사를 내놓은 이유가 '주변을 정리한다'는 것으로 짐작이 된다"고 말했다.


 

진 교수는 29일 블로그에 쓴 글에서 "그동안 인터넷에서 쏟아지는 공격은 그냥 무시해버렸지만, 이번엔 공격이 권력을 끼고 들어왔다"며 "인터넷 양아치들은 그냥 무시해버리면 되지만, 그 배후에 어른거리는 권력은 그냥 무시해 버릴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들려오는 소리도 심상치 않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일단 싸움을 하기 위해 주변을 좀 정리했다"며 "나 자신을 방어하는 싸움은 그 동안 해본 적이 없어 익숙하지도 않다, 가끔은 피할 수 없는 싸움도 있는 것 같다, 이제 칼을 뽑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2009.06.01 17:50

진중권, 개인 일로 진보신당 탈당

 


진중권, 개인 일로 진보신당 탈당 
진보신당 "탈당과 관련해 어떤 절차도 진행되고 있지 않다"
  선대식 (sundaisik) 기자
 
 
 
  
▲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자료사진).
ⓒ 남소연
 진중권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가 지난달 29일 진보신당에 탈당하겠다고 밝혔지만, 진보신당에서 이를 만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진 교수는 1일 오후 <오마이뉴스>와의 전화 통화에서 "탈당했느냐"는 질문에 "개인적인 일로 했다"고 말했다. 그 배경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보신당 쪽은 진중권 교수가 탈당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김종철 대변인은 "진중권 교수가 29일 탈당 의사를 밝혔다가, 주말 쯤 주변 인사들의 만류로 탈당을 유보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한성욱 사무부총장도 1일 진보신당 당원게시판에 "탈당과 관련한 어떤 절차도 진행되고 있지 않다"고 전했다. 


 

"호랑이, 생쥐 잡을 때 최선 다해"


 

진 교수는 이날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원래 이번 2학기에 미국으로 비행 유학을 가려고 했었다"면서 "아무래도 이번 2학기에도 계속 이 땅에 있어야 할 것 같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순수한 시간의 낭비, 순수한 정력의 낭비지만 호랑이는 생쥐 한 마리를 잡을 때에도 최선을 다한다"면서 "원래 생쥐는 호랑이가 즐겨 잡는 동물은 아니지만, 생쥐들 중에는 가끔 무리를 지어 호랑이의 단잠을 방해하는 생물학적 실패작들도 존재한다"고 전했다.


 

진 교수가 5월 29일 진보신당에 탈당의사를 밝힌 것은 같은 날 자신의 블로그에 "일단 싸움을 하기 위해 주변을 좀 정리하겠다"는 맥락에서 이뤄졌다는 해석이 많다. 김종철 대변인도 "29일 진중권 교수가 탈당 의사를 내놓은 이유가 '주변을 정리한다'는 것으로 짐작이 된다"고 말했다.


 

진 교수는 29일 블로그에 쓴 글에서 "그동안 인터넷에서 쏟아지는 공격은 그냥 무시해버렸지만, 이번엔 공격이 권력을 끼고 들어왔다"며 "인터넷 양아치들은 그냥 무시해버리면 되지만, 그 배후에 어른거리는 권력은 그냥 무시해 버릴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들려오는 소리도 심상치 않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일단 싸움을 하기 위해 주변을 좀 정리했다"며 "나 자신을 방어하는 싸움은 그 동안 해본 적이 없어 익숙하지도 않다, 가끔은 피할 수 없는 싸움도 있는 것 같다, 이제 칼을 뽑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2009.06.01 17:50 ⓒ 2009 OhmyNews

"盧가 '무능'에 '부패'까지 뒤집어쓰게 되는 풍토"

"盧가 '무능'에 '부패'까지 뒤집어쓰게 되는 풍토"

[박동천의 집중탐구]<44>도덕의 탈을 쓴 권력

기사입력 2009-05-28 오전 10:19:26

제4부 선험주의: 선견지명 프레임
제6장 도덕의 탈을 쓴 권력


2007년 선거 때 "무능보다 부패가 낫다"는 생각이 나돌았고,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그런 상황 자체를 실망스럽다고 평했다. 나름대로 부패에 맞서 싸운 진보개혁세력의 대표 중 한 사람으로서, 자신을 "무능하다"고 매도해버리는 풍조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화로 부패를 정당화하는 비약을 개탄한 것이다. 그런데 2009년 박연차 관련 추문에 연루되어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는 부패와 맞서 싸웠다는 말도 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사회의 진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도덕적 개선을 도외시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든 사회변혁세력이라면 기득권 세력의 부패와 타락을 공박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도덕이라는 주제를 직접적으로 정치에 적용하게 되면 오히려 도덕과 권력을 뒤죽박죽으로 섞어서 사회의 개선을 지연시킬 위험이 대단히 높다. 기득권 세력의 부도덕성에 대해서는 "무능보다 낫다"는 식으로 넘어가면서, 진보인사의 오점에 대해서는 "세상에 믿을 사람 없다"는 식으로 과장하는 이중기준이 쉽게 통용되기 때문이다.

김근태는 2000년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선거에서 사용한 자금 중 2억4500만 원이 사실상 불법 선거자금이었다고 양심고백을 했다가, 그중 권노갑에게 받은 후원금 2000만 원에 대해서만 기소되어 1심에서 벌금 500만 원에 추징금 2000만 원을 선고받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범의가 인정된다"고 보면서도 다른 사건들과의 형평을 고려해서 선고를 유예했다. 잘못이 있다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한다면 1심에서와 같은 판결이 마땅하다. 그러나 항소심에서는 "같은 액수를 받은 정동영은 아무 처벌을 받지 않"았음을 형평성의 근거로 들었다. 나는 이 사건에서 항소심 재판부처럼 다른 사건들과 형평성을 고려하는 관점이 우리사회를 주도하는 정치의식에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랬다면 단순히 희미한 몇 가지 의혹을 검찰이 제기하면서 중계 방송한 것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하는 이 말이 억울하다면, 검찰은 노 전 대통령 일가에 대한 수사를 의연하게 마무리해서 기소할 사람은 기소하고 고인이더라도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지 밝히면 된다. 지금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범죄사실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를 단지 죽음으로 항변했다는 이유로 없다고 우길 수준은 아니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의 결백을 믿는 사람일수록 그런 수준은 넘어선 지가 오래다.

이 문제는 세속화(secularization)라고 하는 주제와 관련된다. 서양의 역사에서 세속화란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가리킨다. 국가권력이 교회와 분리되어 세속화되었다는 뜻이다. 한국사회는 특정한 종파가 국가권력을 차지한 것 때문에 문제가 된 적이 없다고 흔히 간주되기 때문에 세속화의 문제가 진보세력들에게도 중요한 관심사로 떠오른 적이 없다. 또는 기독교의 창조론과 같은 특정 신학을 학교에서 가르치지만 않으면 문제는 없다는 듯이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세속화의 문제는 양심의 자유, 가치 다원주의, 표현의 자유, 개인의 인권, 등과 직결되는 중대한 함의를 지니며, 나아가 도덕의 영역에 정치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발본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서양 사회에서 세속화란 사법적 범죄(crime)와 도덕적 죄악(sin)을 구분하고, 도덕적 죄악이란 사법적 소추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뜻이다. 도덕적 죄악을 정치권력으로 규제할 수 없다고 보는 데에는 주로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논리적 이유로서, 도덕이란 가치의 영역에 속하는 사항으로, 기본적으로 문화와 관습과 기질과 인생관에 따른 다양성이 본질적 속성에 해당한다. 신의 명령이 무엇인지도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다를 뿐 아니라, 신이 있는지 여부마저도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르다. 둘째 역사적 이유로서, 실제로 도덕이나 양심이나 종교에 관해 한 쪽의 의지를 다른 쪽에게 강요하다보면 가장 야만적인 무력투쟁이 발생한다. 서양의 경우 종교개혁 이전부터 19세기까지 무수한 종교전쟁을 치르면서, 설사 다른 종파들이 진실로 이단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을 죽이기 위해 자행된 십자군의 야만이 무엇보다 더 큰 죄악이라는 각성이 일어났다. 셋째 기술적 이유로서, 도덕적 죄악이란 행위의 결과뿐만 아니라 동기나 이유 또는 정성부족 등, 내면의 상태와 관련되는 경우가 많다. 도덕의 관점에서는 실제로 사람을 죽인 행위뿐만 아니라, 살인할 마음을 먹는 것만도 죄악이 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이런 내면의 차원에 공권력이 개입할 수 있게 되면, 공권력 자체의 정합성이 철저하게 무너지고 만다. 여기서는 이 세 번째 요소를 집중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의도와 동기를 문제 삼는 풍조는 우리사회 도처에서 발견된다. 바로 앞 장에서 논의했듯, 황석영에 대한 자칭 진보진영의 공황에 가까운 반응도 그의 행위로부터 바로 그의 "불순한 의도"를 유추해서 매도하는 좋은 예다. 김대중이 "노벨상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남북정상회담을 했다고 하면, 정상회담의 의의가 훼손된다고 여기는 사유구조도 마찬가지다. 노무현이 "법이 허용하는 한도에서 열린우리당을 도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을 가지고 탄핵까지 몰아간 정서도 마찬가지다. 미네르바의 글을 가지고 "공익을 해할 목적"이었다고 엮어서 인터넷 세상에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검찰이나, 애당초 "공익을 해할 목적"을 처벌할 수 있다고 본 전기통신기본법의 입법자들이 개인들의 내면세계를 통제해야 한다는 대한민국의 풍토병에 충성스럽게 감염되어 있는 상태인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모든 조항이 그와 같고, 형법의 명예훼손 조항 또한 마찬가지다. 이런 모든 법조문들은 바로 내면의 목적과 동기와 이유와 의도와 가치와 사상과 양심과 성향을 문제 삼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밖에 될 수가 없다. 이것은 복잡한 논증이 전혀 필요 없는 아주 간단한 얘기다. 상대의 "의도"를 시비하기로 한다면, 눈을 한번 치켜뜨거나 아니면 내리 깐 것만 가지고도 도전 또는 불복이라고 뒤집어씌우기가 여반장이다. 실제로 수양대군은 황보인과 김종서를 죽이고 거사성공을 자축하는 파티를 열었는데, 그 자리에서 덩달아 웃지 않은 허후(許詡)는 눈엣가시로 찍혔다가 결국 죽임을 당했다.

한나라당의 의원들 가운데 기껏 "쇄신"을 파격적으로 주장한다는 사람들이 "강제적 당론"을 금지해달라고 청원하는 가련한 모습에서(☞ "'국회의원 독립선언', 가능할까?") 나는 자꾸만 수양대군의 저런 행태가 연상된다.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이 안 따른다면 어떻게 "강제적 당론" 따위가 있을 수 있는가! 그렇지만 한 번의 표결에서 취한 자세로부터 "역심"을 읽어내는 풍토라면 모든 "당론"은 곧 절대명령과 같게 되는 것이다. 표결에서 독자의견은 고사하고, 술 한 잔이나 밥 한 그릇조차도 동패들과 같이 어울리지 않으면 찍히기가 십상이다.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자유롭게 양복 벗고" 얘기하자며 저고리를 벗는데, 자유롭게 안 따를 정도로 간 큰 장관이 대한민국 역사에서 몇이나 있었을까? 실제로 있었는지도 의문이거니와, 있었더라도 아마 오래 자리를 지키지는 못 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교실에 강제로 감금당하는 인질훈련을 "자율학습"이라고 부르는 세뇌를 당연시하는 민족이기 때문에, 장관이나 대법관 또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눈치를 보는 것이 습성화되어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나름대로 판단할 능력이 아예 없고, 배경의 권력에 기대 주입된 의견을 우기는 것이 배움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내면을 통제한다는 것은 곧 분별력을 싹도 트지 못하게 짓밟아버리는 짓과 같다. 얼핏 보면 위험하거나 해로운 의도만을 걸러내면 될 것처럼 보이지만, 덩달아 웃지 않는 데서 "반역할" 의도를 읽어내는 식의 견강부회에는 전혀 아무런 분별력이 작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말과 행동의 뒤에 숨은 의도와 동기가 위험하거나 해롭다는 이유로 처벌하기까지 가지 않고, 단순히 말과 행동의 결과가 위험하거나 해로울 수 있다고 여겨서 처벌하더라도 사회의 모든 분별력이 말라죽는다는 논증은 이미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에서 더 이상 명확할 수 없도록 뚜렷하게 명시해 놓았다 (앞 제2부 제5장 제3절 참조). 그러므로 내심의 의도가 아니라 명시적인 발언의 결과, 그 중에서도 내용이 아니라 발언의 맥락과 방법까지를 볼 때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을 초래하는 것만을 규제하도록 처벌권력을 엄격하게 제한해야, 개인들의 마음에 자발적인 분별력이 자랄 수 있다는 얘기다.

문명사회에서 정치적 권위의 핵심은 사법적 규제에 있다. 정부가 부과하는 공민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거나, 정부의 시책을 물리력으로 저지하는 행위라고 해도, 규제와 처벌은 어디까지나 법률의 재가를 받아서 이루어져야 한다. 범죄자라고 해서 경찰관들이 지나가는 김에 군밤을 먹이거나 따귀를 때려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발상,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다면 피해를 복수하는 취지에서 사형이 마땅하다는 발상, 대통령의 설교 한 마디로 부유층의 호화결혼을 금지할 수 있다는 발상 등은 모두 내면세계를 통제하겠다는 심보에서 나온다. 권양숙 여사나 그 자녀들이 박연차와 돈거래한 일이 구체적으로 어떤 범죄에 해당하는지는 밝힐 필요도 없이, 돈거래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노무현이 "무능"에 더해 "부패"까지 모든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는 풍토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 ⓒ故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장의 위원회

 


우리 사회에 진보진영에 대해 이중기준이 대단히 크게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본다. 예컨대 몇 년 전 이필상 교수가 고려대학교 총장에 선임되었다가 구설수에 올랐던 혐의는 불찰이랄 수는 있지만 심각한 도덕적 흠결이라고는 볼 수 없다. 반면에 현인택 통일부장관의 경우는 명백한 이중게재, 즉 자기표절이라고 봐야 한다. 사실상 똑같은 논문을 두 군데 싣더라도 자기표절이 아닐 수는 있다. 독자층이 너무나 달라서 전에 실은 글을 읽을 기회가 전혀 없다고 봐야 할 독자들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똑같은 논문을 게재하는 것이 지식의 전파라는 문명사회의 목적을 위해 필요한 일이 된다(☞ "표절"). 하지만 현인택은 청문회에서 마냥 "나는 몰랐다"는 잡아떼기로 일관했다. 적극적이고 당당한 변론이 아니라 잡아떼기라고 하는 위축적인 자기방어밖에 할 말이 없었다는 점이 바로 그 일이 부끄러운 짓이었다는 반증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필상은 총장직을 수행하지 못했고, 현인택은 장관에 취임했다. 보수파 현인택에게는 명백한 자기표절도 흠이랄 것이 못 되지만, 진보파 이필상에게는 별 일 아닌 것도 누가 마이크 잡은 김에 흠결이라고 광고만 하면 치명적인 부도덕으로 둔갑한다.

예수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자, 아무도 간음한 여인을 더 이상 때리지 못했다. 현인택의 잘못은 예수의 가르침에 기대서 넘어간 셈이다. 하지만 이필상에게는 예수가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다.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자가 돌아서자마자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를 옥졸에게 넘기는 짓이 한국사회의 일상적인 규범이 되어 있는 것이다. 간음한 여인을 때리지 말라고 설교한 예수도, 만 달란트를 용서받자마자 백 데나리온을 그악스럽게 뜯어내는 악독한 종은 벌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마태복음 18장 34-35절).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지금 보수파에게는 예수의 논리로 현인택을 용서하는 반면에, 진보파에게는 악독한 종이 했던 짓을 하고 있으면서 잘못인 줄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보수신문들이 악질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면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나는 보수신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사회에서 진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일수록 도덕과 정치를 뒤죽박죽으로 섞어버리는 무분별한 자기최면에 빠져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미개하고 불신이 팽배한 시대의 애처로운 처세술인 "참외밭에서 신발 끈 고치지 말라",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따위의 소리를 도덕의 격언인 줄 착각하는 미혹이 있는 것이다. 참외밭에서 신발 끈 고친 사람을 도둑으로 몰아 고발한다면 그 놈이 악당이다. 의도가 아니라 행위가 악랄한 것이다. 그런 악당은 내버려두면서, 신발 끈 고쳐 맸을 뿐인 사람을 "처신을 잘못했다"는 둥, "물의를 일으켰으니 자업자득"이라는 둥, "오십보 백보"라는 둥, "군자로서 할 일이 아니"라는 따위로 매도한다면 사회가 어떤 꼴이 될까? 검찰이 수사만 개시하면 바로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로 받아들여 버린다면, 검찰을 뒷구멍으로 조종할 수 있는 진짜 악당 말고 누가 온전히 인격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조선일보가 자기 회사와 방상훈 사장의 실명을 국회에서 거론했다는 이유로, 헌법이 보장하는 국회의원의 면책특권까지 무시하겠다고 덤빌 수 있는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도덕적 죄악과 사법적 범죄를 마구잡이로 혼동한 결과 남는 것은 이현령비현령이라고 하는 최악의 깡패논법뿐이다.

정치는 군자가 뭔지를 앞에서는 말로 흥얼거리면서 뒤에서는 별짓을 다하는 한량들의 여흥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을 위한 생존의 규칙이다. 모두들 마구 살아남기로만 하면 험악해지기 때문에, 각자의 욕구를 인정하면서 경쟁만은 평화롭게 말로 하자는 것이 문명의 요체다. 이기심을 버리고 이타심을 추구하는 것은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하고 싶은 사람이 하는 것이지, 법으로 정해놓고 모든 사람에게 강요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도덕을 법으로 강요하는 사회란 예외 없이 악당이 위선의 재주까지를 익혀 군림하면서, 제 눈에 거슬리는 사람은 성인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괴롭히는 곳이다. 유럽 중세의 교회재판에서 조선시대의 부관참시까지, 악독한 종들은 자기가 받은 용서를 상대방에 대한 가혹한 트집잡기로 갚는다. 사회의 진보를 바란다고 하면서 도덕을 정치에 바로 적용하게 되면, 스스로 그런 악독한 종이 되든지, 아니면 적어도 악독한 종이 하는 짓을 도덕인 줄 알고 구경하는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서양사회는 지독한 종교전쟁을 겪으면서 이런 이치를 깨달은 결과, 오히려 세속화가 사회신뢰를 낳는다는 발상의 지평을 열 수 있었다. 관인(寬忍) 또는 똘레랑스란 바로 세속화의 바탕에 깔려있는 이와 같은 깨달음과 새로운 해석이 맺혀서 생성된 결정체인 것이다. 똘레랑스의 핵심은 우리 모두의 이기심을 관인하면서, 다만 이기심이 실제로 다른 사람을 해칠 때 그러지 못하도록 행태를 규제하는 데에 있다.   /박동천 전북대 교수 

노무현의 죽음, 그래서 할 일은…

 
 
[박연미의 명랑한 경제]노무현의 죽음, 그래서 할 일은…
 
2009년 05월 28일 오후 17:20
박연미기자 change@inews24.com 

코 끝이 싸하게 춥던 2003년 2월25일.

휴가를 냈다. 손꼽히는 보수 신문에서 일하던 시절이다. 취재진 아닌 새천년민주당 자원봉사자 신분으로 16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다.

인터넷 자봉단 모집에서 당당히 선발된 내 임무는 폼나게 말해 내빈 안내, 실은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주는 일이었다.

국회 앞마당에서 한 시간, 두 시간….

한기에 손발이 오그라들고, 바람따라 간이 화장실의 얄궂은 냄새가 밀려왔다. 그렇지만 괜찮았다. 거기 모든 비주류의 희망,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있었으니까.

살며 처음 정치후원금을 내 본 대선이었다. "원칙을 바로세워 신뢰 사회를 만듭시다. 정정당당하게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로 나아갑시다."(노 전 대통령 취임사 中)

대통령의 목소리는 사이다처럼 청량했다. '사필귀정(事必歸正)'. 격언이 진실임을 깨닫게 한 산 증인, 그를 위해 추위에 떤 날, 기뻤다.



그러나 정치는 동화가 아니었다.

기득 세력은 새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보수 신문들은 파격에 반대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대통령 자신의 특권을 줄이는 데서 시작된 개혁은 보수세력의 목줄을 죄었다.

새 정부는 청춘(靑春) 같았다. 속도와 통증을 조절하는 데 미숙했다. 언론들은 이 젊은 정부의 투박한 국정 운영을 '무능'이라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의 직설화법도 끝없이 말거리를 주었다. 콘텐츠가 아니라, 그걸 담은 말이 문제되는 날이 많았다.

이라크 파병 결정, 한미 자유무역협상 개시. 정치적 이해관계를 초월한 정책 추진에 지지자들은 사분오열했다. 재벌 사돈도, 막강한 집안 배경도, 든든한 학연도 없는 대통령은 헌정 초유의 탄핵 시도에도 방탄조끼 없이 포탄을 맞았다. 그야말로 논쟁의 시절이었다.

하지만 격정은 멀고, 일상은 가까운 법.

노무현의 승리에 울고 웃던 지지자들은 어느새 생활인으로 돌아가 있었다. 정가에서 벌어지는 지리한 입씨름이 점점 지겨워졌다. '노짱'을 부르짖던 이들은 피로해졌다. 보수 언론들은 "무능한 청류보다 유능한 탁류가 낫다"고 속삭였다.

그 사이 '노무현 놀이'가 시작됐다.

월드컵 대표팀이 가나에 완패했다는 기사에도, 유명 할리우드 배우가 결혼생활에 실패했다는 외신 아래에도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라는 맥락없는 댓글이 달렸다. 민심의 향배가 읽혔다.

2006년 5.31 지방 선거 이후 크게 유행한 이 놀이는 결국 세계 최대의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에 등재되고 만다. 영어, 중국어 등 세계 10개국 언어로 개설돼 매일 수백만명이 방문하는 인터넷 UCC백과사전에 대한민국의 첫 인터넷 대통령 '노무현'의 이름이 조롱거리로 남았다.

그리고 정권이 바뀌었다.

17대 대선은 노련함과 부가가치 창출 계획이 승리한 선거였다. 국민들은 아마추어리즘에 지쳐있었다.

노회함을 산 대가는 컸다.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가거나 인터넷에서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하다간 철창 신세를 지는 세상이 되었다. 입은 있으되 말 할 수 없는 조용한 세상. 국민들은 새 정권이 들어선 이 시대를 '신(新) 공안정국', '제2의 유신시대'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났고, 2009년 5월 23일 전직 대통령이 투신했다.



푸근한 시골 할아버지로 살던, 그러나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인터넷 정객 노 전 대통령은 고향 마을 단단한 바위에 몸을 던져 생을 부러뜨렸다. 구속된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게서 재임 중 600만달러를 받은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은 뒤다.

전직 대통령이 기업인에게 거액의 돈을 받은 건 분명 석연치 않은 일이었다. 영부인이 건네 받았다는 자금은 대부분 제 앞가림을 하고도 남을 나이의 자녀들에게 전해졌다. 답답한 노릇이다. 액수를 떠나 대통령이 재임 중 알았다면 법적 처벌을, 몰랐다면 도덕적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문제는 과정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광주대학살을 벌인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 이어 사상 세 번째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도덕성을 생명으로 삼던 그의 평생이 무너졌다.

상식적인 일이었을까. 노 전 대통령의 혐의가 확정되었다 치자. 죄의 경중을 묻는다. 그들 셋, 과연 한 줄에 세울만 한가.

영국의 유력 일간 더 타임스는 노무현의 죽음을 일러 그랬다. "부패한 사람들은 부패와 함께 살아갈 수 있지만 정직한 개혁 운동가였던 노무현은 그러지 못했다"고.

다시 묻는다.

검찰의 수사는 불편부당했는가, 그들이 자신하던 정황 증거들은 전직 대통령을 검찰로 불러들일 만큼 믿을만 한 것이었는가, 검찰과 언론은 과연 무죄추정의 원칙을 지킬 의지가 있었는가, 그걸 보는 국민들은 이성을 차갑게 식혀 단단히 붙들고 있었는가. 모두가 모두에게 면목없어 마땅한 때다.

이제 하루 뒤면 영결식.

존경 아니라 사랑을 받았던 대통령 노무현과 내일이면 안녕이다.

그가 숨을 거둔 지 이제 엿새, 국민들의 염원에도 서울광장은 끝내 '명박산성'에(이명박 정부가 시위나 군중 결집을 막기 위해 전경차로 특정 지역을 가로막은 모습을 빗댄 말. 2008년 6월 위키피디아에 등재되었다 삭제됨) 가로막혀 열리지 않았다.

해묵은 사진까지 꺼내들고 고인과의 인연을 상기하던 여당 원내대표는 식지 않는 추모열기에 "국민들이 북핵 위기감이 없는 것 같다"며 이내 속내를 드러냈다. 안간힘쓰고 있지만, 여당과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추락 중이다.

그리고 국민들은, 대선과 총선 때 나들이 가거나 늦잠을 잔 젊은이들은, 참으로 아프게 '투표의 경제학'을 되뇌는 중이다. 거대한 노무현 추모게시판이 돼버린 유력 포털사이트에선 "다음부턴 꼭 투표합시다"가 백 마디 성토를 대신하는 인사말이 돼버렸다.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ID '잎싹'은 말했다. "투표를 해야하는 날에는 꼭 빠지지 않고 투표를 하고… 그래서 오늘을 기억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투표를 꼭 하고, 제대로 하고, 상식적인 세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노희경을 베낀다.

화장실 안내마저 자랑스럽게 만들었던, 와장창 무너져내릴 땐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이라도 나누고 싶었던 노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빌며.

"참 묘하다.
살아서는 노무현이 그냥 노무현이더니, 그 이상은 아니더니,

돌아가시고 나니 그가 희망의 다른 이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성인 22%, 배우자 성경험 용인

'성인 22%, 배우자 성경험 용인'

2004-11-06 09:40

 
성인 남녀 5명 가운데 1명은 배우자나 애인이 과거 다른 사람과 성관계를 맺은 경험을 용인한다는 조사결과가 나왔습니다.



사랑의 전화 복지재단이 지난 9월 성인 남녀 360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배우자와 애인이 예전에 다른 사람과 사귀었던 경험이 있더라도 용인하겠다는 응답이 56%나 됐고, 성관계를 문제삼지 않겠다는 응답도 22%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알리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다면 알리지 않겠다는 응답이 86%에 달해 현재 가정의 행복과 원만한 부부관계를 위해 감출 것은 감추겠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또, 결혼을 전제로 한 혼전 동거에는 남성 응답자의 66%가 찬성했지만, 여성 응답자는 43%만 동의했습니다.



김준영 [kimjy@ytn.co.kr]

`죽음앞에 선' 김대중 구한 교황편지 공개

 
2009년 05월 19일 (화) 09:48  연합뉴스

`죽음앞에 선' 김대중 구한 교황편지 공개

故 요한 바오로 2세, 당시 全 대통령에 DJ 구명 편지 보내 
(광주=연합뉴스) 홍정규 기자 = 5.18 민주화운동을 배후 조종했다며 `내란음모' 주동자로 몰려 사형이 확정됐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목숨을 건지는 데 당시 교황이 크게 기여했음을 짐작하게 하는 문서가 공개됐다. 

19일 광주일보가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받은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자료에 따르면 당시 교황인 고(故) 요한 바오로 2세는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김 전 대통령의 감형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1980년 12월11일자로 보냈다. 

교황의 메시지에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1981년 1월5일자 `회답서신'을 통해 "(김대중은) 어떠한 정치적 이유가 아닌, 오직 불법적인 방법과 폭력에 의한 합법 정부의 전복 기도를 포함한 반국가적 범죄로 인하여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이며, 아직 대법원에 계류 중"이라고 선을 그으면서도 "(교황) 성하의 호소가 순전히 인도적 고려와 자비심에 의거한 것임을 유념하겠다"고 답했다. 

김 전 대통령은 대법원에서도 사형이 확정됐지만 교황을 비롯한 국제 사회에서 구명 운동을 벌이고 미국 등이 `김대중 사형은 지나치다'며 군사정권을 압박한 결과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이 같은 내용은 신군부와 미국 백악관 사이에 김 전 대통령에 대한 형 집행 여부를 놓고 긴박한 `거래'가 오갔음을 보여주는 비밀문서가 2005년 공개되면서 `사실(史實)'로 확인된 바 있다. 

한편 감형 소식에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시 全 전 대통령 앞으로 같은 해 2월14일자 `교황 친서'를 보내 "각하께서 신속히 배려해 주신 데 대해 감사를 드리고자 한다. 각하께 최대의 경의를 표하며 훌륭한 한국 국민들에게 신의 가호와 은혜가 있기를 기원한다"는 뜻을 전했다. 

김 전 대통령은 다시 징역 20년으로 감형되고 나서 1982년 형 집행정지를 받고 미국 망명길에 올랐으며, 1987년 사면.복권되고 대통령 임기를 마친 2003년 내란음모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해 이듬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번 자료와 관련해 김 전 대통령의 한 측근은 "당시 국제 사회의 구명운동이 결정적인 역할을 해 김 전 대통령이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고 회고하며 "구명운동에 교황청이 적극적으로 동참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자료"라고 말했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은 1980년 신군부가 정권 탈취 과정에서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광주의 5.18 민주화운동이 `김대중 일당'의 내란음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조작한 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을 비롯해 고(故) 문익환 목사와 이해찬 전 총리 등 당시 민주화 인사 24명이 연루돼 고초를 겪었다. 

zheng@yna.co.kr

日누리꾼들 "반크 대항 활동하자"

2009년 05월 18일 (월) 12:02  연합뉴스

日누리꾼들 "반크 대항 활동하자"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일본의 누리꾼들이 동해와 독도 지키기에 앞장서는 한국의 반크(VANK.단장 박기태)에 조직적인 대항 활동을 벌이고 있다. 

18일 반크에 따르면 현재 일본에서 혐한류(嫌韓流)를 퍼트리는 대표적인 사이트인 '엄선 한국정보'(blog.goo.ne.jp/pandiani)는 방문 누리꾼들에게 반크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일본해 표기를 동해 병기로 바꾸고 있는 것을 막아야 한다며 대대적인 방해운동을 선동하고 있다. 

이 블로그는 혐한류 책을 일본인들에게 구입하도록 유도하거나 혐한류를 퍼트리도록 하고 있으며 매일 평균 1만 4천여 명이 방문, 일본 내 블로그 랭킹에서 4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반크 측은 전했다. 

이 블로그는 '일본해 표기보호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협력 구한다!'라는 주제로 16일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날 블로그에는 "현재 우리는 반크가 해외 기관에 일본해 표기를 동해로 바꾸기 위해 어떤 기관에 연락하고, 어떤 메일을 보내며, 향후 어떤 기관에 보낼 것인지를 파악하고 있다. 또한, 반크가 보내는 모든 기관에 다시 일본해로 반박하는 메일을 보내고, 동해라고 시정한 곳은 다시 일본해로 바꾸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내용을 실었다. 

그러면서 이 블로그는 "우리의 우선 목표는 일본해 표기의 정당성과 동해 표기의 부당성을 호소하는 메일 서식을 일본어와 영어로 만들어 배포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박기태 단장은 "이 블로그는 반크 활동을 분석하고, 조직적으로 방해하고자 작전을 꾸미고 있다"며 "일본 내에서 반크처럼 활동하려는 목표를 가진 민간단체가 곧 출범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분석했다. 

박 단장은 "반크는 일본 누리꾼의 조직적인 방해 활동이 있더라도 한국의 국가 브랜드를 세계인에게 알려나가기 위해 '한국 문화관광 블로그 네트워크단'(www.prkorea.com/metablog)을 조직하겠다"고 덧붙였다. 

ghwang@yna.co.kr 

하버드대생 268명 인생 추적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 성공했다"-조선일보

 하버드대생 268명 인생 추적… 3분의 1은 정신질환 "엘리트라는 껍데기 아래서 고통받아"


'그는 하버드대의 수재였다. 아버지는 부유한 의사, 어머니는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정서적으로 안정돼 있었고, 판단력이 뛰어났다. 이상도 높았고 건강했다. 그러나 31세에 부모와 세상에 적대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돌연 잠적하더니 마약을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느 날 갑자기 사망했다. '전쟁 영웅이었고 평화운동가였다'는 부음기사가 나갔다.' (141번 사례)

'활발하던 한 학생은 결혼 후 세 아이를 낳고 이혼했다. 동성애 인권운동가가 됐다. 삶에 더 남은 것이 없다며 술에 빠져 살다가 64세에 계단에서 떨어져 죽었다.'(47번 사례)

1937년 
미국 하버드대 남학생 268명이 인생사례 연구를 위해 선발됐다. 세계 최고의 대학에 입학한 수재 중에서도 가장 똑똑하고 야심만만하고 환경에 적응을 잘하는 이들이었다. 후에 제35대 미국 대통령이 된 존 F 케네디(Kennedy), 워싱턴포스트 편집인으로서 닉슨의 워터게이트사건 보도를 총괄 지휘했던 벤 브래들리(Bradlee·현재 부사장)도 끼어 있었다.

당시 2학년생으로 전도유망했던 하버드생들의 일생을 72년에 걸쳐 추적한 결과가 12일 시사월간지 '애틀랜틱 먼슬리' 6월호에 공개됐다. 1967년부터 이 연구를 주도해온 하버드 의대 정신과의 조지 베일런트(Vaillant) 교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이며, 행복은 결국 사랑"이라고 결론지었다.


연구결과 47세 무렵까지 형성돼 있는 인간관계가 이후 생애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변수였다.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 가장 안정적인 성공을 이뤘다. 연구 대상자의 약 3분의 1은 정신질환도 한때 겪었다. "하버드 엘리트라는 껍데기 아래엔 고통받는 심장이 있었다"고 잡지는 표현했다. 행복하게 늙어가는 데 필요한 요소는 7가지로 추려졌다. 고통에 적응하는 '성숙한 자세'가 첫째였고, 교육·안정적 결혼·금연·금주·운동·적당한 체중이 필요했다.

베일런트 교수는 "어떠한 데이터로도 밝혀낼 수 없는 극적인 주파수를 발산하는 것이 삶"이라며 "과학으로 판단하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이고, 숫자로 말하기엔 너무나 아름답고, 학술지에만 실리기에는 영원하다"고 말했다.

특정 개인의 역사를 장기적으로 추적한 '종적(縱的) 연구'의 최고봉을 보여주는 '하버드대 2학년생 268명 생애 연구'는 1937년 당시 하버드 의대 교수 알리 복(Bock)이 시동을 걸었다. 연구를 재정적으로 지원한 백화점 재벌 W T 그랜트(Grant)의 이름을 따 '그랜트 연구'라고도 불린다.

연구는 "잘 사는 삶에 일정한 공식이 있을까"라는 기본적인 의문에서 출발했다. 연구진에는 하버드대 생리학·약학·인류학·심리학 분야의 최고 두뇌들이 동원됐다. 이들은 정기적인 인터뷰와 설문을 통해 대상자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체크했다.

268명 대상자 중 절반 정도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남은 이들도 80대, 90대에 이르렀다. 지난 42년 간 이 연구를 진행해온 조지 베일런트(Vaillant) 교수는 대상자들의 행적이 담긴 파일을 소개하며 "기쁨과 비탄은 섬세하게 직조(織造)돼 있다"는 윌리엄 블레이크(Blake·1757~1827)의 시구를 인용했다.

최고 엘리트답게 그들의 출발은 상쾌했다. 연방상원의원에 도전한 사람이 4명이었고 대통령도 나왔다. 유명한 소설가도 있었다. 그러나 연구 시작 후 10년이 지난 1948년 즈음부터 20명이 심각한 정신 질환을 호소했다. 50세 무렵엔 약 3분의 1이 한때 정신질환을 앓았다.

행복하게 나이가 들어가는데 필요한 '행복 요소' 7가지 중, 50세에 5~6개를 갖춘 106명 중 절반이 80세에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고 있었다. '불행하고 아픈' 이들은 7.5%에 그쳤다. 반면 50세에 3개 이하를 갖춘 이들 중 80세에 행복하고 건강하게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개 이하의 요소를 갖춘 사람은 그 이상을 갖춘 사람보다 80세 이전에 사망할 확률이 3배 높았다.

50세 때 콜레스테롤 수치는 장수(長壽)와 무관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콜레스테롤 수치가 중요한 시기가 있고 무시해야 할 시기가 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어릴 적 성격도 장기적으로는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수줍음을 타던 어린이가 청년기에는 고전하더라도 70세에는 외향적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았다. 대학교 때의 꾸준한 운동은 그 후 삶의 신체적 건강보다는 정신적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성공적인 노후로 이끄는 열쇠는 지성이나 계급이 아니라 사회적 적성, 즉 인간관계였다. 형제·자매 관계도 중요하다. 65세에 잘 살고 있는 사람의 93%가 이전에 형제·자매와 원만하게 지낸 사람들이었다.

인간의 기억이 나이가 들어가며 왜곡되는 모습도 보여줬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이들 중 34%가 1946년에 "적군의 포탄 아래 놓여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25%는 "적군을 죽여본 적이 있다"고 밝혔다. 42년 후인 1988년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포탄 아래 놓여봤다"는 답변자는 40%로 늘었고, "죽여봤다"는 답변은 14%로 줄었다. "기억은 시간이 갈수록 모험성은 첨가되고 치명적 위험성은 약화되는 쪽으로 왜곡된다"는 것이 베일런트 박사의 진단이다.

한편,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Brooks)는 "이번 연구는 대작가 도스토옙스키의 상상력 속에서만 가능할 것 같은 소설 같은 삶이 현실에도 존재함을 보여준다"며, "과학의 잣대도 숨을 죽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삶은 미묘하고 복잡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평했다.

 

[천자칼럼] 하버드생의 삶 -한국일보

행복은 성적순인가. 좋은 대학에 다니면 평생 잘 살까. 삶에도 어떤 공식이 있을까. 성공적인 삶의 요소는 무엇인가. 모두가 궁금해 하는 이 같은 물음에 대해 미국 하버드대 연구진이 장장 72년에 걸친 생애 추적 연구 결과 행복한 인생의 첫째 요소는 '인간관계'라는 답을 내놨다. 

1937년,하버드대 2학년생이던 268명을 선발한 뒤 하버드대 생리학 · 약학 · 인류학 · 심리학 분야 최고 두뇌들이 참여,지속적으로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체크했더니 행복하게 늙는 데 필요한 첫째 요소는 고통에 적응하는 '성숙한 자세'고,교육 · 안정적 결혼 · 금연 · 금주 · 운동 · 적당한 체중도 중요했다고 한다.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과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를 지휘했던 벤 브래들리(워싱턴포스트 부사장)도 포함된 대상들은 하버드 출신답게 출발은 다들 괜찮았으나 그중 일부는 30세 무렵부터 정신질환을 호소했고,50세 즈음엔 3분의 1이 한때 정신질환을 겪었다는 것이다. 

연구 결과 50세 때 콜레스테롤 수치는 장수와 무관하고,어린 시절 성격도 길게는 별 상관없고,기억은 왜곡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2차 대전 참전자들에게 물어봤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적군 포탄 아래 놓여본 적이 있다'에 대한 답은 늘고 '적군을 죽여본 적이 있다'는 줄었다는 것이다. 

남자들이 나이들수록 군대 시절 얘기를 비롯한 과거의 영웅담을 괜히 자꾸 부풀리는 게 아닌 셈이다. 하버드생과 비하버드생을 비교한 게 아니라 하버드생만 대상으로 한 만큼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단정짓긴 어려워 보인다. 분명한 건 인생이란 건 미묘함과 복잡함,불확실성으로 가득찬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어쩌랴.평범해 보였던 사람들이 더 행복했다고 하듯 빼어나지 못한 데 연연할 게 아니라 가진 것에 감사하며 지금 이 순간 하루하루 따뜻하고 씩씩하게 살아보는 수밖에.행복한 생활은 놀랄 만큼 선한 생활과 유사하다는 버트런드 러셀의 이런 말도 기억하면서.

'행복해지기 위해선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자면 자기 환경이 남달리 불행할 게 없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설득시키는 게 필요하다. 조건이 부족해도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자신에게 타이르라.그러다 보면 움츠리지 않고 현실과 대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행복의 조건)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

소녀 성폭행’ 日 PC게임

‘소녀 성폭행’ 日 PC게임, 국제사회 ‘경악’

소녀를 포함, 여성들을 성폭행하는 내용의 일본 컴퓨터 게임을 향한 비난이 고조되고 있다고 요미우리신문(인터넷판)이 8일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문제의 게임은 주로 성인용 게임을 제작하는 I사(요코하마시 소재)가 2006년에 출시한 것으로, 미성년으로 보이는 여자 2명과 그의 어머니를 전차 안에서 성희롱한 후 강간하고 임신 및 낙태시키는 과정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묘사하고 있다. 

일본 I사가 제작한 성인용 컴퓨터 게임(출처=일본 아마존)
국제 여성인권단체인 ‘이퀄러티 나우’(본부 뉴욕)가 일본 및 해외에서의 판매 중지를 촉구하는 활동을 펼치면서 게임 내용의 심각성이 알려졌고, ‘아마존’ 등 인터넷을 통해 입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 영국 의회는 이 게임의 판매와 유통을 금지하는 동의안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영국과 미국 ‘아마존’은 이미 판매를 중지했지만 아동 포르노 규제가 느슨한 일본에서는 지금도 유통되고 있다고 신문은 전했다.

이퀄러티 나우는 성명을 통해 “여성들을 성폭행하는 내용의 제품이 일본에서 고수익을 올려 ‘로리콘’(롤리타 콤플렉스, 어린 소녀에 대한 중년 남성의 성적 판타지)이라 불리는 아동 포르노 시장도 거대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일본 정부는 왜 성폭행을 장려하는 내용의 게임 유통을 중지하지 않는가”라고 일본 정부를 향해서도 비난의 화살을 던졌다.

이 단체는 지난 6일부터 160개국 회원 3만명을 대상으로 강간, 감금 등의 성폭행 게임을 만든 제작·판매업체와 아소 다로 총리 등 일본정부의 각료들에게 항의문을 보내도록 촉구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의 게임 업체는 “이 상품은 업계의 자주심사기관 심의를 거쳤으며 어디까지나 국내 한정 판매용이다”면서 “국제인권단체의 항의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또 문제의 게임 소프트웨어 판매 현황도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일본의 아동매춘·아동포르노 금지법은 18세 미만의 아동을 성적으로 묘사한 사진의 제작 및 판매를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개인이 컴퓨터 등을 통해 입수하는 ‘단순소유’는 처벌 대상에서 빠져 있다. 아울러 애니메이션과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게임 등의 ‘가상 포르노’는 금지대상에서 제외돼 있어 아동 포르노에 대한 일본 정부의 규제 강화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신문은 전했다.

일본은 1996년 첫 번째 아동·청소년 성착취 근절 세계대회에서 전세계 아동포르노의 80%가 일본에서 생산되고 있다고 비판 받은 이래 아동 포르노물의 주요 생산국으로 지목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로에서 열린 제 3차 대회에서는 일본에 아동 포르노물 소유 자체를 금지하는 법의 명문화를 촉구하는 성명서가 발표되기도 했다.

<경향닷컴 고영득기자 ydko@khan.co.kr>

'불법폭력시위관련단체' 반발 확산

 

노회찬 "그럼 청와대는 불법성매매관련단체냐"

'불법폭력시위관련단체' 반발 확산

기사입력 2009-05-13 오전 10:53:59

 

 

지난 2월 경찰청이 '불법폭력시위관련단체'로 규정한 1800여 개 정치·시민사회·문화 단체들의 구체적 명단이 12일 공개되면서 반발도 거세지고 있다.

이 명단에 전ㆍ현직 국회의원실은 물론 원내정당, 종교단체, 국제영화제까지 포함된 것으로 드러남에 따라 반발이 거세지고 있는 가운데 역시 '불법폭력시위관련단체'인 진보신당의 노회찬 대표는 "그러면 행정관 두 명이 성매매에 연관된 청와대는 불법성매매관련단체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명단에 들어있어 어떤 면에서는 다행이다"

13일 오전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한 노 대표는 '어떤 생각이 드냐'는 질문에 "진보신당도 거기에 들어가 있다고 하는데 어떤 면에서는 다행이지 싶다"고 답했다.

노 대표는 "국방부가 작년에 불온도서 목록 리스트를 발표한 바가 있는데 시중에서 큰 호응을 받고 잘 이렇게 읽혀지고 있는 책들이 다수 포함돼 있어서, 그 리스트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섭섭해하는 필자들도 봤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그는 '언급된 단체들이 모두 폭력시위단체라는 말은 아니고 폭력집회에 참가한 단체들과 연관된 단체들이다'는 경찰의 주장에 대해 "여기에 규정된 단체들에 대해선 각서를 쓰게 하고 각서를 쓰지 않으면 그간에 주어왔던 정부지원금을 주지 않는 근거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관련단체라고 경찰이 발뺌할 문제는 아니다"고 반박했다.

그는 '정부보조금 지급 문제는 해당부처가 심의 단계에서 참고하라는 뜻이었지 불법폭력시위단체라고 지목해서 수사에 들어가는 건 아니다'는 해명에 대해서도 "경찰청장 이름으로 공문을 보냈고 수신자가 통일부 장관, 여성부 장관, 환경부 장관, 노동부 장관, 심지어는 낙동강유역환경청장까지 있다. 예산지원을 받고 있는 각종 사단법인 시민사회단체들에 대해서 이것을 근거로 해서 예산 지원을 중단하라는 그런 뜻이다"고 반박했다.

'어쨌든 불법 폭력 시위와 연관됐는데 보조금을 지급할 수도 없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노 대표는 "그런 식으로 하자면 이른바 친정부적인 활동을 많이 해온 일부 단체들 중에 가스통을 갖다 이렇게 대로에서 위협한다거나 또 실제로 폭행을 가해서 법정에서 불법시위와 폭력행위와 관련해서 유죄판결을 받은 그런 사례들이 있는데 그런 단체들에 대해선 왜 국고보조금을 계속 지급하고 있느냐"면서 "결국에는 정치적 보복으로밖에 해석될 수 없다"고 말했다.

예컨대 이번 행자부의 보조금 지급대상이 된 국민행동본부의 서정갑 대표는 지난 2004년 열린 '국가보안법 사수 국민대회'에서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 위반 및 특수공무집행방해 치상 등의 혐의로 기소돼 지난해 4월 징역 1년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인물이다.

/윤태곤 기자 (프레시안)

'피맛골'이 생겨난 유래를 아시나요?

 
'피맛골'이 생겨난 유래를 아시나요?
‘피마골의 유래’ 
서울 종로 1~3가에는 피맛골이 있다. 지금은 건물이 들어서 옛모습을 잃어버렸지만. 지난해만 해도 좁은 길 사이로 맛난 먹을거리를 파는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어 한 밤중까지 취객들로 북적되는 거리였다. 이름만 보면 얼핏 선짓국밥을 파는 곳 쯤으로 생각되지만. 이 곳은 원래 조로(朝路·조정에서 일하는 관리가 다니는 길)였던 종로 옆으로 난 좁은 골목길로. 말 탄 양반들이 길을 지날 때면 엎드려 머리를 읖조려야 했던 민초들이 말을 피해 숨어들던 길이다. 
반면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 명륜당 앞에 서 있는 하마비(下馬碑)는 예를 갖추기 위해 말에서 내린다는 뜻으로. 누구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곳을 지날때면 성균관 유생들의 공부에 방해가 되지않도록 말에서 내렸다는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처럼 옛날에는 말탄 이와 땅에 서있는 이 사이에는 그에 걸맞은 예법이 존재했다. 고려 초기까지만 해도 승마 예법이 다듬어지지 않아. 말을 타고 가다 상관을 만나면 무조건 말에서 내려 엎드려 절을 해야했지만. 효율적이지않아 고려 현종(991년~1031년) 원년(1009년)에는 문·무관이 노상에서 만났을 때 행하는 상견례를 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르면 말을 타고 가다 상관을 만났을 때는 상관의 직급과 자신의 직급의 상대적인 격차에 따라 처신을 다르게 해야 했다. 말탄 이가 종 3품관일 경우. 3품관을 만났을 때는 말 위에서 양손을 입까지 올려 목례를 하면 되지만. 1품관을 만났을 때는 아예 말에서 내려 보이지 않게 피하는 등 따로 예법이 있었다. 
이런 예법을 이른바 ‘피마식(避馬式)’이라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예법은 더욱 엄격해져서 임금이나 관리가 말을 타고 행차할 때는 백성들은 모두 엎드려 고개를 숙이고 조아려야 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너무 자주 있다 보니 불편하다는 민원이 발생했고. 결국 백성들이 편하게 피해 다닐 수 있는 뒷골목인 ‘피맛길’이 생겨난 것이다. 한 두 명도 아니고 하루에도 수많은 관리들이 지났을 테니 아예 피하는 게 나았던 모양이다. 
현대에도 회사원들이 직장상사와 마주 칠까봐서 회사 인근 사우나나 술집을 피하려는 것도 이런 유래와 일맥상통하는 걸까? 
이우석기자

‘동해, 일본해 표기는 뉴욕타임스의 실수’ 뉴욕타임스 전면광고 화제

2009년 05월 11일 (월) 20:12  뉴시스

‘동해, 일본해 표기는 뉴욕타임스의 실수’ 뉴욕타임스 전면광고 화제

【뉴욕=뉴시스】 
뉴욕타임스에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한 것은 실수라는 광고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뉴욕타임스의 실수(Error in NYT)'라는 제목의 이번 광고는 11일자(현지시간) A섹션 11면에 게재됐다. 지난달 6일 뉴욕타임스에 게제 된 한반도 관련 기사에 '일본해(Sea of Japan)'로 표기 된 것을 지우고 '동해(East Sea)'가 옳다고 지적하는 그림을 선명하게 넣었다. 

광고 하단에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바다는 지난 2000년 동안 세계 많은 나라에서 '동해'로 불려왔고 동해상에 존재하는 '독도' 또한 한국의 영토로 인정받았다. 이는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광고를 실은 주인공은 한국 홍보 전문가 서경덕씨(35, 성신여대 객원교수). 지난해 7월과 8월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에 독도와 동해 관련 전면광고를 게재해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그가 뉴욕타임스에 또 한번 일을 저지른 셈이다. 

특히 이번 광고는 뉴욕타임스의 지도표기 관행을 실수라고 공박하는 보기 드문 내용이어서 모든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광고 내용 끝부분에서 서 교수는 "전 세계에서 가장 명성높은 뉴욕타임스와 그곳에서 매일 진실을 알리기 위해 애쓰는 기자들에게 간단한 진실을 알려드리고자 한다"며 광고 의도를 설명했다. 

서 교수는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신문인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리트저널, 워싱턴포스트의 지난 10년간 아시아 관련 기사를 검색해 본 결과 '동해(East Sea)'로 표기 된 것은 단 한번도 없었다. 각국 정부와 글로벌 기업, 국제기구에서 가장 많이 구독하는 이런 글로벌 신문에 일본해로 잘못 표기 된 것을 바로 잡고 싶었다"고 말했다. 

또한 "이번에도 지난해에 네티즌 약 11만명이 다음-아고라를 통해 모아준 광고비용과 모나미, 두웰테크놀로지, 가덕ENG 등 기업의 임직원분들이 성금을 보탰다면서 '이번 광고는 '국민광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며 감사함을 표시했다. 

지난 5개월 간 광고를 준비했다는 서 교수는 "광고와 디자인 관련 일을 하는 선후배들이 광고시안과 웹사이트 작업을 하는데 많은 도움을 줬고 특히 뉴욕, 파리, 상하이 등 유학생들이 자진해서 외국인들을 상대로 디자인 테스트를 실시해서 가장 객관적인 광고를 만드는데 힘을 기울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광고 주체를 '다음 세대를 위해(www.ForTheNextGeneration.com)'로 소개하고 현재 이 사이트에는 독도와 동해, 고구려 및 발해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역사적인 증거자료와 언론기사 등이 영문으로 게재돼 있으며 세계인들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동영상 자료도 첨부됐다. 

서 교수는 "세계적인 언론매체를 통해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지속적으로 홍보해 국제사회에 알린다면 중국과 일본이 더 이상 한국사와 영토를 마음대로 왜곡하지는 못 할 것"이라며 "지속적인 대외홍보만이 우리의 영토를 지키고 다음 세대에 잘 물려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광고에 대해 한인독자들의 반응은 뜨겁다. 뉴저지의 정진숙(팰팍 거주) 씨는 "뉴욕타임스에 한국관련 기사가 나오면 반가우면서도 한반도 지도에 일본해라고 표시된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했는데 이렇게 통쾌한 광고를 보게 될 줄 몰랐다. 10년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뉴욕의 박동현씨(플러싱 거주)는 "아침에 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비록 광고지만 뉴욕타임스가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한다는 것이 아니겠느냐. 역시 세계적인 권위와 신뢰를 인정받는 뉴욕타임스답다"고 평했다. 

한편 '광고가 오히려 독도를 분쟁 지역화하는 것은 아니냐'는 일부 우려에 대해 서경덕 교수는 "일본의 유명 덮밥 체인점에서는 오래 전부터 김치를 1달러에 판매해 많은 외국인들이 김치를 일본의 음식으로 잘못 알고 있다. 글로벌 시대에는 '우리의 것'을 당당히 홍보해야 지켜나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독일이 프랑스와 폴란드 등과 공동으로 역사교과서를 만들었던 것 처럼 한중일 역시 동북아 역사에 관한 장기적인 공동 연구와 대책을 마련하여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해 나아가야 한다"고 제안해 관심을 끌었다. 

그는 또 "앞으로 Error in WSJ(월스트리트저널), Error in WP(워싱턴포스트)등 지속적인 광고 캠페인을 펼쳐 나가겠다. 특히 올해는 간도를 빼았긴지 100년이 되는 해인만큼 간도협약이 무효임을 전 세계에 알리는 광고도 준비 중"이라고 소개했다. 

서 교수는 1996년 파리 에펠탑 광장 광복절 행사를 시작으로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세계에 널리 알리는 일을 해왔으며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워싱턴포스트 등에 독도, 동해, 위안부, 고구려 관련 광고를 게재하면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또한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현대미술관(MOMA), 미국자연사박물관 등에 한국어 서비스를 이끌어 내는 등 '한국 홍보 전문가'로 활약 중이다. 

다음은 뉴욕타임스에 실린 광고 전문. 
'뉴욕타임스 기자 여러분께, 
지난달 초 우리는 뉴욕타임스 4월 6일자에서 작지만 중대한 실수를 발견하게 됐습니다. 귀 신문의 아시아 관련 기사에 첨부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바다는 '일본해'가 아니라 '동해'임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이 바다는 지난 2000년간 많은 나라들이 동해로 명기해 왔습니다. 동해에 위치한 독도 또한 부인할 수 없는 한국 영토입니다. 이는 역사에 등장하는 진실이며 명백한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 '일본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일본 정부가 역사를 왜곡한 것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명성높은 뉴욕타임스와 그곳에서 매일 진실을 알리기 위해 애쓰는 기자들에게 간단한 진실을 알려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관련사진 있음 > 
노창현특파원 robin@newsis.com 

위안부-기지촌 할머니 ‘동병상련 첫 만남’

위안부-기지촌 할머니 ‘동병상련 첫 만남’
현대사 아픔 간직한채 어버이날 함께 맞아
“숨지 말고 힘내시게” “나보다 힘든일 겪어”
 
 
한겨레  박수진 기자
 
 
 
» 어버이날을 맞은 8일 오전 경기도 평택시 햇살사회복지회 사무실에서 기지촌 여성들과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이 함께 평택 남산어린이집 어린이들의 춤과 노래 공연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낳으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8일 오전 경기 평택시 안정리 햇살사회복지회 사무실에서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작은 어버이날 잔치가 열렸다. 참석자들이 ‘어머니 마음’을 부르자 이를 지켜보던 할머니들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이번 행사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3명과 미군 기지촌 할머니 25명을 위해 마련됐다. 양쪽 모두 청춘을 빼앗기고 평범한 가정을 이루지 못해 제대로 된 어버이날 잔칫상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특히, 이들이 우리 현대사의 아픔을 각각 상징하고 있지만, 공식적으로 함께 자리를 한 것은 이날이 처음이다.

13살에 일본군에 끌려가 6년간 위안부 생활을 해야 했던 길원옥(83)씨는 60~70대의 기지촌 할머니들에게 먼저 위로의 말을 건넸다. “나도 일본군에 당했던 일이 내 잘못인 것 같아 얼마 전까지도 숨기고 살았어. 그런데 그건 우리 잘못이 아니라 국가의 잘못인 걸 알게 됐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니까, 숨지 말고 힘내시게.”

행사 중간에 평택시 남산어린이집에서 온 20여명의 유치원생들이 할머니들에게 “건강하세요”라며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고, 즐거운 노래와 무용을 선보였다.

할머니들은 미리 준비한 선물도 서로 주고받았다. 위안부 할머니들은 “건강하시라”라는 말과 함께, 한약을 기지촌 할머니들에게 선물했다. 기지촌 할머니들은 푼푼이 모은 돈으로 마련한 양말을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건넸다.

동두천·평택 등 미군기지 근처에서 미군을 상대로 일했던 전아무개(73)씨는 “나도 힘들었지만, 저분들은 나보다 더 힘든 일을 겪어서 너무 마음이 아프다”며, 연신 눈물을 닦았다.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했던 박순희(87)씨는 “우리는 서로 같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어서 보기만 해도 안쓰럽다”며 “빨리 관련 법이 만들어져서 저 사람들 살 방 한 칸이라도 마련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위안부 여성들은 관련법이 제정돼 생활안정 지원 대상으로서 생활비·주거비 등 지원을 받는 반면, 기지촌 여성들은 국가 배상의 대상이 아니다. 현재 기지촌 여성 노인 대부분은 셋방 등에서 홀로 살고 있다.


이날 만남은 ‘기지촌 여성들과 함께하는 여성연대’(이하 여성연대)가 주축이 돼 성사됐다. 여성연대에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햇살사회복지회, 두레방 등 여성단체와 연구자 등이 참여해 있다. 우순덕 햇살사회복지회 대표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힘을 받아 평택 기지촌 할머니들도 당당하고 힘내서 사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나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위안부 여성은 그동안 일제 수탈의 상징으로 조명을 받은 반면, 기지촌 여성은 비난만 받아 왔다”며 “이번 만남은 당사자들이 사회적 편견을 깨고 스스로 나선 역사의 한 장면”이라고 말했다.

평택/글·사진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막걸리 日서 웰빙칵테일 된 비결

 
[문화산책] 막걸리 日서 웰빙칵테일 된 비결 ,토속적인 이미지 과감히 탈피, 한식 세계화 첫걸음은 현지화
 
  • 채지영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책임연구원
    지난 4일 ‘한식 세계화 추진단’이 공식 발족됐다. 음식은 그 나라의 문화이며, 국가브랜드라는 말처럼 한식이 우리의 문화를 대표하고 세계에 알리는 첨병의 역할을 한다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날 추진단의 발족과 더불어 한식 세계화를 위한 여러 정책과 그 전략도 함께 발표됐다. 한식 관광 상품 개발, 한식 홍보, 한식 표준화 작업, 수출기업으로서 한식 업체 육성, 전문인력 양성, 연구소 설립 및 국가 연구개발(R&D) 지원 등 매우 전문적이고 거창한 계획도 많이 있다. 그러나 최근 일본에서 나타나는 한국 음식 유행 현상을 보면, 한국 음식이 세계화되기 위해서는 거창한 정책보다는 음식의 현지화가 우선돼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몇 가지 사례를 얘기해 보고자 한다.

    한국의 유명한 음식 프랜차이즈 A와 B가 일본에 진출했다. A는 한국의 맛 그대로, 한국 프랜차이즈 형태 그대로 한국인 상점이 밀집해 있는 한국인 거리에 문을 열었다. 반면 B는 이름과 음식의 컨셉트만 따왔을 뿐 일본인의 입맛에 맞게 새로운 맛과 메뉴를 개발했다. 매운맛을 대표로 내세우고는 있지만 한국인 수준의 매운맛이 아니라 일본인도 편하게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매운맛으로 재포장했으며, 음식의 양도 여럿이 어울려 먹는 푸짐한 한국 스타일이 아니라 깔끔한 개별식으로 일본인 스타일에 맞추어 제공했다. 물론 음식점 개점 장소도 한국인 거리가 아니라 일본 젊은이 유행의 중심지인 시부야 한복판이다. 어느 곳이 더 성공했는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최근 일본에서 막걸리가 유행이라는 소식도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서 유행하는 막걸리를 보면 우리의 막걸리와는 조금 다른 위상을 가진 술로 보인다. 한국 농민이 일하다 사발로 퍼마시던 컬컬한 막걸리는 일본에서 세련된 여성이 마시는 웰빙 술로 자리잡았다. 싸구려 플라스틱 병에 담겨 팔리는 한국의 막걸리는 일본 백화점에서 팩이나 작고 예쁜 유리병에 포장이 돼 높은 가격의 고급술로 판매되고 있으며, 일반 술집이나 막걸리바라는 전문점에서는 색색의 수십가지 칵테일로 변신해 일본 여성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또 하나 놀라운 일은 일본 선술집의 한국 안주 유행 현상이다. 지지미, 비빔밥, 김치찌개는 물론 돼지국밥까지 일본인 입맛에 맞게 변형돼 ‘한국 음식’이라는 타이틀도 없이 소개되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많은 일본 젊은이는 지지미를 일본말·일본음식으로 알고 있으며 돼지국밥은 어느 나란 말인지, 또 어느 나라 음식인지도 모르는 채 맛있게 먹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음식 판매에 따른 수익은 한국의 음식 산업과도 전혀 상관없다.

    정통 한국요리, 표준화된 맛을 주장하는 몇몇 전문가는 막걸리 칵테일이나 매운 일본 스타일 한식, 국적도 알 길 없는 돼지국밥은 한식이 아니며, 변형된 음식을 통해서는 한국 문화를 알릴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스시의 변형인 캘리포니아롤에 길든 미국인이 이제는 비싼 가격을 지불하면서 일본 정통 스시를 즐기는 것을 하이클래스 문화로 인식하고, 다양한 막걸리 칵테일을 즐기던 일본 여성이 한국 현지 막걸리 집을 찾아와 옛날 정통식 막걸리를 음미하는 것을 볼 때, 현지화된 음식일지라도 ‘접하기 시작하는 것’이 음식 세계화의 첫걸음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음식이 아무리 맛있고 영양학적으로 좋다 하더라도 현지 사람에게 강제할 수 없으며 우수성을 수백 번 말로 알린다고 한들 한 번 맛보는 것보다는 못할 것이다. 많은 현지 소비자가 쉽게 접하고 즐길 수 있어야 한식의 세계화는 그 다음 단계로의 발전이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음식 세계화 정책은 좀 더 소비자 지향적이 될 필요가 있다. 한식 세계화 정책이 ‘한식 표준화’나 ‘홍보’ 단계에 머무르지 않고 ‘현지화’ 지원 전략을 강화한다면 한식의 세계화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이다.

    채지영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책임연구원